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께서 이미 들으셨다[애3:55-66] 본문
부제)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다 듣고 알고 계신다.
.
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심히 깊은 구덩이'...
주님을 깊이 만나기 위한 반드시의 조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틀림이 없음을 알고는 있고
그러함을 건너오고 있지만
참으로 돌이키기 두려운 조건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광야 연단', ' 내 십자가'로 표현되는
'주님 만나는 조건'
주님을 깊이 만나기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으로서의
'심히 깊은 웅덩이'는 틀림없이
맞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당연하고 당연하지만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어찌 주님을 뵙겠는가?
문제는
그러한 조건들을 통하여서라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는 것,
주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위한 조건으로
저러한 고통을 감내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거란 거다
하나님을 떠나는 젊은이들, 현대인들이 많다한다.
누구나 그리 말씀하신다.
그게 시대 현상이라고..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하시고
어제 들은 '이찬 ㅅ' 목사님의 설교에서도 그러신다.
그래서 재미있는 청년 목회가 되길 강하게 마음 먹으셨다한다.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
죽음을 불사하는 것,
모든 행복과 기쁨의 원천을 포기하는 것...
삶의 이유를 아예 포기하는 것...
모든 감정과 예술과 의지와 삶의 방향을 스스로 단절하는 것..
그것 아닌가?ㅠ.ㅠ
그런데 그들이 왜 떠날까?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함'이 이유 아닌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길 방해하는
눈 앞의 욕망, 사단의 방해가 그거 아닌가?
'필수 불가결한 고난, 깊은 웅덩이의 조건'들..
'시간을 할애하여 진리이고 진실이신 주님을 부르짖음'에 대한
이유를 모름.. 이 그 이유가 아니던가?
나.
돌아가서
지금까지 오게한 그 고통들을
또다시 겪어낼 자신이 있는가?
없다.
죽을 것 만큼 힘들었다.
그런데
고통없이 '하나님의 얼굴'이 뵈오지 않는 날이 되풀이 된다면
난.. 주저없이
그것을 포기하고 다시 '이전의 고통'을 선택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던가?
이땅의 배부른 순간을 위하여
'저 천국,
하나님의 영이 끝없이
내 영혼을 내주합일 되어 흐르면서
이땅에서 조차 '은혜'라는
성령의 허락하신 잠시의 쉼마져
그리도 큰데
그 상상하기 힘든
하나님 아버지 앞의 삶의 행복,
영원의 기쁨을 놓치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비록 큰 고통이 전제가 된다해도
놓치는 어리석음은 원치 않는다.
고통은 힘들다
하지만
그게 가야할 길이고
그리함으로 하나님의 얼굴 구함이 절실하다면
난..
얼마든지
다시 선택할 의향이 있다.
그것..
말씀으로 말씀하신다.
이 지루하고 무료하고 의미없는 매일매일이
주님의 말씀으로
의미가 되고
은혜가 부어져 힘이 생긴다면
난..
오늘 더 갈구하고 부르짖으리라.
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그것.
예레미야님은
그 엄청난 시련과 고통의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리 고백을 한다 .
'깊이 주님을 영접하고 만난 자의 고백'..
감탄.. 말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다'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음을 확신하는
고백.
그것도 '이미' 들으셨다는
벌써 다 듣고 계셨지 않는가... 란
감탄과 깨달음의 기쁨으로 고백하는 삶이라면
그 하루가 고통으로 점철된다해도
더 이상 무엇이 문제가 될까?
그 '나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었으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말씀하심으로
그 내면의 흔들림에
고요함으로 방점을 찍으시는 사람의 내면,
그 내면의 어떠함이
그를 어떻게 행복하게 하고
그의 삶이 얼마나
재미와 감동과 행복과 기쁨과 평안과 감성의 폭팔...
'예술'까지 이어질 지 상상이 되는가?
내가 그랬다.
이 분.. 예레미야님의 그 크기와 실제의 감동과
과연 내가 비교나 가능할까 죄송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지만
저 고난 중의 저러한 외침,
그 외침이
'이미 내 말을 들으신'
'내 아버지 하나님'을 내가 깨닫고
더 깊은 탄식과 부르짖음을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려 놓자
그분께서 '내 안다.. 네 두려움을 알고 있다. . 이제는 쉬어도 된다" 하시니
그 알아주심보다
내가 '그러하신 실제하시는 주님..내 아버지 하나님'을
드디어 이렇게 일상에서 깨달아 알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계셨다는 사실에 다가오는
그 놀라운 감성의 변화들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해하는 나머지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날 부르시고 기다리고 계실
그 '영원의 나라, 저 천국'에 들어갈 것까지
확실히 믿어지는 삶이 될 것을 알게 되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 건가?
삶의 고난과 고통은 여전하고
옆에서는
앞에서는
내 속에서는
아직도 흔들리고 눈물흘릴 일은 다분하지만
그거..
무슨 의미가 되겠는가?
또 이러하게 견뎌오듯
그렇게 주님 손잡고 한발 한발 걸어가다 보면
영원의 나라에서 영생으로 누리게 될 날이 곧 오게 될 것을 . .
감사하다.
주님.
죄송합니다.
아침에 많은 시간을
쓸데 없는 일에 매달리면서
주님의 시간을 갉아먹고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깊이 만나라"
예.
그래야지요.
제 인생 모두를 통해서 가장 귀한 사실,
주님을 깊이 만나는 매일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러함을 통해
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내 외침을 다 들으셨음을
제가 확신하게 될 것을 예언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거면 족하지요.
그게 가장 귀한 '원리' 이며
그 이상 재미있고
그 이상 의미있으며
그 이상 흔들리지 않을 가치가 어디있겠습니까?
주님...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셔서 모든 인생의 의미로
오직 주님만 존재하심을
세상이 알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또, 더 주님을 증거하길 원합니다.
제안의 부딪치는
아직 남아 있는 작은 부딪낌들..
그러기 위하여서라도
주님의 손으로 깨주소서.
흐르지 않고 막힌 감정들의 찌거기들,
주님께서 더 거두어 가 주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분의 분노[애4:11-22] (0) | 2024.10.26 |
---|---|
슬프다를 통해 행복하다를 떠올리게 되는 축복에 대하여[애4:1-10] (0) | 2024.10.25 |
절망과 절망 사이, 소망 그리고 회개[애3:40-54] (0) | 2024.10.23 |
애가에서 축가로[애3:19-39] (0) | 2024.10.22 |
여호와의 분노 & 여호와께 대한 소망[애3:1-18] (0) | 2024.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