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어떤 이 들은 어떤 이 들이었을까[눅11:1-13] 본문

신약 QT

어떤 이 들은 어떤 이 들이었을까[눅11:1-13]

주하인 2016. 2. 8. 11:35




3.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정말 궁금한 것.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하나님이시기도 하시기에

주가 쓰겠다하면 나귀를 풀어주실 것은 알고 계셨다 하셨어도

그게 나귀가 문 앞 거리에 서 있는 불특정 다수에 의해

그것도 아직 예수님께서 바리새파에게 지목 받고 있는 그 살벌한 시기에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반응하여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다.


 어떤 이들이 저작거리에 배회하다가

불현듯 처음보던 사람들이 들어와

어쩌면 동네 친구였을 수 있는 주인이 있는 '나귀'의 목줄을 풀어가려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히 몇몇을 데리고 가서

그 들에게 약간은 두려움을 주며 무서운 어투로 말했을지 모른다.

'이것 풀어가서 뭐하려 하느냐?/


그랬더니 뜬금없이 그들이

'주가 쓰시겠다' 하는데

그들은 그 '주'가 누구인지 명확히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무엇인가 끌린 듯이 아무 말도 못하고 긴장했던 근육이 풀어지고

자신들도 모르고 '이에', 그 말에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어쩐 일인가?

무슨 일이 그들 , 어떤 이들의 영혼 안에 일어 났길래

그냥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저리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을까?

하나님이 인간들을 향해 최면술을 걸으셨던가?

그들의 손해를 손해라 느끼지 못하도록 마음을 움직여 강제로 내 놓을 수 밖에 없는

그 어떤 '신비한 일'을 행하셨던가?

 하나님의 속성에 잘 어울리지 않는 상식이다.

하나님은 최소한으로 인간 세상에 간섭을 하시는 것을 원칙으로 하신다.

당신이 인간들과 언약한 '제사'를 위하여

온전한 제사,

단 한번의 제사로 죄를 사하시기 위한 방법으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한 최대한의 방법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땅에 '성육화' 시켜

살아계신 어린양 속죄 제물로 이땅에 보내신 그 분이

과연 그 어떤 이들에게 마음을 강제적으로 바꾸거나 최면술이란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그 나귀를 빼앗는 '사술 邪術'을 베푸셨고

그것을 미리 주문 걸으셨기에 '예수'께서 자신 있게 저리 말씀하셨던가?

 아니다.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분의 속성과 그런 사술은...


 그 어떤 이들에게 아마 어떤 중요한 내면적 변화가 있었을 것이고

그 내면적 변화는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진정한 '삶', 영생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햇을 것이고

그러한 고민과 더불어 성령의 터치가 시작되어

자신도 모르는 잔잔한 감동이 그 가슴에 흐르기 시작했을 지 모른다.

 마치 오래 그리워 하던 연인이

봄바람 소리와 함께 까치가 울면서 돌아올것 만 같던

그 아침의 묘한 들뜸과 더불어

할일 없이 집을 나와 저자거리에서 친구들과 방황하던차

눈에 희한한 일이 뜨이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들의 입에서 예상치도 못하던 말,

'주께서 쓰시겠다.' 라는 말이 들리자

그 싱숭생숭하던 마음의 정체가 저것이었음,

'주님 예수님' 의 쓰심에 참여함이었음을 순간 깨달아 졌고

그들은 여지없이 허락하고 말았을 것임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찌 예수님이 아셨을까?

당연히 아실 것임이 분명하지만 강제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면

난.. 이리 연상된다.


예수님을 믿고 정말 좋은 것.

잔잔한 기쁨.

나를 중심으로 내 반경 얼마가 내 기쁨의 원천인

성령의 보우하심으로 덮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뚜렷하지 않지만 있다.

 금요 예배에 가서도 '찬양'을 기술적으로는 정말 잘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목소리와 태도에서 번지는

그 성령의 기쁨의 흔적들을 느끼게 되는 분들이 있다.

단지 열심인 분들과 차이나는 그 촉촉함..


 아마 예수님께서는 그 성령의 흔적을 더 크고 뚜렷이 느끼고

제자들이 묻는 그 순간에

그 어떤이들을 느끼고

그 어떤이들의 감성과 영성에 반응하셧을 것이다.


