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간증문2 본문
그 이유는 너무 뚜렷합니다.
평생을 지배하고 있던 불안 ,외로움, 두려움에서 예수님 영접하는 첫사랑의 그 순간 일거에 나를 기쁨으로 사로 잡으시는 수개월을 경험하게 하셨고, 그 후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시어 내 인생의 기조를 '허무함'에서 확실한 소망으로 바꾸어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고향은 충남 예산으로 아버님은 '경찰 공무원'이시며 7남매의 장남으로 자수성가의 표본이십니다.
반면, 어머님은 막내로 독실한 불교 신자이셨습니다.
위로는 키나 성적 등 여러 면에서 저보다는 조금은 떨어지시는 '형님'이 한분 계시고
저보다 밑으로 여동생 하나가 있습니다.
전 어려서 부터 거의 1등을 놓치지 않는 편이었고 웅변이나 노래 ,심지어는 학교에서 힘쓰는 일로도 뒤쳐지지는 않는 편이었습니다.
가족은 유전적으로 다혈질에 속하는 편이었습니다.
교육열이 높으셨던 아버지의 결정으로 중학교 3군데 , 고등학교 2군데를 전학다녀야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은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가족의 구성 상 심리학적 역동으로 둘째인 저는 감정적 '쓰레기통(아... 심리학적 표현 ㅎ )'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데다가 너무 잦은 전학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에도, 학업에 따라가기도 힘들었으며,
그러한 어려움을 풀어줄 곳은 어디에도 없는 듯 했습니다.
이때 나의 마음은 '대인공포증'이란 어려움으로 삶의 전분야에 어두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의대에 진학하게되었지만 장래에 대한 목표는 없고 그냥, 의사가되어 적당한 정도의 수입만 유지하며 살다가 죽으면 모든 고통과 머리속 혼란이 끝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일반 대학으로 치면 3학년인 본과 1학년이 되어 ' 해부실습' 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한 조 6명 정도의 학생에 시신 한구가 배정이 되었는데 우리 조에 배정된 시신은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비록 '포르말린'에 쩔어있는 육신었지만 아름다왔을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밀랍인형'과 다름없는 느낌이었습니다.
불현듯 난 깨달았습니다.
"저 여인이 살아 있었을 때 누렸을 그 수많은 사연은 다 어디가고 지금 이렇게 밀랍 인형같은 모습으로 있단 말인가? "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차이는 영혼이라고..
그렇다면 당연히도 '신'은 있을 것임도 확신하게 되었지만 그 신은 예수님은 아닐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어릴적, 권사 가정이셨던 내 이웃의 친구 어머니께서 보이신 상당히 부정적 기독교인의 모습이 나에게 그런 깊은 확신을 주었던 것입니다.
어쨋든, 그때 난 인생을 '신이 보내준 휴가지'로 정의 하게 되었고 ,
이 휴가지인 인생에서 가능하면 죄되지 않는 모든 말초적 재미를 누리다가리라는 결심으로 틈날 때마다 '당구', ' 포카', '게임', '무협지' , ..등에 매달렸고
그러한 추구는 기왕에 '상처' 있는 자들이 그렇듯 '중독적 성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되고 '산부인과'를 전공하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군대를 갔다와서 취직해도
그러한 '허무한 삶'의 태도에는 별 변화가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환우 분들에게는 인기가 많아서 가는 곳마다 금방 환자가 몰려 들었고
그것은 내 교만을 자극하게 되었기에
덜컥 아무 연고지도 없는 '안양 충훈부'에 개원해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제 고난이 가중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수입은 월급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워낙 적게 시작한 의원이라서 생각보다는
그리 수입은 많이 늘지 않았었습니다.
거기에다 학교다닐 때 한단계아래로 생각했던 동기들의 선전(善戰) 소식이 들릴 때마다
마음은 질투와 좌절로 까맣게 타들어 갔습니다.
오직 금전적인 수치 만이 내 성공의 지표로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던 '불신자' 의사의 머리로는
도저히 감당히 되지 않는 혼란이었습니다 .
내 신세가 처참했습니다.
체질 상 술은 하지 못하고, 하루 두갑 이상으로 급속도록 흡연이 늘어만 갔습니다.
