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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랬었다. ( 욥 5:16-23 ) 본문

구약 QT

나도 그랬었다. ( 욥 5:16-23 )

주하인 2008. 9. 6. 21:48

제 5 장 ( Chapter 5, Job )

 

 

눈을 들면 보이는

진료실의 십자가

저분 을

내 앞에 모신다.

그 분이 계시기에

살아갈 이유가 있다.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22.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욥기를 읽어가며

엘리바스 및

그 친구들이 이야기 하는 것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맞기는 해. ..하면서도

읽어가려면

괜히 짜증이 나고 듣고 싶지 않아지며

어딘 가 모를

논리적 허구성에 대하여

늘 찝고 지나갔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말은

제고의 가치 조차 없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옳은 말을 할수록

그들이 틀린 이유에 대하여

더더욱 많은 논리를 가져다가

그들의 이야기를 거부할 수 있었다.

 

 '솟아나는 샘물' 묵상 집에서

코칭 기법을 성경묵상에 대입시켜

주로 '치유' 및 회복에 대하여

촛점을 맞추는 것이

조금은 버겁기도 하며

특별히

이들,

친구들의 날카로운 공격 부분에

묵상을 할애하니

답답해서

어제는 매일 큐티를가지고 다시

묵상을 했다.

 

그러면서

아침에 늦잠을 자고 일어난 후

어쩔 수 없이

다시 솟샘을 들여다 보며

흥미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일까?

이렇게나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그들이 실제로

나름대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명료한 말을 함에도

왜 한마디 도 듣지 않으려 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것은

의미있는 타인의

잔소리에 대하여

소름끼쳐하는

내 상처의 흔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

그들도 옳은 소리를 하였다.

'공부 열심히 하고,'

' 애껴야 하고'

' 부모님 , 당신들을 존경하고 닮아야 하고'

........

어디하나 틀린 구석이 없다.

그들 말씀 대로 준행하면

틀림없는 삶을 살 수가 있어왔다.

그러나,

난 그러지 못했고,

그들은

그들의 말씀보다 훨씬 못한 행실을 보였음이 문제였었다.

그게 갈등였었다.

그러기에

늘 나는 가슴이 아팠었고

그 분들과 간극이 컸었다.

 

오늘

엘리바스가 하는 말은

다 옳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이

정확하다 .

고난에 아무리 매여쌓여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사도 바울 선생님도

'우겨쌈을 당해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어디하나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왜 틀린가?

 

그들은 상황에 맞지 않는

너무도 정확한 말을 했기에 그렇다.

 옥잠화란다.

수수한 게

이름은 황홀하다.

수수한 것이

어울리니

너무도 이쁘다.

 

 주하인

그냥 봐줄 수 없이

결점 덩어리 인간.

하지만

주님께 가져다가 대비된

이 내 영혼은

이 내 정체성을 살리는 이름은

황홀히 만들고 있다.

점차로..

삶에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주님.

조금 만 더 인도하소서.

겸허하게하소서.

 

 

 

아들이

얼굴에 상처가 있다.

그래서 어제 집에 가서 물었더니

학교에서 다툼이 있었단다.

가슴이 많이 아팠던 모양이다.

며칠

엘리바스를 묵상한 탓에

그 아이의 아픔을

대신 분노로 표현 해 주었다.

아이가 시원한 모양이다.

순수하지만 엉터리 같은 아이.

보석 같아서

때로는 세상과 어울리기 힘든 성정을 보유한 아이..

그 아이가

가끔 번뜩이는 소리를 하는 것이

또래에게 묘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던게

다툼이 일어나고

아이의 오래전 왕따의 기억이

아이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한참을 맞장구 쳐주다가

오래 되풀이되자

난, 훈계를 시작했다.

논리적으로 지적해주고

아이의 앞에 할 행동 지침까지 지도했다.

아이는

말이 줄었다.

결국은

공부 열심히 하여야 할

고 3으로

말을 마쳤다.

 

그러고 나니 아이가 방으로 가는

뒷 모습에

어딘가 모를 허전함이 보인다.

순간,

또 실수 했음을 느꼈다.

아버지는 아들의 아픔을

감싸고 이해해 주어야 했다.

끝까지..

그러나,

난 엘리바스의 지도를 해주려 했다.

어디까지나

난,

그 아이가 안타까워 그랬다.

엘리바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속상했다.

아이도 그랬을 것이다.

나도 그랬었다.

 

그렇다면

아이의 아픔을 끝없이 들어 주었어야 하는가?

가능하면 그랬어야 한다.

좀더 현명히 어루 만져야 할 것을

섣불리 지도하려 했다.

이 고치기 어려운 '지도'의 욕구를

언제쯤이 되어야

고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의 묵상은

몇가지 관점을 두고

적용을 할 수가 있다.

 

우선 '엘리바스의 입장이다.

이제는

말을 닫아야 한다.

아픈 자들 앞에서는

같이 아파하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욥'의 입장이다.

아프지만,

엘리바스는 옳다.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 맞다.

늘 암송하는

'예수님을 위하여, 약한 것들과 , 능욕과.... 이는 내가 약할 그때 강함이니라'

 구약 시대와 다른 것은

말씀에 나를 맞추면

주님 성령님께서 인도하셔서

내가 아는

내가 이겨야 하는 감정의 무게 보다

훨씬 가벼움으로 날 이끄신다.

그게 '주님 말씀으로 인한 자유'다..

 난 아프던 감정이 많다.

지금도 가끔 불쑥 올라온다.

그것을

의미있는 타인,

엘리바스 같은 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엉터리라 고 정죄해버린다.

그리고는 들어보지도 않으려 한다.

 

이제 마음을 넓혀야 한다.

내가

좀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들

엘리바스를 받아 들여야 한다.

주님의 말씀으로 대입시켜서...

 

 

 늦은 시간이다.

오늘 토요일

너무 바빳다.

수술을 응급으로

세 분이나 연달아 했다.

이제 회진을 마치고

집에 가려 한다.

묵상을 하지 않고 가려다가

그 사소한 놓침이 싸여서

자꾸만 습관화 되어 가는

이 매너리즘 때문에

블로그에 들어 왔다.

 

주님 말씀을

놓치면

난 죽음이다.

 

그게 얼마전 까지의

내 확실한 고백이 아니던가?

 

주님

죄송하고

주님

감사하나이다.

 

어려운 묵상집에 걸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또 말씀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여

낮추 보았던 분들의 말씀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함을 주소서.

조금 더 나를 낮추게 하소서.

되지 않는

이 뻑뻑한 영혼의 굳음을 푸소서.

주님

당신의 말씀이

내 원함으로 바뀌게 하소서.

준행이

내 기쁨이 되게 하소서.

억울한 마음 가라앉히시고

속상함 버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절 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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