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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언저리[마27:57-6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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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언저리[마27:57-66]

주하인 2019. 4. 20. 09:47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저물었을 때'

남의 이목이 덜할 때, 대충이라도 일을 마무리하고, 좀 편안할 때..  뭐 이런 뉘앙스다.


 거기에 아리마대 요셉이 찾아온다.

유명한 ...

그런데 그가 예수께서 '천국가기가.. 바늘 귀.. '라 하신 '부자' 였고

그가 '제자' 였다는 사실은

오늘 묵상의 주석을 보고는 처음 알았다. ㅠ.ㅠ;

( 나, 절대 부자는 아니다.  절대.ㅎ

 하지만 세상적으로 그리 인정되어 버리는 그런 위치.

 그래서 인가  이 분에 나를 투영해 볼 수 있어 달갑다)

그렇게나 많이 본 구절임에도..

그러니 눈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어찌 한톨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눈치 챌수나 있겠는가 싶다.

  각설하고

그나마 모두 멀리 도망치기 바빳으나

혼자라도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

정성을 다한 '염'을 한다 .

 이것

그의 믿음이 아직은 '부활'에 대한 인정이라기 보다

아마 성품, 그래도 조금은 더 깊은 지혜.. 덕이라 느껴짐은 웬일이던가?


하지만.

그러함을 통해서

또 예수님의 부활이 무덤에서 일어나심으로 되었으니

모두.. 그 어떤 것 하나도

주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벗어남이 있을런가?

(예정에 대하여 논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결국.. 그 커다란 예정 안에서 나와 하나님의 개인적.. 그 분의 우주적 원리 안에서

  시간, 공간.. 이 조율 될 뿐... 결국 예정에 포함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


 '부활'이 반드시 있을 상황에

부활을 앞두고 있는 믿음 수준의 한 유형을 보고 있다 .

  

 

61.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또다른 믿음 수준의 부류.

순수한 믿음.

부활에 대한 지식이나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 분이 보여주신 기적과 사랑에 안스러워

그 무덤곁을 떠나지 못하는 분들.

여인들은

지금이나 그 때나

한국이나 고대 중동이나 다 똑같다.

 훨씬 감정적인 믿음에 가깝고 순수하고 순종적이다.

내 아내도 그렇다.

거기에 똑똑까지 한 사람이긴 하다. ㅎ



62.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다른 부류.


부활을 믿지는 않지만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음이

그들의 신앙생활의 연륜을 알 수 있는 자들.

 교회안에 , 많은 .......분들.......

어쩌면 진정 불행한 분들.



 이 아침에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


부활 하실 것임이 너무나 확실한

부활 전 2일의 시기.


 그 안에

다양한 인간 부류, 그들의 믿음의 정도를 보고 있다.

부활에 대하여 누구나 아나

부활에 대하여 누구도 믿지 않는다.

부활에 대하여 경외심은 있으나 절대 믿지않는..

그래서

그들이 처한 이 땅의 상황,

3차원 세계, 육신의 세상, 물질계에서

그들이 처한 상황에 가장 맞게

둘아가신 예수님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들이다.


여기서..

절대로 떠나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의

육신 속에 갇혀 사는 자로서의

세상, 우주, 영원을 바라보는 눈이 보여진다.


특별히

난.. 그래도 유사성이 있는 아리마대 요셉의 마음이 들여다 보여진다.

 난 , 진정 부자는 아니지만 부자 부류에 속할 수 있는 상황..

최소한 먹고사는 문제로 허덕이지 않고

작은 물건에 대하여 사는데 아주 고민하지 않아도 될 위치라서

일단 그렇다. ^^;

그래서 인지 '예수'님을 영접하고 완전히 세상관이 변한 거를 보고는

주변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었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저리 급격히.. 라며..

그러다가 말겠지.. 하는게 또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의 예상이었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날이 갈수록 점차 뜨거워지고

여러 일들 (간증거리들... ) 이 일어나면서

기적이라고 칭찬하면서도

한편으로 많이들 질투들을 하는 믿음의 동류들도 있어왔다. ㅜ.ㅜ;

그런 사람.

그런 변화가 어쩌면 아리마대 부자요셉에게도 있으라 생각되어질 것이

그를 '제자'라 칭했음이다.

