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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로 마주하는 아침[출20:18-2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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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로 마주하는 아침[출20:18-26]

주하인 2021. 9. 25. 08:16

알지 못하고 눈을 떳다면
편하고 익숙한 내 집 내 방이 아닌 곳의
아침의 광경이
과연 어땟을까?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난 한 주를
정말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고 난 후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늦은 시간 달려와 쉬는 휴식임을 알고 있기에
두려움 보다는
기쁨과 감사의 누림이 주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늦은 구월 아침은
제법 냉기를 숨기고 다가오지만
참으로 시원하고 곱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되어지는
마음의 평정은
온통
소망과
밝음과
기쁨이다.

감사하다.




18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하나님 앞에서 떠는 것은 당연하다.
경외가 없이 어찌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으며
경외감 없이는 버릇없이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경외감이 공포와 구분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경외는 두렵지만 더 다가가고 깊이 나가는 동기가 되지만
반대로 공포는 '멀리 서서'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굳이 '공포'에 대하여 설명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된다.
논리적이지 않은 두려움.
자신이 죽을까...하는 괜한 두려움이 '공포'다.
병적이고 비 이성적인 두려움.

사물을 옳게 보지 못하게 하고
비논리적이고 발전을 가로막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가리기 위한 방패로
'모세' 로 대표되는 '목회자'의 뒤..
사람이라는 거름장치를 이용하려 한다.


공포는
숨게 한다.
숨은 뒤에 '편하게 왜곡'하려 한다.
어쩌면 말씀의 본질에 마주하지 못하고 '설교'나 순화된 '예시' 나
목회자나 직분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옳으신 날것의 하나님을 바라 보지 못하게 한다.

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 앞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여
범죄에 빠지기 쉬운 상태.
그게 공포다.


21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그 비이성적 두려움은
주님 앞에 다가가지 못하게 멀리서게 하고
하나님이 계시지만
온통 '어두움'으로 보게 함이다.

왜 일까?
'죄' 탓이다.
'세상에 대한 욕심' 탓이다.
'가진 것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탓이다.
' 지금과 다를 것' , 즉 변화에 대한 무조건 적 두려움 즉, 무지 탓이다.
' 변화'를 싫어하는 게으름 탓이다.

하지만 '모세'는 다르다.
그는 역시 '흑암'으로 표현되는
알지 못하는 어두움 앞에 서 있지만
두려워 하지 않고 명령대로 흑암으로 나갈 수 있음은
두려움 대신 '경외'감을 가짐이다.

" 하나님을 경외함"
모든시작이고 끝의 기본이다.

나.
두려워하되
공포인가? 아니면 경외함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왜 두려워 하는가?
어찌 두려워 하는가?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미련한 두려움이 날 가린 것은
내 욕심과 내 과거에 대한 무비판적인 도피와
변화를 두려워 함이니
이제는 공포를 거두고
옳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길 바라심이다.

날 것의 하나님.
날 것의 십자가.
날 것의 나를 돌아보길 바라심은 아니실까 싶다.

내 인생을 붙들어 왔던 기본 심성을 한마디로 정리 하라시면
'두려움'이었다.

매사 두려웠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망신 당할까 두려웠고
그리하여 버림 받을 것도 두려웠고
결국 그 분들,
내가 그리도 갈망하면서도
그리 그들의 벗어나려 애쓰던
내 원가족의 거짓 예언대로 되 버릴까 그토록 두려웠다.
그래서, 그냥 포기했었다.
그냥 주저 앉아 아무 것도 못하였었다 .

주님께서 내 인생 37살에 임하셔서
그토록 강하게 인도하셔서
그 사랑과 약속의 힘으로 겨우겨우 힘을 내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도 내 안에는
두려움이 날 완전히 놓아주고있지는 않다.

위의 공포에 해당하여 늘어 놓은 모든 것들에 해당하는 혼란들이
그래서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뚜렷하고 절절히 그 분의 임재와 권능을 경험하였음에도
그리고 말씀으로 매일 인도 받으면서
그 분의 원하심과
그 분 앞에 온전히 섬의 어떠함을 알면서도
아직도 주춤주춤
모세 뒤에 숨어 곁눈질로 바라보는 백성들 같이
온전히 주님 앞에 서 있지 못함이다.

말씀을 들여다 보면서
잠시 묵상을 하면서
내 속에
아직도 주님 앞에 온전히 나가지 못하게 하는
괜한 두려움 (그렇다.. 이제는 벗어 날수 있을 것 같이 손에 붙잡히는 두려움들, 정체가 드러나는 두려움들이다... 괜한 공포)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께서 그러신다.
이제 내려 놓을 것은 내려 놓자.
이유없는 자책.
이유가 뚜렷한 미움과 원망.
그로 인하여 되풀이 되는 거짓 공포.
이제 십수년 있으면 다 내려 놓고 '赤身(naked body,적신)'으로 돌아가야할 본향이
바로 저기에 뚜렷이 서 있는데
나는 안돼,
너도 안돼.........라는 모든 버걱 거림들을
주 앞에 내려 놓고
모세님 처럼
흑암 안에도 계신
그것을 우리의 선을 이유로 허락하셨음을
담대히 믿고 나갈 수 있도록 하라 신다.
감사하다.


주님.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통해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삶의 지표를 받아
정말
아무 생각,
정확히는 아무런 혼란케하는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매일 매일 살다가
주님 부르실 그날에
온전케 두손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살고는 있지만
수없이 많은 하루 동안의 유혹과
제 안의 멍한 두려움으로 인한 도피,
그리고 그 안에 왜곡되어 좌절케 하는
과거의 흔적들이 남아
마치
오늘 묵상에
모세님의 뒤에 숨어
그토록 경외하고 감사해 하기는 하지만
공포감으로 미적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처럼
꼭 그대로의 모습을 제가 가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그 안에 가장 강한 것이..
남들과는 다른
아.. 성경과 세상의 보편적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제게 있어
그것이 드러날까 두렵고
그를 통하여 주께 받은 인정과 깨달음이 틀린 것이라 확인 받을까
그게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주여.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죄를 다 품으시며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고
가장 선한 것을 이루시며
사랑의 극치이심을 앎에도
제 안에
아직도 그리 강한 확신 , 아.. 망상이 남아 있어
그게
주님 앞에 주춤거리고
제대로 나가지 못하며
모세님으로 대표되는 그 어떤 가리움뒤에 ,
어쩌면 흉내, 장님의 지팡이 같은
그 어떤 뒤에 숨어 있는 삶이 제 삶인 듯하였습니다.

오..
주님.
이제.. 더 적나라히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흑암이 있지만
어두움이 있고
앞을 모르게 하는 그 어떤 것이 있을 것 같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역시 계시는
편재의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의 망설임이 없이 나가시는 모세님 처럼
그런 순전한 믿음 주소서.

경외감을 주시되
공포는 없이 하소서.
온전한 두려움,
하나님 만 두려워 하는 지혜를 주시고
그를 가로막는 제 안의 '죄'를 가라앉히소서.

이전에 기도하여 들어 주신
제 인생 내내 홀로 할수 없었지만
기도하고 난 후 어느새 흔적도 없어졌던
그러한 하나님의 하신 간증들로
또 저를 채우소서.

주님 홀로 영광받으시옵소서.
이 아침을 주님께드립니다.

감사하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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