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슬프다를 통해 행복하다를 떠올리게 되는 축복에 대하여[애4:1-10] 본문
부제) 이땅의 거짓들을 작별하는 슬픔에 대하여
전에는 이제는 이후는
예수님 안에서 진정 슬플 것을 슬퍼할 수 있게 하소서
내 눈에 바라보이는 세상
아직도 내 주변에 여전한 현상들
그것들은 그 안에 머물면
바로 지옥도이고
끝이 번연히 예상되는
파멸과 절망의 그것들이며
눈물이 눈을 썩힐 만큼 울어도
해결될 기미조차 없는 절망들이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여유롭다
안타깝다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다
두렵지만 무섭지만도 않다
주님 그리시는 세상
주님이 바라보시는 현상
그리고 서계시는 그 땅 그곳에
내가 함께 있을 수 있음이 느껴짐,
그러함이 점점더 커짐으로
이제는 그렇다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다
슬프고 두렵지만
무섭지만은 않다
아니 오히려
점점더 고요해지고
점점 더 푸근해지려 한다
그것을
말씀과 은혜 가운데
같이 동행하시는 주님의 덕
주님의 존재의 그늘이라
내 영혼이 깨달아 알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진실로 행복하고 감사하다
내 나머지 인생
주님의 손잡고
점차로 더 초연해가지는 삶을 살다가
부르시는 그나라로 소천할 것이
확신되어지는 아침이다
아직은 슬프지만
곧 더 행복해질
그날이 확신되는...
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슬프다' 했다.
NIV에서는 저런 단어가 없다.
그냥 How 로 시작한다.
'어찌 그리' 만 있다.
거기에 슬프다를 넣음이 맞는 해석인지 몰라도
영어번역을 하면서 '탄식어'를 집어 넣은 분의 마음을
그렇게 허락하시어 저 한단어
'슬프다'를 집어 넣게 하신
하나님의 뜻, 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타까움,
긍휼하심
정말 슬퍼하심을
'예레미야'님의 그것 뿐 아니라
성경 번역가님들께서
이 구절을 해석하시며
얼마나 그 가슴에 안타까움이 밀어 넣어지셨는지
이전 NIV.. 나 KJV 번역과 다른
좀더 명확한 '슬프다'를 넣게 (주께서 허락... ^^;)하셨을까...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을 때
온 우주를 만드신 그 분께서
겨우 이 땅의 '금'을 안타까워 하셨을거며
겨우 지구시간 80년 평균 인생의 인간들을
저리 '슬프다'라는 표현이 쓰실 만큼 안타까워 하실 가치가 있으셨을까?
그러니.. 감정이입을 허락하시고.........
'슬프다'라는 단어가 이입되게
허락하신 거 아니시겠는가?
그런 가장 어마어마하시고 가장 광대막측(cosmos, macro,.....^^;) 하셔서
'눈앞에 들이대는'
우주의 과학적 단위들의 나열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우리의 지력으로는 도저히 상상해내기 힘들
그런 '크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작은 (micro..)' 단위 -물론 원자, 양자까지 내려가면 그 작은 크기는 또 상상하기 힘든 무궁하고 무진한 단위다. ^^;- 의 우리들에게 까지
'슬프다' 시는 단어를
우리 한국 , 주하인들에게 보이시며 까지
말씀을 시작하시는 이유..
그 이유에 대하여 오늘 말씀이 집중이 되어간다.
그것..
예레미야님의 눈물의 안타까움,
이땅에 내려오셔서까지 십자가를 지면서
우리의 죄를 안타까워 하시며 흘리시는
그 안타까움의 눈물을 깨닫게 하시지 않던가?
무엇이 안타까우셔서
어찌도 그리 많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께서
'여유 ^^;' 가 있으셔서
이땅의 우리, 특별히 대한민국 PT의 지금 이시간의 주하인을 위하여
'슬프다'를 허락하셨을까?
그 슬프다의 대상이
우리네 '먼지'인생들의 눈앞의 가치와 동일한
겨우 '금'과 유한한 인생의 소유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같이
공유하시는
슬프다 .. 아니신가?
나..
그게 감사하다.
그래서 '슬프다'를 보면서
마음이 울렁인다.
그 마음이 울렁이는 '나'를 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게 보인다
여러가지 정말 부족한 것 덩어리가
'나'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점차로
주님과 같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땅.. 정말 '금'보기를 돌같이 해야할 당위성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훨씬 강했던 '육신의 끌림'.. '과거의 소리들의 바글댐'을 인하여
그냥 머리속에 스쳐가는 개념이었다면
이제..
주님께서 '슬프다'시니
같이 슬퍼지려한다.
같이 바라보며
주님께서 내 안에 그려주시는 그 시선,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
예수님이 어찌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던지.. 가
이해가 가려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같이 느끼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슬픔'...
그 슬픔을 우리의 시선으로 까지 보아 이해가 갈 수 있을 레벨까지
내려주고 또 내리 앉아주사
같은 단어,
'슬프다'
'금이 그리되는 정도의 파멸'이 '슬프다'시며
아직은 이해 부족할 우리네 민족을 위하여
'슬프다'가 삽입될 만한 번역의 오류 - 한점,한획이라도 변케하시면 안된다...시는게 성경이 아니던가? ^^;-를 허락하심으로 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이해하시고 같이 공감해주시는 거다.