어디 한군데도 그의 이름이 나온적이 없다가

갑자기 '제자'라 오늘 묵상구절에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

그 제자, 나와 닮았을 지도 모를 그 요셉님께서

한계를 보인다.

그래.. 난.. 저처럼 신실하게 내돈 들여서 무덤까지 만드는

어쩌면 위험하고 더럽고(죄송..무덤얘기다... ) 힘든 일 (날이 저무니 햇다 잖은가.. ) 을 하지는 못하는 것봐서

그 분은 훨씬 더 나은 인격과 품성을 가진 분이 맞기는 하지만

만일 부활의 기대가 있었더라면

그리 예수님을 염하고는, 떠나지 못했으리라.

옆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는 여인들 곁에서 가만히 서서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거나

그들에게 '위로'와 '설명'을 하고

찬양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겠지..

그리하지 않음은

그의 믿음이 아직 .. 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당연히도 알지만

모든 믿음의 행동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지만

이들은 부활승천하신 후 오신 성령의 체험이 아직 없기에 불가한게 사실이긴 하다 .


그렇다면

그를 닮은 나...

성령이 충만할 그들을 닮기 원하는 우리가 해야할 바는 무엇인가?

무엇을 깨닫게 하심이시던가?

오늘 묵상이?


 일단,

난, 부활의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수없이 많은 부활의 얘기를 듣고 앎과

일상에서의 부활이 어떤 것임을

나름 체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저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믿음은 아니지 않던가?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에 ..

관계의 파생되는 문제들에 막혀

주님이 원하시는 성령의 열매, 자유로운 영혼의 흐름은

어찌 그리도

내 매일의 삶에서 이루어지지 않던가?

그것 .

부활의 믿음.. 살아 역동하실 하나님을 확신하고 믿는다면

내 삶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현상들이 아니지 않는가?
 돌이키면..

아직 나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음이다.

그렇다 .

난..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다.

잊고 살았었다.

다시 되돌이켜야 겠다 .

 아직 .. 내 믿음은 부활 예수님을 온전히 기대하고 있지 못해왔었다 .


그렇다면

오늘 묵상을 통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시다.

아직 그러함을 인정하라는이야기시다.

아니.. 그러함 조차 .. 살다보면 완전히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또 이 3차원 육신 안에 파묻혀 살아가려 하고 있단 이야기다.

편하고 쉽고 게으른 선택...


 다시 돌이키면

내 관심의 촛점이

이 땅이 아니고

'하나님 계신 그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

이 땅을 포기하고 수도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땅을 살되 '천국'을 지향하라는 이야기고

그것은 '부활'을 확신하는 믿음이 회복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아니다.

솔직히 ... 많이 안다.

자주 말씀 묵상을 하며 잊지 않으려 매일 노력은 한다.

그러나.. 내 수준이 아직 언저리 믿음이었음을 인정하고

더 기도해야한다.

처음 예수님 영접하고

쏟아져 들어오던 원리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주님은 이땅과 하늘의 경계를 허무셨다.

 십자가를 통하여

성전에 들어갈 매일의 기회를 여셨다.


 이제 곧 부활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내려 놓을 것 내려 놓고

정리할 것 정리해야 한다.

고집스럽고, 한탄스럼고... 슬프고 ..도저히 안되는 것..

예수, 십자가 에 달리셨기에 다시 매달고

예수 무덤에 계시니

나도 내려 놓고 기다려야한다.

내 자아의 그러함, 내 자존심이 썩어야 할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 무덤에 같이 내려놓아 썩여야한다.


난... 그리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만들어 놓으신

우주적 원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길 기대하며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 .

부활의 소식,

성령의 강한 임재를 통하여

막히려 했던 내 속의 흐름을 다시 뚫으실 것이시다.

감사하다.



주님.

깨닫는 부분이 많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같은

아직은 채워야 할 부분이 많은 믿음 말입니다.

주여.

슬프고 우울하고 좌절되고 썩어가야 할 것이 아니고

죽음과 생명의 주재자이고

사통발달 막힘이 없으신 주님 예수님의 그러하게 하심으로 인하여

새롭게 부활될 날을 기대하며

그리되게 하소서.

내 홀로 되지 않는 것..

부활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그리하소서.

부활의 언저리에 있는 자로

정리하며 기다리는 자 되게 하소서.

내 주여.


