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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행 9:23-31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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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행 9:23-31 )

주하인 2007. 9. 27. 12:40

제 9 장 ( Chapter 9, Acts )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죽이기를 열심히 하던 자가

죽임 당할 위험에 놓였다.

 천지가 개벽하고

상전이 벽해가 되었다.

 

 난 늘 불안했었다.

물론 지금은 훨씬 더 평강의 시간이 커졌지만..

 

 추석을 비교적 - 어제는 힘내어 기도원에 갔다 오면서 작품성 사진을 몇개나 얻었다.. 와우..- 기도를 놓고 지냈다.

아침에 출근하며

오늘 있을 아침 큐티 찬양인도가 나 임을 알게 되어

부랴부랴 찬양 인도할 것을 생각하고

키타를 짊어지고

가랑비 뚫고

지하에 샘누리 홀에 들어서려는 순간,

익숙한 소리 - 묵상을 한참 진행한 후에야 소리인줄 깨달았다.ㅎㅎ -가 들리면서 마음이 가라앉는다.

' 니 나이가 몇인데

 그걸 메고..'

난 이러면 확 처진다.

 

 오늘 사도 바울이

그 무서운 일을 당하게 되었다.

난 늘 무서울 것 같아 바둥 대는데...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 어떤 시간이라도 주님을 묵상하는 자에게는 도우는 자가 있게 됩니다. )

 

 

 그 악했던 사도 바울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 났다.

 

 나도 참 사나왔다.

정직하고

순수한 면이

불신자 시절 부터 많았으나

급하고

무엇보다

육신적으로 발군의 성적을 나타냈고

커다란 체격과 주먹으로

날 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식들한테도

사납게 대했었다.

 식구들의 언어가 광폭-ㅎㅎ - 했었다.

 

내가 악한 인것으로 늘 마음 속에 부담이 있어 왔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악한 이었었는데..

그래도 도우는 사람이 있다.

 

나도

서서히 날 도우는 사람이 있을 것임을 인정하고

내가 착한 사람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 있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울은 물론 나보다 대단한 사람이다.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능력이나 믿음 면에서...

입장이 그랬다는 얘기다.

그리고 ,

과거의 악함 면에서 실제적으로...

 

 그러니

아무도 두려워 하여 믿지 않으려 하지 않는가?

 

지금도 시골에 가면

동기들이 날 어려워 한다.

친하려 해도

가까이 오는 사람들이 예전 부터 별로 없었다.

 

사도 바울은 그래도 예루 살렘에 가서 사람들을 사귀고자 했다.

난 포기하고 내 성을 쌓았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도바울의 이러함을 보면

몇가지 느끼는 점이 있다.

 

 그는 담대하다.

난 쪽팔리면 -ㅎㅎ - 아무 것도 안한다.

그게 내 인생의 신조였다.

남을 절대로 폐끼치지 않는다.

나도 폐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추악할 수 있음에도 찾아간다.

남들이 자기를 귀신이나 괴물이나 살인자나 흉악한 마귀로 알지 모르는데도 사귀러 갔다.

더구나, 예루살렘에는 그를 배반자로 낙인찍고 있지 않을까?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외부의 판단에 내 가치 기준을 맡기면

그는 틀림없이 위축되고 짜부려져

우울의 늪에서

허둥대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는 사귀러 갔다.

낯이 두껍거나

다른 무엇이 있었을 것이 나같으면 도저히 상상히 가지 않을 담대함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소명'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고

칩거한 삼일의 그 어둠 속에서

그는

그의 전 의식을 뒤 바꿀

그런 큰 소명을 깨달았다.

그게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담대함

나에게 가장 큰 부러움.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 주여.. 당신으로만 내 전 의식을 바꾸소서.... )

 

 

  바나바가 도우는 자로 나타난다.

 

그의 그 어리석음과 얼굴 두꺼움과 두려운 상황과 앞이 보이지 않을 절망적 상황 - 내 기준 ~!- 에

도우는 자가 또 나타난다.

 

 바나바.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살인자가

쫓기는 자로 바뀌었고

핍박자가

전도자로 바뀌었으며

적이

동지로 바뀌었다.

 

예루살렘에 출입한다.

 

TV 를 보아도

어리석기 그지없고

저건 정말 바보수준이다..라고 판별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얼굴하나 바뀌지 않고

꾸준히 출연하고는

하나의 트렌드로 바뀌고 있음을 가끔 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당당한 자를 그냥 받아들인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중요한 메시지다.

서두에 늘어놓았듯이

낯뜨거운 거 못참고

사리라고 생각되는 기준 -지금 보면 잘못된 것이 많지만 - 에 맞지 않으면

절대로 용인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일단은 이렇다.

 

지금까지는

불신의 때를 벗기는 과정이다.

그 과정 중에서도

강팍하였던 때가 밀려 나가는 중이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오는 주요인물들의

변화하는 모습에서

나를 투영하여

하나하나 잘못된 모습을 지워가고 있는 과정이시다.

