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요단 강을 따라 걸어온 인생[수14:1-15] 본문
부제) 나는 내 하나님께 충성하며 또 살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축복의 삶을 살아간다
여호수아의 이쪽, 모세의 저쪽 & 갈렙의 헤브론
.하나님이 없는 그들은 마음대로 넘어다닐 만한게 요단강이다
.넘어가는게 목적이라면 요단강은 너무도 작은 강이다
인생이 그렇다
너무도 커보이지만 허락하신 바 때문에 그렇다
난 다만 그냥 그 곁을 지나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갈 뿐이다
그게 바로 얼마전까지 였다
.불신의 그들에겐 모든게 마음대로 일지 모르지만
주님으로 이끌리지 않는 모든 삶은 허상이다
그냥 개천 보다 조금 큰 강일 뿐이다
그냥.......
마음대로 살아보거라
곧 끝이 보일 거다
의미없는 육신의 유희 의 끝, 절망 ...
.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요단강'이 그리 넓지 않았음이 신경도 쓰이지 않았음이다
이 내 길디긴 인생의 여정이 다만 요단강가 따라 매일 걷는 영적 광야일 뿐이었다
이제 요단강 이편의 매일은 거두는 시간,준비의 시간일 뿐이었다
이제야 '요단강'의 이편에 섰고 여기까지 에벤에셀 하신 하나님으로 요단 저편에서 넘어왔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1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
3 이는 두 지파와 반 지파의 기업은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주었음이요 레위 자손에게는 그들 가운데에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오늘은 말씀에서
'요단강 저쪽'
요단강을 넘어 '요단강 이쪽' , 현재 서 있는 '가나안'땅 기준
즉 '요단강 서쪽'을 중심으로 넘기 전 '저쪽'이니
요단강 동쪽과
요단강 서쪽,가나안 지역
그리고 '헤브론'이란 세 구역이 눈에 들어온다.
그 각각의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인
요단 동쪽-과거, 가나안 이전-의 '모세'님과
요단 서쪽-현재, 가나안.. 현재-의 '여호수아님'
그리고 '현재에도 아직 진행중'인 뜨거운 믿음의 '갈렙'님이
바야흐로 전면에 다시한번 등장한다.
그리고 '축복'과 '충성'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모세님은 이전, 과거의 대표적 인물이라서
버려도 되는 인물이란 개념도 아니고
이전을 사모하여 '회한'과 '그리움'에만 차라는 말씀도 아닌듯 하다.
현재의 '여호수아'가 '모세'의 현신이라든가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현재의 땅이 되어야 할 때
부족한 그 무엇을 그 때의 '모세'님 믿음과 비교하여
얻을 거 얻고 보충하라시는 개념도 아니신 듯하다.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주면서
갭을 채우는 인물이 바야흐로
'갈렙'인 듯하다.
뜨거운 믿음.
오직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믿음이 어떠할 것임을
바야흐로 살아서 모본으로 보여주는 인물.. 이다.
모세.
여호수아
갈렙
모두 '하나님 안에서 최선과 충성을 다한 인물'들이다.
그들을 통하여
'요단 강 이전'과 '이후'와 '미래'의 어떠함을
다시한번 다짐하라시는 거 같이 느껴진다.
갑자기 '요단 강'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다.
정말 수십년간을 고생하며 넘어가기에
절대적으로 장해물이었기에
그 강을 끼고 위로 위로 돌아 여리고성쪽으로 넘어야만 할 만큼
그리 컸던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깊었던가... 궁금했다.
그런데 20-30미터 정도의 폭이 대부분인 작은 강이었다.
그러한 강을 '인간적' 방법으로 했더라면
몇달, 며칠 걸리지 않고도 '다리'를 짓거나 배를 만들면
아주 쉬이 넘어갈 것을
하나님께서
그 요단강을 넘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시며
저렇게 인도하여 오신 거다.
그리고 '인도 받는 내내'
단 한번도 요단은 임의적으로 넘어도 될 만한 곳으로
상상하지도 못하게 하셨었고
그 안에서 '결국'
요단의 이쪽과 '저쪽'을 나누고
그 요단을 넘지 못하고 돌아가신 '모세'와
'요단 넘어 ' 다시금 '정리전쟁'을 이어받아 가고 있는 '여호수아'님..
그 모든 과정을 다 함께 하며
마침내 잊혀질 즈음 다시금 전면에 등장하여
한번도 욕심내지 않던 땅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마침내 정착할 땅, 헤브론을 '축복으로 얻어내는'
갈렙님이 드러난다.