감사하며 간절히 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0.01.03 묵상 분


속이는 것들과 속지 않음 


 날은 궂고 어두우며

바람은 차고 음습하다

 하늘은

 지렁 지렁

얽매어져 있는 듯 보인다 

 

저 전깃줄로 인하여

등은  

밝힐 수 있겠지만

어지러워 지고

답답하게 막혀 짐

어찌 해야 옳다는 말인가

 

주님이

이 땅에

온전히 임하시어

어두움이 사라지고

추위가 없어지며

답답함이 풀려날 때가 되어도

 과연 

지금의

전깃줄이 필요할까?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거짓 들이

온통 묶고 있는

이 답답한 세상에

주님 앞에 올바로 섬이

진리로 세상을 밝힐

유일한 길임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 저물었을 때'

남들의 이목이 뜨이지 않을 때 즈음.. 이라는 의미인가?

격랑, 흥분... 이 가라앉을 때 즈음..이라는 의미던가?

 무엇이든, 아리마대 부자 요셉은

이목을 신경을 쓰든 쓰지 않든

드러나지 않게라도

지위를 건 모험을 한다.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하여 무덤에 모시려한다.

빌라도가 주라 한다.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두 마리아는 

멀리서 십자가를 쳐다보고

무덤에 좇아오고 

무덤을 향하여 앉았다.

'앉았더라'라는 표현이 가슴이 아프다.

 그들의 절망.

그들의 사랑

그들의 하염없음

그들의 희망없는 듯한 장래 가 느껴지는 단어다.

아마도 '털푸덕~' 이나 '철푸덕' , 혹은 '철썩'하고

의성어를 붙히면 더욱 뚜렷한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위의 두 그룹의 사람들.

그들의 공통점은 '순수'함이다.

'조건없음'이고

드러나지 않는 적은 믿음의 행위의 표현이지만

끝까지 유지되는 믿음이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들의 주님에 대한 믿음은

감동을 체험한 자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자' 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깊은 사랑이 느껴지는 것이다.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빌라도를 포함한  대 제사장 일행 그룹.

분명코 어제 묵상에서

'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였음을 후회하던 자들이다.

그들이 또 이런다.

'예수는 속이는 자다'

' 저~' 속이는 자.. 라고 표현을 한다.

그냥 속이는 자가 아니고 '저 ' 속이는 자라 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들의 마음을 단속하기 위한 표현이다.

자기 다짐이다.

그것은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싶은 의지의 표현이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 이하 그들이 행하는 태도를 보면

참으로 익숙한 느낌을 준다.

 새로운 사상에 접하고 강력한 충격을 받으면

자신이 추구해온 세상이 무너질까봐

악을 쓰는 그런 모습들...

 

' 저 속이는 자'라는 구절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마술을 보면서

그 너무도 실제 같은 거짓에 대하여

놀라고 감탄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누구나 자신이 듣고 보고 느낀 것을

진실로 믿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진실이 과연 얼마나 진실일까?

 동성애.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고 당연히 '죄'일 수 밖에 없는 것들.

그러면서 수천년 동안 당연히 그렇게 취급되고

그 세월 동안 '병'으로 인식되며

정신과 학에서도 그리 단정을 해놓았던 것이

어느샌가 '병'의 카테고리에서 풀어 놓아 버리고

세상에서는 '성적 취향의 차이' 정도로 인식해 버렸다.

법으로 동성애 부부를 인정한 나라가 많고

지금은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드러내놓고 질타하다가는

뭇매를 맞고  지적으로 천한 자들로 공격 받기 쉽상이다.

'예'가 그렇다.

무엇이 옳은가?

지금의 세상에 그것을 진실로 믿는 자들에게는

'우리'의 생각을 믿는 자들이 '속는 자'들일 수가 있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게 진실이니까...

 비단 이런 일 뿐일까?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진실들이 있을까?

교회 내에서는 안그럴까?

하나님의 일로서 '선교'를 하지만

그 안에 자신의 자아가 숨어 있어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 표방을 하고

많은 오류를 범하는 일은 얼마나 많을까?
그 사람은 그것을 진실로 믿지 않을까?

 구제는 어떤가?

기도는 어떨까?

금식은 어떨까?

열심을 보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믿는 자로서 당연히 나가야 할 길이지만

지나치면 율법으로 변하는

그 지점은 어디인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속는 것일까?

 

 저 속이는 자.

