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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기뻐해도 된다[막6:14-29]

주하인 2024. 2. 24. 07:27

천안 ㅇㅅ교 천변의 아침

 

오랫만의 ,마지막 영하의 아침 ,루프탑 텐트안..

늙어가는 나이

아직은 영하의 칼바람이 불어오는

이 시간 이 시점에

이곳에서 이렇듯

나름의 마지막 세리모니를

고요하고 기쁘게 마주하는 일이 있을 줄

내 평생의 어두운 예감 덩어리 습관으로는

단 한번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

내 평생 그리도 누리고 싶었던

나름의 자유로운 현상을

허락되어진 시간안에서

자유롭게 누리고 있다

 

정말 황량하고 아직은 춥지만

내게는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우며

흐리고 눈발내리던 지난 밤의 그것에 대하여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그런거다

요한님의 마지막이 너무도 비참함

열심히 믿는 분들의 어이없던 결말들...

나를 지금도 붙들려고 갈퀴질 하는

모든 세상의 유한하고 어이없는 가치들.. 과는

전연 상관없는  우리..

좁은 길 좁은 문,

십자가의 길을 선택한 자들에게 허락되어진

기쁨과 감동

그리고 가슴 떨리는 소망이 있기에

우리의 예상되어지는 끝이 어떠하여도

담담하고 잠잠히 마주할 수 있음이다.

 

주께서 또 그러신다

굳어지지 말거라 주하인아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말거라 ㅂㅊ아

고난보다 더 큰 기쁨

고난의 유익함

고난뒤에 계신 예수님

네 안에 계신 그 분을 

이제는 잘 알고 확신하지 않던가

이제는 기뻐해도 된다.. .신다

 

할렐루야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갑자기 

'세례 요한'의 마지막이 참 비참했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모르는게 아닌데....

 

 예수님 이후

거의 모든 앞서가는 믿음의 선진들...

순교하고 성화의 길 가고.......

모두 '좁은 문' 좁은 길 , 십자가의 길.........이다. 

 

 갑작스레이 '고난'에 대하여 

눈이 갔다. 

 

 

 예수님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좁은 길'이며

좁은 문 통과의 길이고

그러함은 이 삶이 '고난의 길'이 필연임을 알면서도

왜 내 육신은 이리도 편한 것만 바라던가?

 

 이 잠시의 허락된 공간의 평안, 평강.. 

지금의 덜 흔들리도록 잡아놓은 (아.. 잡아 놓게 허락하신 .. 이 정확하지만...^^;)

이 삶의 패턴이 흔들릴까봐 

왜 나는 전전긍긍해야 하는가?

 

 왜 갑자기 눈에 들어온 

'세례요한'님의 저 결국의 비참한 최후가 

비록 소스라치게 까지는 아니어도 

'아차'..싶은 느낌으로 다가오는가?

 어쩌면 수없이 많은 고난의 시간을 거치고 거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어 

이제 잠깐 믿음과 인생광야와 영적전투와 삶이라 생각되는

이 현재의 균형에 나름 적응하고 만족하며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아차' 다. 

그러고 보니 '신앙의 길'은 고난의 길이 맞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잡아야 함이 아니던가?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이어지는 '헤롯'의 마음도 들여다 보게 하신다. 

 

 그렇다고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게나'

인생은 '행복' 뿐이던가?

기쁨 뿐이던가? 

 

 절대로 그러할 수 없음,

어차피 산다는 것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며 운명지어진 이 땅의 누구에게나

'고통'은 필수 임을 

헤롯을 통하여도 짐작할 수 있다. 

 보라.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자.......

그가 '갈등'하고 있다. 

 가장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허언'을 발설하던 그가

근심에 겨워한다. 

 

 비록....근심을 대치할 수없이 많은 '힘'을 가진 그라서

그 고통 회피의 칼을 

타인 목숨, 세례요한의 목으로 대치를 시켰지만...ㅠ.ㅠ.

 

 인생 모두에게 뿐아니라

믿는 우리에게는 더욱..

고난.

고통은 '필수'다.

그러기에 '현재의 어려움'.. 

잠시 잠시 틈 날 때마다 할퀴듯 다가오는

이 인생의 버거움들은 

꼭 몸부림치면서 벗어내버려야할  것 만은 아니란이야기다. 

 

 수없이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으며

지금도 '선교지' , 순교의 자리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열심을 보이는 분들이 있다. 

 

그 분들...

그들.. 

그냥, 단지 '명령'이고 숙명임을 알아서 그랬을까?

 오직 ...'깨달음'.. 구도.. 뭐 그런 비슷한 이름의 

'자기'와의 싸움 ,

홀로 이루어낸 ,자아강화의 결과로 그랬다는 말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아주 큰 '영적 오류 집단'처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을 이유로

모든 이 땅의 것들을 포기한 댓가로 얻어지는

도피성 '천국' 을 이유로.......?.........

(아..B교, I교, ... 등등등 .. 세상의 모든 ... 잡.........교들 말이다 ㅠ.ㅠ;)

  

아니지 않는가?

내 인생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전혀... 

조건이 아니시다. 

 

 '은혜' 

'기쁨' 

'위안' 

'공감'이 있으시다. 

버틸 수 있는 의지처를 허락하시고

같이 가자고 '손'을 붙들어 주시며 동행하신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필연이다 

그게 비록 다른 유형으로 나타나지만

세상의 모든 불신자나 이방 우상 종교인 들에게도 

똑~같다. 