 

 그 과정은 절대로 인간의 노력이나 지력으로 되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의 과정에서

주님과 얼마나 동행하는 가에 따라 다르다.

물론,

사도 바울 처럼

전적으로 확 뒤바뀌는 분도 계시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상당한 기간 연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는

세상이 사람의 지력으로만 모든게 결정이 된다는 논리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 주님의 시간이 지나면 하늘은 맑아지고 높아지며 꽃은 만개하고 과실은 맺혀지게 됩니다. )

 

 주님의 시간.

따라서

주님은 살아 계시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은

가만히 주님 만 사모하기만 하면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캐취하여

어떤 면을 주님이 보이시려 하는 가 묵상하는 것이다.

 

그 묵상의 시간에

주님은 응답하시는 것 처럼

그 사도 바울의 급격한 변화와

세상관의

인생관의

우주관의 대 변혁을 통하여

전혀 다른 인간관계 에서

성공하고 있는 것을 나에게 보이시는 것이다.

 

주님은 나에게

보라

주님의 의도면 안되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같다.

그렇게도 터부시 하는 제한점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격은 아무때라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보이시는 것 같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듯 배워왔지만

실제로

너무나도 당연히 걱정, 근심, 두려움, 낯 뜨거움, 부끄러움, 닭살의 생각은 할 이유조차 없는 것이다.

 

 살인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쫓기던 자들과 같이 출입하고 있다.

당연하게...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또,

주 예수님을 주 예수라 부른다.

한번도 과거의 자신에 대하여 쑥스러워 하는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있다.

담대히 말하고 있다.

그것을 넘어서 변론도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을 유발하던 자가

죽임을 유발 당하는 행위를 거침없이 한다.

 

그것이 무슨 이유인가?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했는가?

 

소명이다.

 

주님 예수님을 너무도 크게 만났기에 가능하다.

3일의 어둠 속에서 대 변혁을 이루었기에 가능하다.

 

주여..

나도 .............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소명은

머리 속 생각이나

일시적 감흥의 결과가 아니다.

 주를 지독히도 경외하고 감사해 하며

성령의 절대적인 위로와 강력한 인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 결과

세상적인 변화도 나오는 결과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도우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어려움은 있게 되지만

훨씬 더 큰 부흥이 있을 수 있다.

 

걱정은 할 이유가 없다.

 

 

 

기도

 

주님

용서하세요.

많은 부분

그럭저럭 넘어가려는 것 같아서 죄송하기 그지 없네요.

아침의 시간이 점차로 짧아지고

아무 생각 없이 주님의 말씀 묵상이 희미하게 되어 버리는 것만 같아서

죄송합니다.

휴일만 되면

여지없이

내 묵상과

주님에 대한 기도도

주님에 대한 열렬한 사모도

영적 전투도

그냥 쉬어 버리는 것 만 같습니다.

주여.

그래서

고난이 제게 유익이라 하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처절한 변혁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이 강하게 임하셔서

그의 내면을 뒤 흔들어 버리시니

그는

살인자에서 도망자로

입을 막는 자에서

입을 벌려 증거하는 자로

쑥스러워야할 자에서

당당한 자로 변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도우는 자가 많음도 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편으로 힘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유달리 걱정이 많았습니다.

지금

상당 부분 내려 놓았음에도

아직도

머리 속에서 정리된 스케쥴이 짜이는 것이 아니면

주님 손도 내밀지 못할 만큼 소심 증 소유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혼자 만의 대 변혁을 겪고 난후

과감히 움직이니

그를 도우는 손길이 나타나

그를 광주리에 태워서 내려 보내기도

그를 사도들에게 소개하는 바나바라는 자도 

사귐을 가지니

예루 살렘 성을 드나들게 하는 도움의 친구들이

이곳 저곳에서 나타남도 보고 있습니다.

 

주여.

이걸 보면서

나름대로 희망을 갖습니다.

주님의 원리는

"어리석은 내 머리속의 판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구나"

라는 사실입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마음 속 깊이 믿지 못하던

이 어리석은 혼란을

서서히 깨우치게 하시고 계십니다.

 

내려놓음

믿고 의지함

변한 후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아니함

그리고는

성령 충만

성령 충만으로 인하여

하는 일이 배가됨.

 

 

소명

 

바로 내 내면이 오늘

주님의 그 손길로

사도 바울처럼

대 변혁이 일어나

뒤틀어지고

왜곡된 심사의 흐름을 바로 잡으시길 소원합니다.

 

전 그렇습니다.

난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서

사람들이 다가와 도와줄 만하지 않을 거란 자기인식의 왜곡이 있었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다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러한 변화가

내면 깊숙이 부터 생겨날 수 있을 희망이 생깁니다.

 

주여.

주님 일에

좀더 당당하길 원합니다.

어리석은 이 머리를 싹 비우소서.

어리석은 이 영혼을 완전히 닦으소서.

어리석은 이 마음을 당신의 평화로 채우소서.

 

제발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되어

힘있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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