'슬프다'로 시작하시는
오늘의 말씀이
지난 저녁 잠들기전 들여다본 구절 중
마지막 10절의 저 처절한 잔인함으로
또 '오늘 구절 힘들겠구나' 느끼며 당황하려던 흔들림을
여지없이 무너뜨리신다.
할렐루야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전에'는 귀하였더니
그 귀함이 '눈', '젖' , 산호', '청옥'보다 '귀하였다 한다.
'전에'
'전에는'..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에 들일 때..
속죄제, 번제....제사를 드리고 난 직후의 정결함 ,
부활의 그때.. 의 그정결함이 고귀한 것이 저렇더니
'슬프'게도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이제는'..
이렇다.. 신다. ㅠ.ㅠ;
주님의 시간, 주님의 시선의 '이제는'이니
'미래의 이제'는.. 이기도 하다 .
그때의 현재니
곧 닥칠 지금이기도 하다 .
어제이기도 하고
오늘이기도 하며
내일이기도 하다.
주님 앞에서 시간의 의미가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진실이고 사실이다'
'슬퍼하실 상황'에 빠질 것이 사실이며
그 슬퍼하실 실재가 '금'.. '청옥'.. 산호... 의 현재 누리는 모두가
파멸되고 버려지게 될 것이 사실이고
그 미래가 곧 현실이 될 것이 사실이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의 판단에
그 어마어마어마어마.. 하신 주님의 눈에서
의미없을 우리네 만 소중했던 것들의 파멸이
또
주님의 눈에도
같이 안타까워 하시는 '긍휼 안에서의 파멸'이
그대로 우리네 가슴에 내려오길 기대하심이
또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함 모두를 견디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안타까우신 긍휼의 결정체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내려오심이라는 게
사실이며
그러함 모두가 이제 '사실로 믿어짐'이
진정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며
'축복'의 기본임이 깨달아 지기 시작한다는 게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세상의 금'. 보화는.. ..
이전 만큼의 큰 유혹이 되지 못할 거 같은게
사실이라는 이야기다
또 그러함으로 인하여
점차로
이전에 그리도 내 인생을 붙들고 흔들어 대며
모든 '의미'가 거기에 있을 거 같아
놓치면 죽을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으로 잡아 끌던
세상의 그 어떤 것들,
이전의 인연과 악연들의
얽히고 설켜대며 이루어지는
그 수없이 많은 불면과 미움의 날들이
훨씬 약해져 간다는 사실이다 .
그냥..
행복하려 함,
그냥..
자연스러워짐..
그냥
이러다가 마주할 주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것 ..
그러함들을 느껴가며
또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것,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 인한
'초연함'...
그러함을 허락하신 '성령의 은혜',
성령의 은혜 가운데 머무는 자의 행복..
감사함.. 말이다
나...
'슬프다'를 통해
'감사함'을 떠올리고 있다
할렐루야.
무겁게 잠들고
힘들게 말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말씀이 '애가'라서 당연한 슬픔을 예상은 하지만
'자식을... 삶아.. 'ㅠ.ㅠ...라는 구절까지 감당하기에는
말씀 묵상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늘 그러하셨듯
제 예상과는 다른 '은혜'로 지금 제 가슴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이 불안정한 시대를
이 예상되어지는 '공의의 전 단계'의 시대를 답답하고 우울하게 바라보기보다
그를 통하여 '슬프게 바라봄'을 허락하신
주님의 눈,
하나님의 시선
예수님의 눈물을 느끼게 하십니다
주여.
다행이도
주님이 가르키시는 방향,
주님이 가르치시는 쪽으로 시선이 자꾸 돌아가고 있습니다
슬픔,
맞습니다.
슬플 것을 슬퍼하는 것,
슬퍼하는 자를 슬퍼해주는 것..
주님께서 저희를 보면서 그리도 가슴아파 하셨듯
어이없는 세상,
가치없어 가차없이 진행되어야 할 공의의 심판의 대상인듯만 한
우리네들을 향한
하나님의 '같이 슬퍼해주심' 처럼
저도
세상을 향하여 그리될 수 있을 거 같은
마음의 녹아짐이 느껴지니이다.
그게
진정 감사합니다
말씀이 있으시니
마음마져 변하고
말씀을 근거로 한 은혜의 흐름으로 인하여
더 이상 걸림과 거침이 적어진다는 사실,
그를 통하여 자연스러운 흐름이
제 일상에서 커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 말입니다.
그래서...
제 평생을 이어오던 '불안의 기조'...
어두움의 성향들이
별 ,그리 큰 의미로
이제는 제 가슴을 누르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있으시니요.
주께서 제 마음에 부담을 허락하시고
때가되어 '말씀'이 곧 제마음의 흐름이 될 것을 알게 되니요.. .입니다.
주여.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슬프다' .. .
정말 꼬옥 있어야할 단어가
영어성경 번역하는 과정에서 '더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단어'로
그 과정에 들어감으로 인하여
제 묵상의 시간에
저로 많은 깨달음을 허락하시니요.
그래서 가슴이 지금도 두근두근대며 뜨거워짐을 허락하시니요.
감사합니다.
주님.
이 '미래의 현실'을 두려워하기 보다
슬퍼하고 가슴아파함을
주님과 같이 공유하며
예레미야님과 같이 느끼며
출근하려 합니다
오늘 하루도 지켜주소서
예 ㅅ 밭에 할일이 산적해있습니다.
잘 흐르게 하소서.
그리고 허락되어진 다음주의 'ㄷㅂㅇ'여행 계획도
차질없이 이어지도록
주님께 의탁합니다.
거룩하고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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