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믿음의 옷매무새 다시 가다듬다[삼상14:36-52] 본문
그냥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 앞에 아뢰고
주님께 맡기고
매사 주님을 의식하고 삶으로
그 어떤 인생의 무게와
아무런 삶의 버거움도
모두 다
주 앞에 내려놓고
주신 주님의 은혜로
매일을 그저
호쾌히 살아갈 수 있다면
진정으로 좋겠다
새로운 한주
또 주님 앞에
말씀이신 로고스 하나님 앞에
올바로
비틀리려던 마음
모두 다
내려 놓는다
36.사울이 이르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이르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이르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철없는 십대 철부지 뛰쳐나가듯 하려는 '사울'을 제지시킨 제사장의 말을 듣고
37.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
겨우 자제한 '사울'이
'하나님 앞에 묻'는 행위는 했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아니'하셨다.
39.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뛰쳐나가는 동네 말썽 개구장이처럼
자신의 할 말을 해댄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 '.
41.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그런 그의 무모함은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까지도
공정과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미명하에
거침없이 해치움에도
'하나님의 응답'내지
'주님의 임재 속 안에 고요히 기다림'
'주님의 진정히 원하시는 뜻'..............을
우선,
먼저
듣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혼없이 외치지만
그냥 자신의 뜻대로 행함이
무모하고 거칠게 느껴지며 한편 어이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위의 위용과 공정함이라는 이름하에
현실적으로 거부하기 힘들게 하고 있다. ㅠ,ㅠ;
44.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보라.
하나님이 '자식까지 마구 징죄케 하는 잔인한 ㅠ.ㅠ; 분'으로
느껴지게 까지 하지 않는가? ( 너무 달콤해서 인간적인것이 우선여서 모든게 옳은 왜곡도 옳지 않지만... )
아.. 사울 !
47.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그러나 그 위세와 거침없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감히 거부하긴 힘든
주변에서 흔히 보는
아.. 어쩌면 내 안에도 분명코 잔존하는 일면을 마주하고 있다.
이 월요일..
하지만, 그러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보는 당분간 (그렇다 , 당분간이다.. 그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
가는 곳마다 승리한다.
이것도 그렇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어떤 것이든
하나님은 일정 부분 기뻐하시기도 한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시기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매개체'로 쓰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단'들이 예수의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물리치고 혼낼 것을 여쭈으니 때가 될때까지 그냥 두라신 것 ........처럼.
또 어린아이들의 믿음에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며 돌이키고 성숙할 기회를 주시는 것 처럼..
결국, 우리 모두 알지만
사울은
사울의 그러한 왜곡조차
당분간
결국 (그래 결국이다. ..미리 예정하셨지만 어쩌면 사울에게도 , 가룟유다에게도 어쩌면 돌이킬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고 그러함은 어쩌면 허락되어진 시간 동안의 다른 선택을 통하여 지금과 다른 운명, 다윗 대신 사울이 주인공으로 , 12제자에 가룟 이름이 들어가는 세상에 펼쳐졌을 수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이었다.ㅠ.ㅠ;)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허락하셨다.
나.
과연 그럼 나에게 무슨 말씀하시려 주신 것인가?
나는
사울과 같은 유치하고 느낌적인 자아충만한 믿음은 아니던가?
혹여, 나 자신보다 타인을 희생제물로 삼아
옳은 신앙의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던가?
어쩌면 '긍휼없는 신앙'은 불신자들의 죄보다 더 무서운 '죄'임을 모르진 않던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하나님을 욕먹이는 죄는
나는 과연 범하지 않던가?
내 의도와 다른 손가락질이 올때
난.. 정말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없으며 타인과 이웃을 향한 차가운 비판이 먼저는 아닌가?
내 자아의 교묘한 만족은 또 아닌지.......................?
혹여 지금의 내 이룸과 부요는
날 불쌍히 여기시고
그나마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한 '덕'임을
난 과연 인식하고 사는가?
매사에 감사할 것 뿐임을...
내 그러한 죄와 어이없음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하시어 오직 인내하시고 참아주시는 덕분에
내가 지금껏 살아 있음을
난.. 다시금 확신 하던가?
이 아침 ,
사울을 통하여
내게 주시려는 말씀이신 듯하다.
바로 잡고
다시 신앙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일주일, 하루를 열~심히 주 앞에 바로 서라는 말씀 말이다.
감사하다.
주님.
기도의 제목으로
제게 '긍휼'의 은사를 주소서.
제게 함부로 비판하고 차갑게 단정하는
어이없는 습관성 거룩과 거짓정의 의식을 바꾸어 주소서... 기도하던
기도 제목들이
오늘 사울이 보인 모습 통해 투영되고
제게 그러하지 않도록
신앙의 옷매무새를 바로 가다듬길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주여
제게는 너무 황량하고 어두운 예측들,
불안한 예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오래된 시선 들이 있습니다.
그게.. .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아주 많은 부분 깨져오고 변화되어 왔으나
아직도 제게 남은 많은 성품의 기조들로
끈적이게도 남아 있습니다.
주여.
자칫 , 말씀을 게을리하고
기도를 태만시하며
은혜를 도외시하다가
어느새 제 안에 저런 사울 같은 모습의
거친 신앙,
유치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뻣뻣이 서서 , 자신과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되는
그런 위험에서 '아차' 아차하며 돌이키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주여...
오늘 특별히
많은 '덜 닦여지고' 남아있는 오니들을 바라보게 하셨사오니
저러한 모습으로 살지 않게 하소서.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오직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기뻐하시는 희락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합니다..
그 하나님에 합당한 믿는 자로서
바른 신앙인으로 서는 한 주가 되길 원합니다.
옷매무새 바로잡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기쁘신 주님,
옳으신 주님
완전하신 사랑의 주님 앞에
다시 올곳게 설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간절히 비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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