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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나는 .. 그래서.. 산다[렘20:7-18]

주하인 2017. 10. 27. 08:51

 


 
9.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8.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나는

예레미야님의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면' " 내 마음이 불붙는 것 같'다고 고백하는

저 고백이

참으로 부럽기돋 하면서 한편으로 공감이 가기도 한다.

 나도..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지 않으면..(아~주 가끔이지만 ^^;) 마음이 안절부절 못한다.

말씀을 묵상하고 나면 말씀에서 명령하실 때가 느껴지면

한마디라도 전하려 애쓰고

그렇지 못할 때 안절 부절할 때가 없지 않아 있다. ^^;

그런데 '마음이 불붙는 것 ' 같을 때는 없다.

아직 .. 그 정도는 아니다.

그 불붙는 것 같아서 '선교사'로 뛰쳐 나가고 싶을 때도 잇었지만

그거.. 내 안의 '뒤숭숭'한 자아의 충돌인 듯 .. 구분이 가지 않아 주저 앉은 경험 이외는

그 불같은 갈증이 없어서

그 분 예레미야님이 부럽다.


 저.. .전적인 '타력'의 하나님의 증거다.


한편..

그 불같은 이끌림은

이 어이없는 인생에서

오직

주님의 말씀만 바라는 목적으로 삼고

주님의 임재감 만 내 삶의 에너지이자 잘 나가고 있는 삶에 대한 확신의 증거로 보게 되고

고민이나 갈등 때에도 괜히 영적이고 심적인 에너지가 빠져나갈 염려가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예레미야 선지자님에게도

나름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깊은 '내면'의 갈등.

선지자는 모두 '칼같고'  무적의 용사 같으며, 절대로 인간의 그러한 갈등이

그 분 같은 대단한 선지자님 내면에는 없을 줄 알았는데도

오늘 예레미야님의 고민은

철저히도

우리 소시민, 그 중에서도 오랜 내적인 뒤엉킴으로 고민하고 갈등해오던

주하인.. 을 닮은 고백을

유사히도

아니.. 더 정확히 고백하셔서

한편으로 놀랍기도

한편으로 반갑기도 하다.

 그 분.... .

저 '18.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라시는

그 갈등의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데 그러니..

죄송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인간 '예레미야'

그 본질.

그 믿음의 로봇 같은 그 분의 내면에도

저런 '인간적'인 고뇌가 있음,

그것도 처절히 울부짖는 모습이 오늘 묵상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


 그렇다면

그 고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완벽이시며

하나님은 무소부지하시고

하나님은 만유의 근본이시며

하나님은 절대 선이시고

하나님은 안아주시는 어미닭 날개 품안의 따스함이신데........

.................................

어찌 저런

'갈등'....'어려움'.. '불붙는 아픔과 동반된 단절의 마음'을

그것도

가장 사랑하시는

선지자

예레미야 님께도 허락되어졌을까?


 여기에서 나는

한편으로 기쁘고 감사하기도 하다.

그 분. .그처럼 사랑하셧던 분에게도 허락되어진 갈등이라면

그 '차원'이 다르지만

내게 허락되어지는 '고통', '고난', '갈등', 번민..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시란 것이시다.

 단....

그 전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나도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어쨋든....  그 전제하에서

나도 고민하고 고통햇던 문제들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을 것임이

오늘 말씀 가운데서 은연 중 느껴저서 기쁘다 .


 그렇다면.....

이 고난과 고통과 번민의 소리지르는 외침.. 의 '본질'...

그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관계'의 문제다.

보라.

예레미야 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타듯 타오르는 자기도 모르는 끌리는 와침으로 외치는 관계다.

절대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님 몸에 붙은 '손과 발' 같이 잡아 다니면 찢어지는 아픔이다.

그 분의 심장처럼...

그 분이 사랑을 느낄 때 뛰어야만 하는

그것도 '설레이며'  불타듯 뛰는 가슴이다.

그래서 ... 그리 불타듯 외칠 수 밖에 없는 예레미야 님...이시다.

절대의 '하나님과의 선'한 관계다.


 나.

나도 그렇다.

저렇듯... 대단하지는 못하지만...

주님과의 관계 만큼은

내 자신은 절대로 , 죽을 만큼 아프게 ... 주님께 붙은 관계.. 맞다.

내 삶의 유일하고 절대의  인생 목표가

주님과의 관계 정립이다.

그분이 그렇게 하라시는 것..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이루기 위해..

나는 산다.

그래서 산다


 그런데... 이 분..

'인간 관계' 문제 때문에

이렇게 고민한다.

친구 마져.. 모조리 자신을 저주한다고 한다 .

얼마나 힘들까?

아는 모든 관계가 깨어져 버리니.. 말이다.

'하나님'의 맘씀으로 인하여 인간 관계가 깨진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돈독하니

세상과 나의 관계가 멀어진다.

그러니.. 이 관계의 문제가 그를 저토록 동요케 한다.

그런데..

이분...

 이때 그 내면에 다른 문제는 없었을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불타는 관계가 될수록

인간관계가 멀어지는 것에 대한

이 묘한 두려움.. .

이 것... 어찌 받아 들일까?

세상을 태어나서 한번 멋있게 살아 보고자 하는 게

누구나의 본능적 바램일 진데....

비록 그 분 예레미야님은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 받았으니

잘 증거하며

주변 인들에게 '잘 ' 칭찬 받고

어디가나 하나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그의 꽃 같은 행실로 인하여

칭송 받는 관계까지 되어지면 ..

그 얼마나 금상첨화일까?

 이러한 것..

누구나 그리지 않을까?

그의 뇌리에..

그러한 바램..

그러한 기대에

그러나 이 차가운 세상, 마귀의 권세 잡은 세상, .. 에서

도전이 왜 없을까?

