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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홀로 들에 앉았어도(삼상20:24-4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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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홀로 들에 앉았어도(삼상20:24-42)

주하인 2008. 6. 14. 13:55

 

 위태한 담장 위에

가녀린 풀

둘...

그러나

풍성한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니

귀한 풍경을 이룬다.

 

 다윗과 요나단의

기약없는 위태한 우정이

주님이 돌보심으로

아름다이 열매를 맺을 것이다.

 

 모든 인생에

가녀림만 보면

한없이 가여운 풀이지만

어우러짐을 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전제하에 보면

놀라운 풍성함을

예견할 수 있다.

 

  

24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초하루가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다윗의 신세가 외롭다.

어찌

기름부음을 받고

잘못도 없으면서도

'들에 숨는 처지'가 되어야만 했는가?

 

그래.

외롭다.

외롭기는 하되

외로운 사람들은 외로울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았다.

눈앞의 현실은

똑같지만

다윗은 다르다.

그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왕이 된다.

 

 우리도

외로울 수있다.

힘들 수 있다.

들에 숨을 수 밖에 없는

부끄러운 처지일 수 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슬퍼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음을...

우리는 

그의 놀라운 끝을 안다.  

 

 우리도

주님을 믿고

멀리 끝을 보면

지금

들에 숨음은

슬픔이 아님을 알수 있다.

그것은

축복을 위한

천국을 위한

연단에 지나지 않음을..

 

들에 숨을 수 밖에 없지만

내 구원을 기뻐하리라.

내 외로움을 즐기리라.

 

 

 

25  다윗의 자리는 비었더라

 그래.

이 귀한 다윗의

자리가 비어 있다.

 

 옆을 돌아보자.

정말 귀중한 자리가

비어 있으면

그를 안타까워하고

돌아보아 회개하고

주님께 채워달라고 기도하자.

 

귀중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

 

내 아들의 생일이다.

그 아이 축복하리라.

 그 아이의 끝을 보며

기도하리라.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사울이

화를 낸다.

자기 귀한 자식에게도

불같은 화를 내고

못할 말을 입에 올린다.

 

 하지만

그 말의 논리가 이해가 간다.

아니,

세상적으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식의 장래와

나라의 미래가

다윗으로 인하여 휘둘릴 수 있는데

어찌 안 움직일

왕이 있고

어찌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있단가?

 

이게 합리적이고

이게 세상의 원리다.

하나도 틀림이 없다.

이것이 없으면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까?

어찌 이러한 논리에 적응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기 위해

자신의 왕궁을 지키기 위해서는

열심히 돈 벌고

열심히 경쟁하고

열심히 주식하고

열심히 경매하고

열심히 투쟁해야지.............

 

 

 

 

32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34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하지만

요나단이 다르다.

 

 그는

하등의 망설임이 없다.

다윗을 죽이기만 하면

자신의 것으로

확실히 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오히려

아버지의 그 풍부한 세상경험에서 나오는

식견을 무시하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한다.

어리석고 유치하게도

치졸하고 유치하게도

어린아이 같은 영웅적 심리로

'우정'이나 찾고

오히려 흥분하고 있다.

  '이 세상 모르는 어린아이 같으니라고.. '

 

 지금까지의 논리 전개가

너무도 당연히

현대의

주님 모르는,

아니

주님을 알아도

이원론적 믿음을 가진

소수 기복적 기독교인에게서

발하여질

아니,

가끔은 내 속에서도

저리 튀어나오는 논리에

가슴이 꽉~~막혀 와서

진실한 신앙의 여부에 대하여

흔들리고는 하게 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요나단은

한점의 흔들림이 없다.

그는,

우정 자체를 귀히 여겼고

그 우정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

그래서 ,

다윗을 도우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직감한 자이다.

절대로 흔들림이 없다.

그러한

그의 확신은

자신의 왕궁을 부탁하는

이전과

이후에 곧 나올

다윗과의 약조에서

깊이 인지할 수 있다.

 

 그,

요나단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졌고

우정을 귀히 여기는 귀한 심성을 가졌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원하심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자였다.

그러기에

그의 행보는 조심스러웠고

아버지 사울의 그것과는 달리

절대로 하나님을 앞서지 않고

백성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자 였던 것이다.

 

 


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보라.

요나단은

이전에도 고백하였지만

모든

행동 선택의 기준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 분이 좋아하시는 자인

다윗을

생명보다 좋아했고

그 분이

다윗을 원하심을 알기에

그에게

자신의 자손들을 부탁하고 있다.

세상의 논리와는

조금은 차이가 있다.

 

어찌 이런 게 가능할 까?

비록

나름의

요나단과 같은

영성 유형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도

티끌 만큼의 욕망이라도 있거나

의혹이 있었다면

아비 사울이 흥분하며 발하는

세속의 소리에

흔들려야 마땅치 않은가?

 

 요나단은

정말 멋진 믿음과 심성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사는 분이다.

그 분

요나단이 그립다.

그 분

요나단의 그 심성이 부럽다.

 

 

 

 

적용

 

1. 외로움은 잠시다.

 힘듦은 잠시다.

 다윗도 '들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승리했다.

 

2. 주님을 기뻐한다.

 

3. 내 곁에 있는 자들을 사랑한다.

 특별히 가족에게 넓은 이해를 베푼다.

 

4. 회개한다.

 요나단과 달랐던 심사들을 반성한다.

 

5.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세상의 논리와는  조금 떨어져서 바보처럼 살겠다.

 욕심을 자제하겠다.

 손해를 기뻐하겠다.

 엉터리 같은 주님에 반하는 일들에 대하여 과감한 절제를 하겠다.

 

6. 성경 여섯 장 읽겠다.

 

7. 아들을 축복한다.

 

 

 

 

기도

주님

가끔은 뼈골이 시릴 정도로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 마음은 주님 만이 아시리라 압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특별히 그 외로움의 담금질이 더더욱 되는

오늘 묵상을 봅니다.

그래도 그는 요나단이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귀한 우정을 보내주신 주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주여.

저에게도

다윗과 같은

요나단과같은 우정의 마음을 주세요.

제가 그러던지

그가 그러던지

주님 안에서 온전한 사랑을 주게 하소서.

받게 하소서.

주님

세속의 유혹에

주님이 원리가 아니면 단호히 자르게 하소서.

특별히

바빠지면서

가해지는 유혹에

과감히 흔들리지 않도록 도우소서.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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