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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렘52:1-11]

주하인 2018. 12. 12. 08:34

 


2.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그, 시드기야는 악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여호와김, 인간을 본받아

그리되었다.



3.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진노하심이 그들을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그는

'바벨론 왕'도 배반했다.

 


10.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또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을 죽이며
 그로 인하여 

자신의 아들들을 죽이는

아버지로서의 '배반' 뿐 아니라  


 

11.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
눈이 뽑히게 되는

스스로도

자신의 몸에 대하여 '배반'을 행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


 그에 대하여

3절에서 보시다 시피 '악'하다 하셨다 .


그런데..

악..

주님이 보시는 악이

배반.. 자체인가?

 아니다.

당연히도 '하나님을 모른체함'이다.

 

만일..

배반 자체...

즉, 자신과 주변과 나라와 국제 정세......등 인간관계까지 포함시키는

배반에 대하여

하나님이 악하시다시면

하나님도 배반 하고 인간도 배반하고

모두 동일하게 악하다 시면 (물론 좋은 것은 아니다 ...ㅠ.ㅠ;;)

하나님을 인간의 레벨로 낮추는

불신의 개념이 아닐까?

 진정 악함.

아니다.

악한 모든 행위 .. 인간들에 대한 것 조차.. 스스로에 대한 악한 결과 조차

모두

하나님을 배반한

그 근본적인 이유다 .

보라.

원죄의 인간이 어디에 선한게 있을까?

가장 존경했던 젊은 시절의 영적리더들도

속절없이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을 목격한 바다.

가장 그럴듯한 자가 가장 악한 모습의 양면을 지닌 것은

수도 없이 많이 보아 왔다 .

그게 인간의 속성이다.

어디.. 감히

하나님이 없이

인간이 선할 수 가 있단 말이던가?


 시드기야는

철저히 대놓고 하나님을 외면했다 .

그의 행동은 인간관계에서도 그리 나타났다.

그의 결국은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비참한...


 내게

오늘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어

'선한 삶을 이루어 내라' 심 아니실까?

선함.

그 선한 결과에

꼭 착한 마음 만 국한 되는가?

아니다.

모든 것이다 .

영혼, 마음, 육체적 (물질계.. 현실.. )   모두 말이다.


하나님을 죽도록 붙잡고

하나님 만이

나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이유로 내가 허락되어진 하루이며

하나님 안에만 있으면

그 무엇 '악할 수 있을까?"



주여.

전...

악한 잠시의 배부름보다

선한  영원의 기쁨의 가벼움을 원합니다 .

 

 주여.

나 자신의 순간적 만족보다

하나님과 주변을 위한 기쁜 인내를 원합니다.


주여.

방종보다

말씀에 구속되는 자 되길 바랍니다.

내 주여.

그리되게 하소서.


그래서

오직 주 안에서 사는 자

모든 관심과 생각과 판단이

주 로만 이루어진

제 하루하루가 이어지다가

우리 주 부르실 때

홀연히 벗어 놓고 떠날 수 있는 육신의

온전한 영혼이 되길 기도합니다.

내 주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2010.06.01 묵상 )


 

꽃이

석양 빛으로 

더욱 아름다와 보인다


꽃의 꽃다움은

늦은 햇빛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석양의 시간이지만 

 주님의 구원 받은 자임을 

기쁘게 깨달은 순간


빛을 반사하는

꽃이 되고야 말았다

 

 

  
2.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무엇이 '진짜 악'이던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이 진짜 악이다.

여호와 보시기에 무엇이 악하던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3.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매
 거기에 '바벨론 왕' 마져 배반한다.

시드기야는 '하나님'도 '사람'도 믿지 않았다.

그에게 유일한 관심은 '자신'이었다.

그게 선대왕 '여호아김'의 유전이니

선대의 태도가 그 자손 대대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 지

아버지된 자로서 반성할 일이다.
  

  
5.  성이 시드기야 왕 십 일년까지 에워싸였더니
  그는 눈뜨고는 이년 넘게 이 고생을 했고 
 
6.  그 사월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식물이 진하였더라 
 백성들을 고생시켰으며
  
   
11.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그 죽는 날까지 옥에 두었더라 
   눈 빠지기 직전에는

그 자식들이 죽는 것도 보았다.

아버지의 잘못을 보고도 

반성하고 안그러리라는 결심과 새로운 선택은 없이

그대로 물려 받은 게으른 선택의 결과로

아버지 시드기야는 자식들이 죽는 것을 보고나서 눈이 빠졌다.

 

 그의 고난이 너무나 무섭다.

그의 눈 빠지기 전도, 눈빠진 후의 그 암흑에서 겪을 정신적 고통도

너무도 두렵다.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경'이요

'사람에 대한 배반'이 그 이유다.

오직 그에게 관심있는 것은 '그 ' 뿐이다.

어쩌면 그 자식들에게 잘했었을 지 모른다 .

어쩌면 그 아내에게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 자신'의 아내고 ' 그 자신'의 자식들이었다.

그는 '자신' 이 중심이었다 .

 

 자신이 중심이 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과는 꼭 일치하지 않는다.

'자신을 주님이 만들어 주신 귀한 존재'로서 인식하고 사랑하는 것..

자신이 사랑받는 자임을 깨닫는 것.

그것은 자신을 넘어서 타인과 하나님에 대한 겸손한 사랑을 가져올 수 있다.

오히려, 자신을 너무 비하하거나

자신에 대하여 과도하게 교만하거나 하는 현상이다.