그러기에 그도 이렇게 갈등하지 않는가?


 여기서 더 깊은 묵상이 시작이 된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사람과의 관계는 끊어지는가?'

' 이땅의 삶은 완전히 도외시 해야 하는 게 믿는 자의 원리인가?'

' 예수님의 말씀 중 화합 을 위해서 오셨다 하고 매시의 말씀을 어찌 적용할까...'.... 등

수도 없이 많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 길은 '수도자'의 길 밖에 없는가?


 아니다.

분명코 사람은 다 다르다 .

어느 사람은 이 길로..

어떤 사람은 다른 길로..

그에 따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방법이 다르시다.

그런데 .. 그 모든게 관계에 전제를 두고  시작이 된다.

그 관계..

'하나님과 나의 관계'

'인간과 나의 관계'

거기에 ... '나와 나와의 관계' 가 중요하다 .

삼위일체 하나님 처럼

우리도 이 3 관계에 모두 집중되지 않으면

즉, 통전적이고 통합적인 관계의 회복이 아니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게

온전한 '회복'이다.


 하나님은 그러나.. 그 우선 순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물론 두고 계시다.

거기에 3관계가 정립되길 원하시고 치우쳐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 인간세상을 이용하여....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것이시니...

이 관계의 모든 것에 완전한 깨달음과 회복이 있으셔야

'성화'된 영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 드러나지 않은 '나와 나의 관계'.. ..

그 부분이..

내가 그토록 오래 묵상해오던

이 블로그의 중심이 있다.


 저.. 괴로움..

그 괴로움을 어찌 해야 하는가?

왜 저 분은 저리 혼란 스러워 하는가?

그렇다면 어찌 해결해야 하는가?


 당연히도 '선지자'의 길을 가시는 분들은

훨씬 더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집중이 되어가며

그 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데

'그 예레미야 님 자체의 인생은 그렇다면 '파괴' 된 상태로

그냥 부르셔서 '천국'에서만 편케 하실까?

영생만?


어쩌면 그러실 수도 있다 .

그 분은 우리 평범한 소시민과 다르게

선지자'의 특별한,

그 중에서도 성경에 기재 될 만한 특별한 분이시기에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

그런데 그렇다면 그 분의 왜곡된 심성.. 저렇듯 통탄하는 상처는 어찌 가지고

'천국' ... 그 영생의 삶을 들어갈 수 있는가?

아마도 '하나님이 전적인 신유'로 완벽한 성화의 영혼을 순간 이루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내면에 '선지자의 삶'을 나머지 꾸리는 동안

깊은 평강이 임하지 않았을까?


그것..

그 평강의 기본.

'나와 나와의 관계의 회복'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십자가에 못박힌 자아' ..

그를 통해 '약해진 것을 기뻐할 줄 아는 자아'

그럼으로 느껴지게 되는 '약함이 강함'임을 깊이 체험하는 자아...

그 자아 마져 .. .

하나님의 깊은 평강 안에서 잊혀져 ..

내 영혼이 온통 '성령'과 하나가 되는

온전한 회복의 이룸을

이땅에서 이루어지게 되지 않았을까?

내면의 평화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내적인 천국.

심령천국... 말이다.


그렇다.

'관계'에 대하여 묵상하며

난..

그분의 '하나님을 증거하고자 하는 불타는 심령의 부르짖고 싶은 충동'에 대하여

나 , 더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모한다.

 '세상에 대하여 외로와짐..'

특별히 나이들며 들어오는 사회적 생물학적 외로움에

내 오래된 성격적 그러함으로 인한

거기에 단도직입적으로 증거하는 '하나님' 소리들이 복합되어

점점더 외로와지는 내 관계의 그러함..

그러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말씀으로 위로하시는 듯하다.

"깨달았니.. 주하인아?

 예레미야도 그랬지만 너도 그러함이 당연하다.

 이러한 그러함이 실패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잘못되어가는 .. 본질적 두려움에서 자유로와라'시는 것 같다.

방법은 다르지만

모든 관계에서 승리케 하리라... . 하시는 ..듯..

 나와 나와의 관계..

내 약함.. 내 부족함.. 내 관계에 취약함에 대하여

내 스스로 받아 들일수 있으면 된다.

그 분도 그러셨는데...

나도 .. 결국 ..선함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 분의 예정 가운데 그리 될 것임을 믿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

내 그러함을 기뻐하고 감사하여야 한다.

오히려..

그리되게 될것임을 믿는다.


이제..

조금은 다시 버걱거리려던 부분..

주님이 정리해주신다.

감사하다.


주님...

인간 예레미야님의 고뇌를 가감없이 바라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를 통해 '진정한 관계'의 회복을 보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내가 살아가는 원리를 바라 보았습니다.

주여.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 인하여 세상을 약간은 손해보는 관계의 모습을 살아가야 하는 것도 다시 한번 조명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게 실은 인간 관계를 끊고 속세를 떠나는 삶이 모두 옳은 것이 아닌

진정한 관계는 세가지 관계가 모두 잘 균형이 잡혀지며

그 안에서도 우선 순위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 되어야 하며

더 성화가 되기 위하여

내 자신을 받아 들여

주님의 뜻 가운데 인간관계에서 오는 여러 어려움들을

내 안의 관계로 융합시키는

그러한 진정한 '건강함'에 대하여서도 묵상했습니다.

잘 알고 잇던 얘기들..

오늘 특별히 예레미야님의 절규를 통해 바라보게 하시는 이유를

오늘 하루도 잊지 않고 살 수 있길 원합니다 .

주여.

건강하고 지혜로운 하루 되게 하소서.

내 주 예수그리스도 , 그 거룩하신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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