 

 그런 '이 인생'들의 '필연'에 대하여

왜 나는

또 편하고 안전하려만 하고

지금의 잠시 허락된 '쉼'의 시간의 누림을 

또 절대로 잃으면 안될 '도달'로 붙들려 했던가...

 

 그거 였던 거 같다. 

굳어짐을 경계하심.

어차피 이 인생은 스쳐 지나가야할 '인생광야'일 뿐이고

이 삶은 영원의 삶을 위한 '시험의 과정'일 뿐이다. 

 지금의 가짐을 끝까지 이어질 누림으로 착각하고 

잠시의 위안을  영원히 이어질 소유로 착각하지 말라심이시다. 

 

그러시면서 

보여주시는 '세례 요한'의 끔찍한 죽음.. 

이 분의 모습을 통하여 '초기 로마 박해'... '우리나라 순교자'들..

선교지의 고난들...

그들의 인생을 통하여.. 

과연 고난은 필연임.. 

그리고 고난이 어쩌면 끝까지도 이어질 수 있음..

그 고난이 클 수록 유익이 됨을

실제로 확인하고 마음 속에 받아들이길 권하심 같다. 

 

 그렇다. 

이 땅은 잠시다. 

고난은 필연이고

부인하고 싶지만 고난은 사는 동안 끊이지 않을거다.

늘.. 마음을 내려 놓고 인정하길 바라심이시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에만 집중하면

'저들 이방종교의 고난을 마주하는 모습'에 비하여

무엇이 다른가?

 

오히려 저들이 더 낫지 않은가?

몸을 강제로 힘들게 하여 '극락'을 경험하거나

자신을 불태워 천국의 높은 자리 얻는다 하여

타인의 고난은 가벼히 대하는 저들... 일부와?.... 

 

 우리는 다르다. 

'하나님이 동행하신다' 

'예수님이 구주시다.' 

고난이 커질수록 '기쁨'이 커진다...다.

 

 그렇다. 

내 인생을 통하여도

내 매일을 통해서도

난 수없이 많이 깨달아 알았지만

내 어리석은 특질은 자꾸만 잊어 버린다 .

그리고 '고난'에 대한 과민한 두려움으로 매몰되려 한다. 

내 'ㄷㅇ공ㅍ증' 흔적은 

또 움츠려 들게 하는 

그래서 사뭇 까매지며 '고난'에 대하여 생각지도 않고 매몰되려는 

그러함으로 나를 우울로 끌고 가려한다. 

 

바보같은..ㅎ

 

 세례요한은 목잘려 ..그러셨다.

로마초기 순교자들은 '사자'에 ..칼에.. 그랬다. 

최근의 선교지 순교 P님은 총에 맞아...

일상에서도 '믿음'을 이유로 고난을 겪는 수없이 많은 분들이 있다. 

젊음과 일생을 바쳐 '사지' 비슷한 고난의 지역으로 들어가시는 

수없이 많은 선교사님들이 있다. 

 ....

그들이 '고난'이 두렵지 않아서 인가?

젊음의 치기인가?

명령이 있으면 따르는 로봇인가?

... 

그들의 결과는 '처절한 종말'이었지만

수천년을 두고 왜 ... 

고난을 감수하면서 이렇게들 사는가?

 

난...

고난을 또 어떻게 받아야 할지 

끝없는 고난의 끝에 대하여

그리 초조히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때 아니던가?

 

 .....

 

주님.

오늘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좁은 길.. 

어쩌면 세상이 보면 도저히 말도 안되는... 

그리고 그러한 가치는

다 아는 믿음의 길을 살면서도 

일상에 들어가면 '여기가.. .지금이 좋사오니'... 하면서

현재의 안정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길 원하는

이 어리석음을 마주하게 하시는 것 말입니다. 

 

 수없이 많은 분들의 처절하신 종말... 

내 삶을 돌아보아도 꼭 인생이 즐겁지만은 않은... 

그러함을 목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의 종말과 

내 지나온 시간을 반추한 , 마지막을 생각해도

공통점이 느껴지게 합니다.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동행하심...

그리고 그 종국에 허락되어질 '영원의 쉼'.........

이 땅의 고난 중의 우리의 기본 감성이 '기쁨'.. 고요한 그러함'.......임을 

그래서 '진리'를 향해

말씀하신대로 

기뻐하며 나갈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이제는 확신하게 하십니다. 

 

 주여.

제 앞에 놓여진 결국이 

반드시 '가장 앞서나가시는 믿음의 리더'들과 

꼭 같은 모습은 당연히도 아니겠지만

'고난을 대하는 마음'에 

조금은 더 자유로와졌습니다. 

 

그래.. 고난아 와라. 

주께서 허락하시면 기쁘게 마주하리라...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주여.

주님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주께서 기뻐하시며 손잡아 주시는 한...

그 어떠한 결과도 기뻐 받을 수 있을 듯 합니다 

 

제 나머지의 시간이 

그렇게 당혹스럽지 않게 느껴집니다. 

주여.

 

제 주변.. 

자식들.. 손녀들.. 식구.. 모두 

같은 기쁨가운데 

주님 안에서 

이제 곧 마주할 주님의 시간을 마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 가운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소서.

제 부족하고 늘 어두운 생각에 깨달음 주시고

지금껏 그리 인도하셨던 거 처럼

제 그러한 부정적 예상을 과감히 깨어 주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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