혈압은 올라가서 200/140 이상 될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얼굴은 늘 발개져 있고 마치 물속에 들어가 있는 듯, 누가 목을 조이는 듯 머리가 멍하여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유일한 탈출구는 '담배'피는 시간 뿐인 듯 진료 한분하고는 얼른 위층의 화장실로 가서 한대 피우고는 또.... 힘들어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병원에서 분만한 산모의 아기가 기형적으로 생겼고 호흡곤란이 있어서 지금의 메트로 병원 산부인과 신생아실에 아기를 옮겨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나중에야 아이가 산모님의 알콜중독에 의한 '기형'인 줄 알게 되었지만 그동안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불면증'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어릴 때 다니다만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된 것입니다.
병원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아주 적은 개척교회에 그날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 강력한 강골 불신자였습니다.
핍박을 강하게 했습니다.
아내는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기분이 좋을 땐 ' 오늘은 목사님이 이런 말씀하셨어요.. ' 라 하며 조금씩 예수님에 대한 경계를 허무는 작전을 썼습니다.
새벽까지 잠 못자고 소파에서 감시하는 나의 눈을 피하며 수영 가는 척하며 새벽교회를 나가기 도 했습니다.
나는 어느새 담배 피우면서 이리 외치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정말 당신이 살아계시면 나 담배 끊게 해주세요. 그럼 믿겠습니다.'
아마 그 홀로의 외침을 들으셨던 모양입니다.
아내가 교회나간 3년 째,1997년 내가 38살 되던 해에 예수님은 드디어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랬습니다.
전 아들과 아내의 간청으로 해마다 크리스마스 날 만큼은 교회에 나가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크리스마스날은 아내와의 다툼을 빌미로 교회에 안 나가 버렸습니다.
1997.12.28 주일 아내는 ' 예배'에 한번 나가주길 간청했으나 망설이고 있던 저에게
초등학교 5학년이던 당시의 큰아들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아빠 교회 같이가요 ..우리는 천국갈건데 아빠는 지옥가면 어떻게 해요? " 하는게 아닙니까?
아이의 말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주일 예배에 따라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우리 병원 10미터 맞은편 반 지하였고 교인은 20명이 채 안되는 아주 적은 곳이었습니다.
아내가 앉은 의자 뒤편에 조용히 들어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참 희한했습니다.
옷이 벗겨진 듯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는게 아니겠습니까?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자 마자 내 눈에는 닭똥같은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 내리게 되었습니다.
설교는 날 위로하시는 내용이 아니시고 목사님께서는 그렇게 달변도 아니셨습니다.
정말 슬프지도 감동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 줄줄 울고 있었습니다.
이상하였습니다.
내가 왜이러지 하면서도 내 눈에서는 지금까지 흘려본 눈물 중 가장 크기가 굵은 것이 쉬지않고 연결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난 그런 내 눈물을 마치 관객이 지켜 보는 듯'객관적으로 ' 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 였습니다.
그러나 , 아주 통쾌했습니다.
내 가슴은 뻥 뚫어짐을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날아갈 것 만 같았습니다. 진정으로 고백하건데 '불면증'은 그날로 사라졌습니다.
10시만 되면 잠이 오기 시작하며 건강한 졸음이 쏟아져 견딜 수 가 없었습니다.
아내와의 대화의 시간이 길어지고 폭이 넓어졌습니다.
결혼하고 10년 동안 한 이야기보다 더 많은 대화를 그때 이후 수개월간 했습니다.
이야기 하다가 '하나님'...소리만 나오면 난 말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려서요.
흡연은 교회에 나가고도 계속이 되었으나 3년째 되는 날 끊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표현대로 끊겨 버린게 맞습니다.
담배 욕구가 생기려할 때마다 가슴 속에서 큰 손이 가슴부위에서 내려 와 배까지 꾹 누르는 듯 하며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가 꿀꺽하고 삼켜 지는 듯한 느낌이 너무도 선명히 나면서
그게 일주일 이상 되풀이 되더니 자연스레이 흡연욕구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전에도 수 차례나 금연을 시도해보았으나 그때마다 덜덜 떨리고 안절부절 못하게 하여 결국 실패하게 만들던 그런 금단 증상이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 11년째 잊어 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난 의사입니다.
의사는 증상을 가지고 각종 진단을 의심(의증)합니다.
거기에 맞추어 각종 진찰을 행하고 검사를 통하여 증거를 찾아내고 진단을 붙힌 후 치료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경과를 챙겨 본후에 예상했던 것이 '예후'에 맞아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자들입니다.