 자신을 비하함은

'자신이 무가치 하다'고 느끼는 것이고

그러함은 공허함을 유발하고 영혼이 비어 있는 듯하여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도 모자르는 것이다.

그러기에 늘 허겁거리고 불안해하여

타인에 대하여 줄 관심이나 배려나 사랑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어떤 것에도 만족을 못느낀다.

늘 허겁거리는 아귀와 같다.

모든 관심과 칭찬 만을 원하고 그러지 못하는 경우

과도한 흥분을 발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그들 만이 관심의 대상이다.

그 외의 어떤 것도 매력이 되는 게 없다.

믿음, 이타주의 , 사랑, 긍휼......은 먼 나라의 꿈에나 나오는 동화 같은 이야기 일 뿐이다.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 만이 있는 곳은

바로 '지옥'이다.

 

 이런 '자신' 밖에 모른 자,

자기 비하 혹은 과도한 자기 교만 -( 둘은 서로 다르면서 같은 종류이다.  양극은 서로 통한다 ) -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 가?

 '교육'이나

' 환경' 탓이기도 하다.

물론 '유전' 적 성향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쌍둥이도 성질이 다르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쌍둥이도 다르다.

손금이 같은 자 없듯이 모든게 같은 게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찌된 이야기인가?

 거기에는 '자신'의 '선택'이라는 개념이 달렸다는 이야기다.

 

 시드기야.

그는 선대 여호야김의 모습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그는 여호와김의 자신 밖에 모르는 그 성품과

그로 인한 고난을 보고 들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쉬운 선택을 했다.

그 역시 '자신'에만 관심을 가지기로..

결과적으로 그는 타인에게 지대한 해를 끼치면서

궁극적으로 극도의 공포심에서 이년간 갇힌 세월을 보내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인질로 잡혀서

자식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빛을 잃게 된 것이다.

그 후의 그 어두움은 빛 만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을 두려움과 후회 속에서 살게 되는

영혼의 깊은 어두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이야 말로 '지옥' 같은 삶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사는 것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 관계는 '나와 하나님' , '나와 이웃' , '나와 나의 관계'를 포함한다.

 나 스스로와의 관계를 잘못 설정함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엉망으로 이지러지게 한다.

그것은 '자신 '혼자만의 괴로움이 아니라

모든 관계 속에 있는 자들의 아픔을 초래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루지 못함은

결국, 전 영혼이 고통을 받는

'지옥'의 아픔을 맛보게 되고 야 만다.

오늘 시드기야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올바른 배움을 배우지 못했고

그것은 자신과의 관계 설정에서 왜곡을 초래 했으며

그 왜곡된 관계의 유지를 끝가지 유지하는 자신의 선택은

결국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파멸까지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나.

나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예수님의 강권적 선택 하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많이 돈독해지고 있다 ^^*

'이웃과 나'와의 관계도 세상은 안그런지 몰라도

나 스스로는 많이 ....노력하고 있다 . ^^;;

'나와 나의 관계' .........ㅜ.ㅜ;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깊은 화해는 이루지 못한 것 같다.

' 나는 안되어......' 라는 자의식이 꽤 있다.

그것은 삶을 힘이 없게 한다 .

 물론, 많은 회복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된다.

불신의 40년 영혼이 어찌 10년 만에 성인 같은 신앙인으로

자아의 탈바꿈이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쉬지 않고 말씀 가운데 내 영혼이 변화가 되어왔다.

주님의 은혜로.......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시드기야나 그의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여호야 김의 아들 시드기야 같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매사 매사 조심하고 돌아보아

내 속에 아직도 웅그리고 있는

내 굳은 자아의 껍질을 깨야 한다.

그래서 '내 자식'들에게 의로운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엊저녁,

인도네시아에서 대단위 선교사역을 하시고 계시는

J 선교사님이 노환으로 국내에 들어와 계시면서

젊은 시절 아버지 역할의 부재로 겪고 있는

자식들과의 냉랭한 관계에 대하여

아내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마음이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디까지가 되어야 하는 가?

'하나님 - 나 - 타인'

생각할 바가 많은 묵상이다.

 

 

 

주님.

오늘 많이 늦었습니다.

한가한 시간이 늘어났지만

제 게으름은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함에 더 게을러지고 있는 듯 합니다.

주님.

용서하소서.

깨어있지 못하는 이 어리석은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은혜 가운데 있지 못하고

또 제 속으로 파고 들어가

'불안'을 키우려는

이 나태한 게으름을

시드기야의 모습을 통해 투영하고 계시는 듯 싶습니다.

철저히 말씀을 통해 나를 들여다 보길 원합니다.

저 스스로의 관계를 잘 이루어

주님께서 목숨바쳐 구원하신 이 '주모'의 영혼을 스스로 귀히 여기게 하시고

 좀더 스스로에 대하여 관대할 수 있길 소원합니다.

아직도 오래된 과거의 질타와 손가락질과 잘못된 의미있는 타인의 왜곡된 소리를

내 모습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직 나는 주의 사랑받는 자로

새롭게 태어난 자임을 명심하기원합니다.

날마다 말씀가운데 부활하여 새로운 영혼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믿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내 영혼에서 사랑이 넘쳐나오고

뿌듯한 자로서 주님께 허락 받은 그 사랑을 이웃에 나눌수 있는 자 되길 원합니다.

긍휼이 넘치게 하시고

사랑이 넘치게 하시옵소서.

자식들에게 훌륭한 아버지가 되게 하소서.

그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아버지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건강히 살다보니 성공한 삶을 살던

모범을 보이길 원합니다.

 후회 하지 않는 올바른 신앙인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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