 그 어떤이들은 과연 어떤 운명을 가졌을까?

십자가를 대신 진 알렉산더 루포의 아버지..

그가 루포를 성경에 드러나게 한 신앙의 사람이 된 것은

그가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인 것인데

루포와 그의 부인은 나와도

그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았다해도

그로 인하여 그러한 결과가 빚어진 것처럼

나. ..주하인도..

그들 어떤 이들도..

이 곳에 오시는 대 부분의 사모하시는 분들도..

비록 성경에 이름이 등재되지는 못하더라도

아마 하나님께서 일대일로 너무도 귀하게 그 인생이 빚어질 것이 분명하다.


나.

그 어떤이들을 묵상하며

이 구절에 마주할 때마다 들던 의문이

은혜롭게 깨달아 지는 것이 참 좋다.

 그 어떤 이들의 하루하루는 비록 어제와 다름없이 저자거리에 나 걷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나귀가 풀려서 나간 이후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닐지라도

그 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하여

성령의 사람으로

주님의 날개 밑에서 신앙이 잘 익어 갔으리라 생각된다.


나.

구정이지만 시골에 안내려 갔다.

며칠 후가 어머니 생신이라 대신 그 때 내려 오라시는 말씀에 그리하기로 했다.

지금은 고요한 방 안에서

아들 세배를 받고 떡만두국을 한그릇 해치우고

다시 내 서재로 들어와 고요한 시간을 맞았다.

자극이 별로 없는 중년의 고요.....

 그러나 그 어떤 이들 처럼

하나님은 계속 내 성령의 흐름을 보고 계시리라.

나.. 그것을 믿는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 안에서 나는 힘있게 변화할 것이다.


난 어떤 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특별한 이이기  때문이다.



주님.

오늘은 저잣거리에서 떠돌다

나귀로 인하여

예수님의 제자들과 먼저 예견하신 예수님의 성령의 흐름과 터치가 일어난 과정을 봅니다.

그들이 허락해서

예수님은 나귀를 얻었지만

그 허락하고 나귀가 예수님께 연결되는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로 엮여지며 예견되고 조합되고 짜집기 되어

하나의 작품 ( 예수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나귀 사건 작품)까지 엮여지고

그 후 그 나귀들과 헤어진 그 어떤이들 몇은

예수님의 뜻대로 그 인생을 살았을 것임을 예상해 보게 ㅎ십니다.

저도.. 저잣거리에 빈들거리는 한량이 아닌가...

자주 내 속에서 뭐라합니다.

게으르게 내 배만 채우고 하나님의 일을 하지도 않고

더 많은 관계를 부지런히 만들어 가며

내게 허락되어진 많은 버퍼들을 그들에게 전파하여

단 한명이라도 더 열심히 전도하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초조감.. 말입니다.

아니면 최소한 성화를 위하여

더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하고 '용서'하며 이룸을 이루어 내야 할 것 같은

그런 초조함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을 통하여

그럼에도 성령으로 엮여져서

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진정을 느끼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래도 인내하시고 기다리시고 제 결국을 예견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묵상을 마무리하고

뜻을 깨달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제게 둘러진 '성령의 보호막'을 느끼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보호막끼리 연결되어

언젠가 하나님의 뜻을 엮을 또다른 그 어떤 이들 같이

하나하나 연결되어 성전을 이루어 가신다는 성경의 말씀이 깨닫게 되어

다시금 감사합니다.

내주여.

주님이 아니시면 전개하여 인생에 접목하고 자유스러워질 아무 논리가 없음에도

이처럼 깨달아 아는 자로서 차분해지게 해주심도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내 주여.

어떤 이 안에 속해진

어떤 자 주하인 ,

내 죽도록 하나님의 그 사랑과 보호막 아래서 떠나지 못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 지혜로운 자[눅11:37-44]  (0) 2016.02.11
집과 성전 사이[눅11:14-26]  (0) 2016.02.09
예수님 발치에 앉아[눅10:38-41]  (0) 2016.02.07
영생의 자격자로서의 사랑 [눅10:25-37]  (0) 2016.02.06
이리&양[눅10:1-16]  (0) 2016.02.04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