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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지되 눕지 않게 하소서[겔32:17-3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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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지되 눕지 않게 하소서[겔32:17-32]

주하인 2012. 10. 11. 10:49

 

 

 

19.  이르라 너의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나도다 너는 내려가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와

      함께 누울지어다 (be laid )

27. 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fallen)용사와 함께 누운 (lie)것이 마땅하지

      아니 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

 

  lie, be laid , fallen

눕고 누여지고 엎드러지고...

계속 수도 없이 되풀이 되어 나온다. 

 한편 NIV로 찾아보니 눕는 것에 대하여 위의 세가지 표현으로 달리 나온다.

어쨋든 눕는 다는 것은

서 있지 못한다는 것이고

서 잇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 내지 징벌의 결과를 말씀하시는 듯하다.

 또 ,  눕는(lie) '능동적'인 것이지만

누여진 것( be laid)은 '피동적'이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그 둘 사이에 크게 구분이 되지 않고 쓰여지기는 하는데

뉘앙스가 눕다는 능동적 표현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거의 누여진 상태가 얼마 되지 않은

비교적 '죄'와 징벌 사이의 간격이 그리 멀지 않은 느낌으로 쓰여지는 듯하고

누여진 것의 피동적 표현은 조금 더 오래된 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죄로 인하여

망하여지는 것을 표현 한 듯하다.

엎드러졌다(fallen)는 표현은 아주 오래되어 썩어갈 듯한,

그래서 그들을 모본으로 삼아 더 이상 그런 죄를 짓지 않아야 되는

그런 타산지석의 느낌이다.

 

 그런 뉘앙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게으름' , ' 불신앙' , ' 망함'의 의미로 다가온다.

  나에게 맞추어 본다.

솔직히 '말씀'에 천착되어 있는 나는

저들처럼 fallen 되고, laid되는 상황까지 타락한 것 같지 않고

"Lie할 위험"에 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나를 눕게(Lie) 하는

그중에서도 영적 게으름의 뉘앙스에 해당하는 매일의 나태함은 어떤 것인가?

 

'상처'를 빌미로 

그것을 맹인의 지팡이처럼 사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던가?

거기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 것인가?

요새 , 되풀이 되는 내 '걸림돌' 을 경험하면서

난.. 내 되풀이의 '죄'가

누운 죄임을 비로소 다시 한번 깨닫기 시작했다.

누운 죄, lie 죄의 위험

그 게으름을 이제 다시 주님 말씀 안에서 전격적으로 다시 확인 해보아야 한다.

 

어제의 묵상 후 '자족하기 위한 결심' 을 묵상하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가능함을 묵상하며

수요 전인치유 예배에 참여 했다.

그곳.. 찬양이 뜨겁다.

환우 분들이 모여 , 그들의 치유를 위해 예배가 드려지기에

생각을 더 깊이 할 기회를 종종 주신다.

어제가 그랬다.

낮아짐을 기뻐하고 일체의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길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배에 임했다.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있으며,

찬양으로 그 분을 앞에 대하며

어찌 은혜가 없으리..

 찬양하시는 '여성' 분들의 소리가 '불협'화음으로 내 귀에 들린다.

당연히도 튀쳐 나오려는 내 판단,

' 아니.. 저것 밖에.. .'

나.. 순간 튀어나오는 내 죄를 '말씀' 으로 걸러냈다.

깨달음이 있다.

 '그를 위해 기도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

'내 귀를 막으소서. '

그래서인가?

갑자기 화음이 아름답다.

그 분들 수개월 간 보았지만 어제처럼 화음이 잘되는 것 보질 못햇다.

'알토'의 화음이 절묘하게 , 크지도 적지도 않게 들린다.

내가 좋아하는 음색을 가진 여성 보칼이 '오버'를 하지 않는다.

은혜다.

리더 분도 그것을 아시는 가?

굉장히 뜨겁다.

예배 내내 나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잔잔한 교류를 경험했다.

소위 말하는 '불같은 , 기도원 같은 뜨거운 찬양'과 소리지름과

통성 기도에 의하고 프로그램에 의하여

정서가 자극되는 그런 은혜가 아니다.

참 평화롭고 좋다.

다시금 ' 깨달음'이 또 깨달아 진다.

' 아파서 여기에 오신 분들이 아픔 만을 낫고 가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평범하고 아프지 않은 사람들 만들어 놓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아파지지 않고 그냥 돈 많이 벌다가 수명다하고 자식 잘 길러놓고

죽어 버리는 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시었던가?

그 아픔, 그 수모, 그 고난을 감내하시고?...

그게 진정 하나님의 뜻이던가?

아니잖는가?

 아픔을 통하여 더 큰 받음을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과정이 아닌가?

나.....

나도 그렇지 않은가?

그게 그렇다면 무엇인가?

당연히도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래서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면서 살다가

주님 부르시어 주님의 가까운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다.

 

나..

그렇다면

얼마 전 동일한 깨달음보다 또 무엇이 달라야 하던가?

' 내 부족함'을 더 기뻐하는 연습.

주시면 감사하고

주시지 않은 부분, 하나님의 뜻이 있으심을 믿고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

발전하는 자를 기뻐해주고

부족한 나를 그냥 받아 들이는 것.

잘못된 과거의 훈련에 의하여

더 이상 똑같이 생각하고 반응하기 보다는

그것 마져 주님 말씀 대로 받아 들이는 것.

그 중에서도 ' 낮아짐을 기뻐하는 것' ,

예수님 때문에 더 그러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되면 ' 자족' 하게 되어가고

점점 나는 삶에 덜 흔들리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잔잔한 평강 안에 거하게 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참 은혜롭다.

참 평화롭다.

참 기쁘다...

그래서 난 축도가 끝나고 남들이 다 일어나서 가는 데도

내 늘 앉는 가장 뒷자리에서 열심히 떠오르는 감동을  적었다. 

 

 

나 이 제 낮아 지리라

그게 주님 원하심이면

나 그리 되길 간절히 간절히도 바란다

 

 

나이제 맡기리라

내 영혼의 흐름을

그냥

저들에게맡겨보리라

그게

평화를 위한

 옳은 선택이 맞다면

나 이제 정말 그리하리라

 

 

나 이제 기 뻐하리라

내 낮아짐과

 약함과

관심 밖에 놓임에도
항상 그리하리라

 

그리함으로
평강이 맞아진다면
나 진정 그리하리라

 

 

 그렇다.

그게 '자꾸 일어섬'이다.

눕지 않는 비결이다.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생각

이전과 변화 없는 경쟁,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것은

빨리가고 높이 서는 것 같지만,

그게 오래되면 , 누여지고 , 엎드러지는

썩어가는 길이 되고야 말것이다.

 

 

기도

 

눕는다고 나옵니다.

나태한 ...

그래서 패망에 이르는 ..

그 안에 속한 나와 주님 만이 아시는

영적 나태를

주여 깨닫게 하시사 더 이상 죄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

간절히 빈다.

누인다 .. 눕는다.. 계속 되풀이 됨은

깨닫지 만 자꾸만 잊어 버리는 저를 경계 하심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 시여

도우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올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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