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 시간에 이르러[행21:17-26] 본문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예루살렘에 이르니'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
가슴이 잠깐 흔들~
그럴 때 난.. 주님의 뜻이 아니신가 , 레마이련가 잠깐 멈춘다.
그리고는 읽어간다.
주님이 주신 말씀이라면 당연히도
묵상 글은 이어질 것이고...
'이르니'
왜 일까?
왜 그리 햇을까?
내 마음이..
성령의 감동으로 절절히 끓어 살 수 밖에 없는
초대교회, 사도 행전의 시대에
어제 묵상대로 '자유의지'를 통한 결단..
그리고 우리 모두 알지만
'로마'를 통해 세상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지 않던가?
그러나...
사도 바울 개인의 입장에 들어가
저 말씀을 들여다 보면
'예루살렘'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큰 두려움이기도 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렇게 '이르러'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동기와 성취의 장소이기도 했을 것이다 .
분명코. .
그 동기와 성취.
자신에게 임하시어
자신의 인생관 , 세계관, 우주관.. 모두를 다 뒤엎어 버리신 후
그를 통하여 주변과 자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하신 증거들..
간증거리를 알리고
그로 인하여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유대인들에게
세상에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하나라도 더 믿도록 하는..
그런 '동기' 말이다.
그러나. 제약이 있다 .
너무나 많은 , 큰 유대인과 인간의 오래된 관념들을 타파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보다는 그곳을 거쳐 로마로 보내실 목적이셨을게다... 결국 세계가 복음화 된 것을 위해서....) 하기에
그들의 '관습'을 따르고 안따르고 하는 문제는
그 큰 동기에 비해 너무도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문제이기에
그를 두고 싸우고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큰 의미가 없으리라.
아마.. .현실에서 저런 문제에 부딪치면..
누구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지금의 세상에서 보면
그들이 머리를 깎고 안깍고
제사에 두번 반 절을 하고 안하고가
뭐 그리 큰 문제였을까만
그 시대, 그 시점에서는 대부분의 다수에게는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그 비본질 문제는 떠나서
'예수님' 복음 증거라는 '본질'적 분제를 위해
그는 과감히 불필요한 부분은 포기하였다.
그거.
지혜다 .
시대적 저항에 맞추기 위해서는
예수님 믿는 쪽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그 갈등들...
그 갈등 조차
이 시대의 그룹' 들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진정 원하시는 것을
'대화'와 기도를 통하여
의견을 맞추어가고
결국 '진실'을 위해 , 본질을 위해
'비진리'와 '비 본질'을 내려 놓는 것이다 .
이것.
이러한 저항을 맞게될
현실의 삶 속에서의 두려운 갈등...
예상되는 손해에도 불구하고
맞닦드리는 것...
그것을 '예루살렘에 이르니'라는 구절에
그 마음을 투영해 놓은 것 같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돌아보아야 할 것이 바로
항상 '큐티'의 본질...
하나님 말씀의 묵상을 할 때 주시는 주님의 뜻
레마가 되기위해서
내 오늘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 가 하는 문제다
'예루살렘에 이르니'는
'내게도 드디어 그 날에 이르렀다'함을 돌아보게 하시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오늘의 삶에서 드러내는 게 주 목적이심을
내게 말씀하시어
혹여.. 이전의 내 습관, 내 관념에 맞지 않아 버거울 부분들을
말씀에 따라 '조명(照明)'해 보고
덜 버겁게 바꾸어
훨씬 더 이전보다 자연스럽고 스스로 행복한
여유로운 하루가 될 것을 기대해 보자는 뜻으로
주께서 허락하신 말씀 같다는 이야기다.
감사하다.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은 자주 .. 거의 항상.. 이러신다.
그러니.. 난
매일 매잉 하루를 살 수 있어서 좋다 .
나머지는 내일 또 고민하거나 풀려 버린 고민거리를 기대하는 오늘이 될수 있고
예언하시는 말씀이시면 기대할 수 있어서 좋고
지도 하시는 말씀이면 자세를 바로 할 수 있어서 좋으며
인사이트를 주실 것이면 나를 개발할 기회가 되어서 좋다 .
난.. 그리.. 매일을 산다.
매일.. 매일..
주님.
이상히도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제가..
첫아들 낳을때 레지던트 2년차 일 그 시점에
너무도 실감이 가지 않아
세미나 준비하면서도 '아이를 신생아실에서 데려다' 옆에 놓고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 보면서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던.. 그 실감이 나지 않는..
오늘입니다.
그 아들이 장가를 가겠다고
상견례를 하는 날인데
아무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주여.
난..
시아버지가 되고
곧 할아버지가 되며
새 사람이 우리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들어오는
그런 시점이며
그것.. 결국 육체적으로
주하인, 너 늙었다고.. 선언해버림을 인정하는 시간이기도 함에도 ^^;;
아마 '머리 속'에서 꾹꾹 눌러 놓고 있던 것 일듯합니다.
주여.
좋은 일이면서도 버거운 일...
그럼에도
그 날이 '이르렀습니다. '
주여
부디 .. 내 어이없는 관념으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내 자아의 판단 기준으로 먼저
새로운 가정의 문화에 접할 때 '판단'하는 근거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오직..
큰 아들.. 그 부부를 위해 도움이 되는..
무엇보다 그들이 진정한 진리이신 '예수님' 믿는 가정이 되기 위하여
모든 내 , 세상의 판단 기준 보다 우선되게 받아 들이게 하시어
혹여.. 이전의 가치기준으로 손해날 일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런일이 없겠지만...
주여.
바울님처럼 시대와 세상을 향한 큰 발걸음이란 의미와는 전혀다른
저 걔인의 그 시간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의미로 받아 들여
이 적은 반경의 삶 속에서
제 가 드릴 수 잇는 뜨거운 '찬송',
주의 기뻐하시는 제가 드리는 아름다운 찬송이 되게 하소서.
주여.
기쁘게 맞아드립니다.
주의 말씀을 그리합니다.
사람들을 그리하겠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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