바리새인들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그들 눈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술' 같은 일을 해서

자신들을 속이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들이 수천년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행위를

흔들려고 온 '사단'의 장난은 아닐까?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보이셨던

그 놀랍던 일들에 대한 생각조차 흔들어 털어 버리려고 하지 않던가?

'아마도 '마술'이었을 거야.. '라 자위하며...

 

 현실로 돌아와

주위에 수많은 '이단'들이

너무도 그럴 듯한 논리로 다가올 때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혹시 '예수님'을 속이는 자로 인식하는

바리새인의 입장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을까?

 진짜로 현 세상의 '장로교', '감리교.. 만이

하나님의 올바른 ... 인가?

수천년을 내려오던 ' 유대교'도 오류고

천 몇백년을 내려오던 ' 천주교'도 틀릴 수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단'들의 논리가 완전한 버려야 할 것들인가?

....... 이러한 질문 중 '거짓'이 어디까지일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이던가?

무엇이 속이는 것이고

무엇이 속이는 게 아니던가?

 매사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느때 거짓으로 변하던가?

 

살아간다는 것.

사람들.

날 때부터 사람들은 '빈깡통'이나 다름없다. 

그 빈깡통이 '달란트'에 따라

콜라병, 김치통....으로 달리 만들어 졌을 뿐이다. 

거기에 담기는 것은 콜라와 김치가 아님에 따라

아이 오줌병이 될 수도

새우젓 병으로 

어리굴젓 병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 속이는 것.

잠시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영혼에 '속이는 것'들이 담길수 있고

그 속이는 것을 담은 후 우리는

콜라병이되 오줌병이 될 수도

김치통이되 어리굴젓 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런 어지러운 세상,

어지러운 매시간에

어찌해야 '속이는 것'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당연히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한다.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혼란을 시켜도

주님 십자가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은

'속이는 것'이다.

 법정 스님.

요새 그 분의 돌아가심 이후 세상이 떠들석하다.

그 분의 책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좋은 분이시고

좋은 내용의 책이다.

깨어 있는 지식인이다.

그 분은 거기까지다.

그 분은 십자가 앞에 놓일  수 없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늘 '말씀' 앞에 서 있어야 한다.

말씀은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다.

묵상을 하고 그 분의 말씀하심이

살아계신 아버지의 말씀으로 느껴져야 한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 같이 다가온다.

그들은 그럴 듯한 논리와 태도로

가끔은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세상은 온통 기준없는 따스함으로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내가 잘못되었는가?' 많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

고리타분한 이 내 삶의 패턴이 혹 '속는 것'은 아니던가..하는

생각이 들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말씀은 생명력이 있다.

그 말씀 앞에서고

말씀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말씀으로 매일 매일 주시는 가치로 날 바로 잡을 때

세상의 흔들림은 줄어들고

내 마음에는 평강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님의 기쁨과 사랑이 날 경험케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난 말씀에서 어긋나는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릴 일이 없어져 간다.

속이는 것

날 유혹하는 어떤 것도

말씀 앞에서 평안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도 모르게 멀리하게 되어가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치신 가치.

그 분의 원리 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은

사단의 속이는 자로서의 권능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길이다.

그 길은 '율법'자나 '기만'자로

스스로의 믿음을 망쳐가는 지름길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매일' 서야 한다

그길 만이 '속이는 자'들에게 '속지 않는' 길이다.

 

 어제는 고난주일의 마지막 '금요 성령 집회'였다.

하기오스 찬양팀으로

흰 와이셔츠와 튀지 않는 넥타이와

검은 바지를 입고 섰다.

 마음이 새롭다.

요사이 남자 싱어 분들의 참여가 저조하다.

그것은 마이크 차지할 기회가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튈 수 있는 마음의 흡족함을 채울 기회다. ㅜ.ㅜ;;

 연습시간이 지나면서 한분 한분 들어오신다.

어제는 내 마이크 잡을 차례가 아니다.

그래서 양보했다.

아쉽다.

하지만, 아침 묵상에 '적은 소리'로 주님께 찬양을 드릴 것을

적용으로 삼지 않았던가?

아.

주님이 그 적용을 강제로 시키시는 구나 .. 했다.

손이 자유롭고

찬양의 악기와 찬양단의 소리에

내 목소리는 가려져 버릴 것이다.

