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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를 보며 미소짓다[눅19:1-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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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를 보며 미소짓다[눅19:1-10]

주하인 2021. 3. 17. 08:24

(펌)

삭개오는 작았고

삭개오는 속상했으며

삭개오는 터질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있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의 부족함과 두려움이

훨씬 더 드러날 듯한

돌 무화과 나무에 올랐다

 

오직

예수님을 볼수 있을 기대에

 

어쩌면

알지 모를 그의 터질듯함을 해결받을

막연한 기대에 그랬다

 

그리고

그는 그리 되었고

그의 집은

온전한 구원을 받았다 .

 

약함은

단순한 곤란이 아니고

피해 다닐 일 만은 아니었음을

그는 몸으로 증명해냈다  

 

그 작은 키와 팔다리로

 나무를 오른 

그 거침없는 판단

영혼 깊숙히 올라오는

간절한 갈등으로

그는 그리해냈다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내었으며

이 시대 이시간

수없는 주하인들을 향하여

 

약함은 부끄러움이고 

아픔은 괴로움이지는 않을 것이

오히려 강함일 수 있고 

기쁨이 될 수도 있음을 

그는

몸으로 증거해보였다 

 

감사하다

삭개오여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

세리장으로 부자지만 늘 욕먹어 마음 가난한 사람.

그의 그러함은 그도 알지 못하는 갈증이 있지 않았었을까?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

 그는

'키가 작아' ..

그리고 ,그래서

그 수없이 많은 인파에 쓸려

보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맞았다.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그런데 그에게는

다른 게 하나 있었다.

포기하고 주눅들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갈 만큼

절절함을 가진 자였다.

 

 '세리장'으로 부자라면 가지고 있을

'거드름' 내지 차가움.. .

그리고 '키작은 '자로서

주변의 시선을 인식할 열등감과

열등감가진 '부자'들이 자주 그러하듯

더 안그런척하는 얼어 붙어 딱딱함 등이 느껴지질 않고

오히려 '돌무화과 나무'에 오를 만큼

천진난만함, 하고자 하는 것을 거침없이 실행할 실행력도 있는 자 였다

 

아니..

그의 그러한 거침없음은

'예수님께서 만'

자신도 느끼지 못하고 살았지만 (어쩌면 홀로 고민했을 지 모를... 인생의 절박한 문제..)

많은 것을 가졌지만 더 커지는 갈증..

거침없이 행동하지만 그 이면에 가진 키작은 자로서의 열등감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이상 가지는 재물이나 외적인 것으로서 채워지지 않는

영적 공허감... 을 해결할 수 있을 

오직 유일한 길이실 것임을 

영혼이 깨달아 느낀 것일 것이고, 

그러함을 깨닫자 마자

살고 있는 곳으로 오신 그 기회를 향해

그는

열렬히

피하지 않고 마주 하였던 것이다 .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그리고

그러한 그의 약함과  결점과 손가락질의 두려움을

더 갈급한 사모함으로 대치하여냈고

그의 그러함은

키작은 돈많은 나름 사회 유지(홀로 생각일 수도... 사회적 위치일 수도... )가

어린 아이처럼 '나무' ,

그것도 품위없이 느껴지는 '돌(^^;;) 무화과 나무'에 올랐다 .

단지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기 위하여...

그의 그러함은

자신의 갈증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길 ,

구원의 길이심을 깨달은 탓 아니었을까?

 

그의 그러한 순수한... 4차원 ^^;의 행동은

결국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고

'즐거워하며 ' 내려오는 (상상이 된다... 키작은,어쩌면 배불뚝이 ^^; 중년남자가 뒤뚱거리며 허겁지겁 내려오는 뒤태 ㅎㅎ) 기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기쁜 결과라 표현했음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셨다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확실히 느껴져 온다

 

 

 무엇인가?

오늘은 무엇을 보이시려 하심일까?

 이상히도

나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일 것일 것 같음에도

삭개오의 저런 4차원적 행동 ( 아무것도 모르고 지금 시대의 눈으로 바라본 그의 외적인 뉘앙스 )가

하나도

낯설지 않다 .

 

그리고

그의 물질적 있음 (풍요라기 보다는 그냥 .. 조금 더 있음 ^^;) 에 반하여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 ( 스스로 느끼던, 그냥 사회적 현상이던.. )과 더불어

신체적 결점 (심리적인 자기 이미지가 그럴 수도 있음 ) 이던

가지고 있는 부족함과

겉과는 다른 내적인 힘듦을

그는

절절한 예수님 사모함 ( 아마도 그는 처음에는 호기심 내지 어떤 끌림 정도로만 느꼈겠지만 .. )을

결단있는 적극성으로 (드러나는 결점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 보겠다는 일념)

결국은 '집의 구원'을 이루어 냈다 .

 

 무엇인가?

무엇을 내게 말씀하시려는가?

 

 

 아직도

번연히 남아 있는

내 내면의 문제.........

그것이 마치 삭개오의 작은 키 마냥.. .

사회적 지탄에 대한 신경쓰임 마냥 ...

나를 붙들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직도 틈만 나면

아주 크게 다가오려고 (예수님 깊이 만나기전 ... 삶의 가장 큰 문제였던.. ) 하고 있던 부분으로

그것.. .

구원의 자격은 받았지만

온전한 구원을 향한

디딤돌이 되기를

주께서

삭개오를 통하여

나의 그러함을

읽어주시고

힘을 주시고

다시한번

너무도 뚜렷한 원리를 적용시켜 보게 하실 요량으로

이 아침

너무도 익숙한

그 나의 약한 결점들을 자극 받던 바로 그 순간,

말씀을 묵상하려 들여보자마자

깨닫게 하신다.

 

 아.. 감사하다.

 

 

주여.

삭개오랑

너무나 다르지만

너무도 동질감을 많이 느끼며

한편

그의 약함을 강함으로 만드는

거침없는 선택,

짧은 팔다리로

오직 예수님을 목적으로

돌무화과 나무에 매달림으로

온전한 구원의 길을 내 딛게 됨을 보게 하셨습니다.

 

주여.

약함이 강함이고

 

약함을 통해

예수님께 온전히 내려 놓음으로

온전한 강함을 이루어지는 단초를

다시금

그를 통해 보게 하십니다.

 

마음이

훨씬 가벼운 아침입니다.

주여.

그러함의 원리들이

매일매일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의 부족함과 오래된 걸림들이 깨어져 나감을 느끼며

아..

이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원리를 이루고 느끼고

제 영혼 깊숙이 체험시켜

확신으로 다져져가는 시간들임을 다시한번 확인합니다.

 

'그렇습니다 .

이제

남은 내 시간....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또 다른 영적 성장을 위한 시간들로서

확인, 확신하여 갑니다.

그러하오니.. .

늙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고

약해져 가는 것이 서럽지 않으며

외로와져 가는 것과

질타 등의 괴로움들이 문제가 되어가지 않을 것 만 같습니다.

 

안전한 든든함..

가만히 있어도 느껴지는 고요한 평강.............

 

주께서 허락하시는

온전한 구원을 향해가는

또 하루의 기대입니다.

 

감사합니다.

온전하시고 세심하시며 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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