무엇인가?
무엇을 보이심이시던가?
역시
묵상하기 쉽지 않은 구절들이라
한참을 붙들고 있다가
늘 그러시듯 그냥 말씀을 붙들고 정리하여 가다보니
깨닫게 하시는 바가 있다.
'인생'이다.
그 인생을 '내가 하려고 노력' 해보았자
그 모든 '내 생각과 내 뜻'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 이루어질 것임이다.
그토록.. 젊은 시절 몸부림치고 악을 써보았자
결국은 시간이 지나 한참이 지나야
그때 그처럼 처절히 몸부림치며 전부인것 처럼 눌러오던
그 요단강이 겨우 저 정도이었음... ^^;을 알게 될 수도 있음이란 이야기다.
굳이 몸부림치지 말자.
오직 인생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 된 삶을 살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가다.
그리고 '때에 따라'
주님께서 허락하신 마음이 흐르는대로
여호수아에게 여쭙는 갈렙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처럼 -같이 고생한 전우지만 그는 허락하는 자, 자신은 허락받는 자로 서게 되었지만 그 마져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게 옳았을 뿐이었던 거다. 갈렙님의 입장에서는 ^^*- 그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곳으로 '헤브론'의 축복을 받는 것,
그게 옳다 .
그리고 '요단 강 이쪽' 과 '요단강 저쪽'의 결과는
추후 많은 다른 결과 -편하고 넓은 쪽, 요단강 동편을 택한 르우벤들은 이방의 침입을 훨씬 더 많이 받고 가장 먼저 망한 곳이 되지 않았던가?- 가 왔고
신앙적으로 핍박 받아 마땅할 결정이었지만
그마져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 이루어진 거다.
굳이
너무
제약할 이유가 없다 .
그것이 '바야흐로' 하나님 안에서 여쭙는 것이었다면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너무 좌절하거나 기죽거나 할 일은 없다.
다만, 회개하고 조심하고
더 '충성'하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이 생각할 뿐..
모두가 '모세'나 '여호수아'..'갈렙'이 될 수 없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
인생은
철저히도 하나님이 인도하신 결과다.
그 결과로 지금 내가 있다.
가만히 바라보면
'여호수아'..님 같은 믿음이 되지 못한 것도
모세나 '갈렙'님 같은 믿음이 되지 못한 것도
하나님의 선택이시며
그 좁은 강을
그렇게 넘지 못할 절대의 제약으로 '의식'속에 떠올르지 못함도
그것을 생각지도 않고 매일 넘나들 '불신 백성'들과 비교할 생각도 못함도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심이다.
오늘 ..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음도
모두
당연하지만 주님이 허락하신 거다.
앞으로도 그렇다.
오늘도 그렇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루하루
주님 말씀따라 살 노력을 얼마나 했던가 ..'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나머지
머리 내려 놓고 살아도 된다.
그냥.. '모세, 여호수아, 갈렙'님 만 그리면 살면 된다.
저들의 '충성'과
저들의 '복'과
그 후에도 속절없이 지나는 '시간' 안에서
결국은 기억되고
영생을 누릴 것은
'저런 믿음의 소유자'들의 '영생의 안식' 뿐,
천국의 영원한 누림 뿐임을 알아
이땅에서 '가나안' 이쪽의 삶을
또 하루하루 최선다해 살 뿐이다.
할렐루야
주님.
알겠습니다.
참 어렵고 힘들어 많이 시간을 소모했지만
주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네 인생 모두,
심지어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지금도 배를 타고 요단강을 마음대로 넘어가는 저들 불신자들 조차
하나님의 그리신 그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냥...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지만
어느새 그 모든 것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심을
'가나안 정복의 싸움'..
'정리하는 인생의 어떠함'을 마주하며
'영적 길갈의 안식' 을 누리면서
조금씩 깨달아지고 있습니다.
주여.
오늘 제게 필요한 것은
'충성'입니다.
충성할 수 있는 것.. .
갈렙님처럼 닮아 갈 수 있는 것..
모두 주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것임을 아오니
주여 , 제게 그러함 마져 허락하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내 주 여.
더 기도할 수 있게 하소서
더 감사하고 기도할 수 있게 하소서.
더 깨어 감사하고 살아가는 하루 되게 하소서.
충성으로 복을 누리는 갈렙님의 믿음을
오늘도 또,
이 가나안 이편의 하루 안에서 누리게 하소서.
나머지 다
주님이 알아서 하소서.
믿고 흐르는 자되게 하소서.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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