 예배석에서는 내 목소리가 주위를 시끄럽게 하고

내 요란한 주님 찬양제스추어가

주위 , 특별히 연세드신 분들이나 초심자에게

없지 않아 부담이 될 듯한 것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다윗'의 그 열렬한 찬양을 모델 삼아

난 혼자 부끄러움을 누르고는 있었왔지만 ㅎㅎ

이 곳은 오히려 그러함이 자연스러움이다.

 두손이 자유롭고

아무리 소리질러도 '적은 소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주님이 마련하신

나와 주님 만의 독대의 기회.

이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써봐야

마이크 소리보다 작을 것은 너무도 분명하기에

주님만 보면 되는 것이다.

 처음 부터 거의 끝까지 난 눈을 뜨지 않았다.

그게 내 스타일이다.

눈감고 깊이 감정 몰입하는 것.

이전 세상가요나 팝송 부를 때도 그랬다.

감정 몰입은 훈련되었다.

 이제 거기에 주님 말씀 묵상을 대입시키고 있다.

어제 아침 묵상이

적은 소리로 '큰 소리'를 내신

예수님의 그 강력한 에너지파와

그로 인하여 터져 나가고 열리고 찢어져 버리는

엄청난 우주 에너지 파의 '골고다 언덕 십자가 현장'을

난 알고 있었다.

 난 주님과 만의 독대로

그 현장을 내 영혼 속으로 모셔온 것이다.

찬양은 음폭의 제한을 막아 버린다.

 내 소리는

언젠가 수년 전에 '간증'거리로 고백한 글이 있다시피

'성대결절'이 생길 지경까지 힘들었던 후

'주님 알아서 하소서' 나도 모르게 고백한 후

음폭이 훨씬 넓어지고 영적으로 변했다.

그러기에 고음과 저음을 굉장히 자유롭게 이동한다.

음폭이 넓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성악적 발성 마져 체험하게 하여

음량이 상당하다.

단, 세상 노래할 때는 갈라진다.

내 자아가 튀어나올 때는

목소리가 막히고 가래가 끓는 듯 막힌다.

찬양 시 체험이 많다.

 내 찬양은 힘이 있다.

가끔 고백을 할 때가 있다.

회복....................

 어제 눈을 감고

주님의 말씀을 모셔오며

묵상하며 찬양을 하자

잠시 잠시 그 시간으로 가는 듯 하다.

은혜롭다 .

알 수 없는 힘이 내게 넘친다.

무엇인가 터져나갈 것 같다.

의도적으로 눈 뜨지 않지는 않했지만

거의 끝까지 난 주님과만 찬양을 했다.

......

이러고 나면 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한다.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금씩 발전함을 느낀다.

나를 묶고 있던 어이없는 거짓 속박들로 부터

풀려남이 느껴진다.

굳이 내가 막지 않고 제재하지 않아도

여러 거짓으로 부터 자유로와 진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과도한 '재정에 대한 욕심' 같은 것.

' 자식'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

비교........

............

그렇다.

그런 것들...

의지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자제하고 절제할 수 있다.

깨달음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언젠가 그것은 가슴 한구석에 멍으로 작용하여

나이 많이 들어 '우울증' 등....심리적 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세상의 '속이는 원리들'은 그렇다.

자신이 해결하려는 자생적 원리는

모두~ 다~ 그렇다.

 내가 말하는 자유로움은

훨씬 폭이 큰 자유를 이야기 한다.

걸림이 없어지는 것.

그것으로 부터 벗어나 한걸음 위에 서서 관조하는 것.

...

그것을 말한다.

그것은 지금은 물론 아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니다.

가능성을 보여만 주신다.

발전한다고 말했는데

발전은 주님이 나에게 보여주시는 '증거'라 생각된다.

소망이다.

앞으로 난 그렇게 될 운명임을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이시다.

 

 아침에 괜한 '유혹적 상상'이 날 잡으려 한다.

나이 들어도

가끔은 살아 있는 지라

밀고 들어오는 육신의 유혹들이 있다.

그러니 젊은 시절의 유혹,

특별히 제한이 없어진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그것들을 저항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힘이 든 싸움일까 불쌍하기도 하다.

그러기에 '예수님 ' 믿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 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들이 각종 '거짓'으로 유혹을 할 때

손을 들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생각이 된다.

하지만, 아침의 난 머리를 털었다.