불면증이 하루에 고쳐지고 나도 모르는 저런 감정 반응이나 금단 증상이 없는 금연 등은 수십년 동안 훈련받아왔던 과학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기적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던 기적이 내 삶속에서 버젓이 일어났습니다.
전 깨달았습니다.
확신했습니다.
"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
그렇습니다.
' 내',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확실히 살아계십니다.
그렇기에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저렇게도 확실하게 나에 맞는 방법으로 역사하신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분이기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이십니다.
만일 제 과학적 사고의 이해 안에 계신 분이셨다면
그게 제 심리적 갈구에 의한 착각이지 어찌 하나님의 역사이시겠습니까?
십 수년전 본과 1학년 때 깨달은 나의 유신론 속의 창조주가 바로 하나님이심이 확신되던 때였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기쁜 분이셨는 지 저는 정말 이전의 제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걍렬한 체험이 수개월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첫사랑의 체험에 전 둥둥 떠 다니는 듯했습니다.
예수님 영접하고 얼마 안있어 병원을 타지역으로 확장 이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의료사고.
수개월간의 바닥에 떨어진 듯한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겨우 마음을 정리하고 일어난 저희는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기 위하여 한번 더 이전해야 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에서 크게 역사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전까지는 큰 죄책감없이 시도했던 '임신중절(낙태)시술'이 싫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산부인과는 '출산'을 돕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병원의 유지를 위해서는 낙태시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지금인 2022년대 보다는 훨씬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ㅎ )
임신 주수가 커질 수록 아주 많은 수입이 보장되기에 낙태시술은 산부인과의사들에게 많은 유혹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 불신자 시절 부터 나름 초기 임신이 아니면 돌려 보내곤 했던 저 였지만 그때부터는 낙태를 생각하면, 갑자기 토할 것 같은 역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한계로 잡았던 것보다 한달 적은 주수가 아니면 안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런 결심을 아내에게 일방통보했습니다.
고백했듯이 그러한 결심은 '수입의 급감'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병원의 '존폐'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제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전혀 반대가 없이 동의 했습니다.
그러자, 사단의 방해가 시작이 되는 듯했습니다.
그 후에도 수개월 간 몇 번의 그러한 결심을 거쳐 더불어 결국 낙태를 안하기로 결심할 때마다
정확히 그 임신 주수의 환우분들께서 낙태를 하겠다고 동시에 몇분씩이나 내원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마치 '네가 이래도 안하는가' 하면서 시험하는 듯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걱정과는 달리 한달의 마지막 날 직원들 월급을 제하고도 병원은 근근히 유지가 되어갔습니다.
우리의 수입 마져 엘리야의 까마귀 밥처럼 유지 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혀 예정에 잡혀 있지 않던 분만환자들의 몰려듦과 성형수술 증가 등으로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도 채워 주셨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고 꼭 그만큼...
2001년 11월. 장래에 대하여고민하던 저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과정을 다시 밟기로 결심했습니다.
40대 초반의 남자의사를 받아 주는 병원이 있는 지 수소문하게 되었습니다.
집이 있던 안양에 가까운 곳에서 부터 알아보기 시작하자 마자 생각지도 안했던 '안양병원'이 금방 물망에 올랐습니다.
진료부장과 통화했습니다.
긍정적인 답을 받았습니다.
대신 병원에서는 조금 빨리 나와 '산부인과' 과장으로 3개월 정도 미리 근무해주는 조건 이었습니다.
산부인과 의사들의 동시 이직으로 자리가 비어 있던 게 그 이유였습니다.
그렇지만 , 그 조건은 받아 들이기 쉽지가 않았습니다.
사회경험이 일천하던 저는 M 초음파 회사 직원 뿐 아니라 건물주와의 계약 당시에 미진한 부분이 있었던것을 병원정리하는 과정에서야 알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하룻만에 수천만원에 이르는 ''손해'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답은 권리금을 제대로 받는 것이지만 잘되지 않던 병원을 비우 놓고는 그것은 가능치 않은 게 현실이었습니다.
진퇴 양난의 답답함이 몰려 왔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저는 '작정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교회의 장의자에서 자면서 밤을 지새며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의 답은 빠르고 강하게 왔습니다.