'그러다가는 예수님의 이 평안을 잃게 될 것이 분명하고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의 행복을 잃을 수 밖에 없을 거야'라는

생각에 미치는 순간

그 유혹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

길게 말했지만

'속이는 자'

'저 속이는 자'들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아니 속이는 자들이 있다는 것도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 조차 인식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허위들.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유혹들.

순간 순간 치미고 다가오는 거짓의 논리들.

그것에 속지않고

주님 나라에 가기에는

이 삶이 그리 녹녹치 않다는 것이다.

아니.. 산다는 것 자체가 '고뇌'다.

고해의 바다다.

누구의 말대로..

 이 삶을 살며

속지 않고 올바로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주님 예수님,

특별히 그 분의 십자가 앞에 철저히 나와야 한다.

우리의 노력과 선택을 기울여야 한다.

말씀 앞에 서야 한다.

그로 인한 에너지와 지침과

그 로인한 안식과 평강을 에너지 삼아야 한다.

그래야 죽을 때까지

속지 않고 중심을 잡아

주님 오실 그 날에

주님 뵐 그날에

웃는 얼굴로 안겨서

주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적용

 

1. 아버지 학교에 간다.

 2주차 째다 .

 지난 주는 당직으로 못갔다.

 봉사도 주님을 위해 한다.

 봉사하는 내 자신의 만족은 또다른 거짓이다.

 주님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의 허락함이 계시고

 내 평안을 나누기 위해 가는 것일 뿐이다.

 

2. 찬양한다.

 기타를 칠것이다.

 내 감각과 감정이 주님을 앞서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속지 말자.

 말씀 앞에선 내 찬양의 달란트를 

 힘이 든 아버지들 앞에 내려 놓을 뿐이다.

 

3. 말씀 여덟장 읽겠다.

 늘 적용에 고백해야 지켜진다.

 억지로라도 말씀 앞에 서야 한다.

 그 길만이 내 천국행 여로를 순탄히 지키실 것이시다.

 

4. 웃는다.

 착해진다.

 주님 기뻐하시도록.. .

  주님 도우소서.

 내 .. 이웃을 올바로 대함이

  주님께 올려드리는 정성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5. 끝까지 주님을 따르리라 .

 저물때라도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갔다.

 무덤, 그 암담한 곳이라도 두 마리아님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을 놓치 않았다.

 나도 그러리라 .

 아무리 상황이 내 바램과 다르더라도

 주님 살아계심과 부활하실 것임을 잊지 않으리라.

 내 비록 현란한 봉사와 남을 감동시키는 선교의 달란트는 없더라도

  난 내 가진 것으로 끝까지 주님 앞에 내려 놓으리라.

 

 

기도

 

  주여.

귀하신 주여.

전 주님이 부활 하실 것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끝까지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합니다.

주님.

저들의 저 충성과 사랑을 잊지 않음과

드러나지 않아도  지속하는 열심을 보고 있습니다.

저도 닯게 하소서.

특별히 그런 때 마음 속에 들어올

절망의 단어

암울함의 감각에 속지 않게 하소서.

주님은 영존하시고

주님은 살아계시고

주님은 무소부지

주님은 사랑의 원형........

그 수많은 이유로 인하여서라도

난 주님을 놓지 않으렵니다.

주님.

주님 만이 진리이시고

주님 만이 변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오늘

곧 있으실 부활을 기대하고 감사하며

주님 앞에

똑바로 서서

주님 말씀하시는 것을 바로 볼 수 있길 다짐합니다.

 

주님.

제 자식들 그리하게 하소서.

제가 아는 이 놀라운 원리.

너무도 당연한 원리를 잊지 않게 하시고

그 아이들이 주님 안에서 놀라운 평강을 누리게 하시고

그 아이들의 삶이 주님 안에서 자유롭게 하게 하소서.

세상의 거짓들 멀리할 마음을 주시고

그러기 위해

주님의 사랑과 감동으로

제 아이들 가슴과 영혼을 세척하고 채워 주소서.

늘 성령 충만하게 살게 하소서.

제 아내

제 부모님

제 주위

여기에 오시는 모든 분들...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리하게 하소서.

그래서 세상의 거짓에 속아사는 자들로

주님 앞에 고개를 들지도 못하게 하시고

세상의 불신자들이 없게 만들게 하소서.

매일, 세상의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진리이신 예수님 앞으로 손들고 나오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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