병원은 비워놓고 기도 시작한지 7일 만에 계획한대로 정리가 다 되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대 격변을 겪으면서 고난을 겪었던 저는 세상의 돌아가는 양상에 귀를 닫고 있었지만,
'의약분업'이 본격적으로 논의 되면서 의사들의 불만을 달래주는 조건으로
개원가에 특혜를 베풀면서 봉직의로 근무하던 의사들이 개원 러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안양 병원 산부인과는 '낙태시술'을 시행하지 않는 아주 드문 병원이었습니다.
또한 원장님의 간곡한 권유도 있으셨기에 가정의학과 레지던트 대신 산부인과 과장으로 봉직하기로 결심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022년에 사진 복사해서 붙히고 글 조절하고 있습니다 ... 2012년...이글 쓰던 때가요.ㅎ.)
이제와 돌이켜 보면 참으로 뚜렷한 하나님의 섭리셨습니다.
절망적 상황을 거치며 결단하게 하시어 낙태를 하지 않고도 내 필생의 의업인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인생의 모습을 유지하게 하신 그 인도하심이 그랬습니다 .
거기에 그 타이밍의 극적임이 너무 놀라왔습니다.
또한 모든 분야에서 쉬운 일이 없지만 지금의 산부인과 의사들의 어려움은 더욱 극심하여져 가고 있고 특별히 개원가는 봉직의의 입장과는 완전히 바뀌어 버린 상전벽해의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돌아보면 주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려 노력했던 저를 불쌍히 여기셨던 하나님의 사랑이라 확실히 깨달아집니다.
그 감사함은 매일 찬양과 기도로 표현해도 부족할 것만 같습니다.
주님은 기쁨이십니다. 감동이십니다.
자리를 옮긴 봉직 생활은 그리 쉽지 만은 않했습니다.
우선 남자 산부인과 의사 , 그중에서도 중년의 남자 산부인과 의사는 여성 환우 들에게는 그리 인기있지 못합니다.
새로 영입된 젊은 여자 의사 분들과 병원 기여도 면에서 어처구니 없는 차이가 났습니다.
더구나 10년 가까이 개원가에 있다가 나오니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나오는 젊은 의사들에 비하여 경쟁이 되지 못했습니다.
' 과학 기술'은 의술에도 대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우리 세대에는 보지도 못하던 '복강경'이란 도구가 대중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학문의 내용적인면에서도 '유전학' , ' 불임' , 면역학등 너무도 많은 분야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환자 진료에 당연히도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의사로서 장래에 대한 그리 장밋빛이 아닌 상태에서 아이들은 커가고, 하루하루 지내기가 그리 쉽지 만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저는 그 상태를 탈피해보고자 많은 인간적 노력을 했습니다.
산부인과 타이틀을 내려놓고 몇년 더 공부하여 '통증'과로 해볼까, 일반 과로 감기나 진료하면서 시골에서 새로 개원할까 아니면 미국의사 시험 보아 미국이민할까 이곳 저곳 많이 찾아 다녔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는지 어디에도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희망이 없는 듯한 하루하루. 황금빛 장래가 무너진 듯한 시간들이 수년간 이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아... 가슴이 아프네요.. 그 때 생각하니... 믿음 부족하여 주님께 모든 것 더 맡기지도 못하고... 2022년 주하인 왈 ㅜ.ㅜ;;)
한편, 안양 병원은 선교 병원으로 정체성을 바꾸면서 곳곳에서 선교사를 지향하는 의사들이 속속 영입되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넘쳤습니다.
많은 훌륭한 목사님들이 초빙이 되고 예배가 자주 베풀어 졌습니다.
군소 교단의 교회에서 38살이 되어서야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저에게는 아주 신선한 영적 충격들이 매일 이어졌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저를 감동 시킨 것은 ' 큐티'를 통한 말씀 묵상이었습니다.
또한 아무 부족할 것 없을 것 같은 젊은 '누가'회 출신 의사 분들의 주저없는 선교사로서의 헌신을 결단 함이 었고 또한 그들의 감사하는 모습과 영적인 차분함은 나이에 불문하고 모두 존경할 만한 영적 모델들이었습니다.
아침 마다 직원들 중 상당 수가 9층 강당에 모여서 조를 이루어 감동하며 말씀 묵상을 나누었던 경험은 10년이 넘어 지난 지금에도 아주 귀한 영적 자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낮아지는 수 년간의 시간동안 '말씀 묵상'을 매일 같이 시키셨고, 저는 그 기쁨을 매일 같이 블로그 ( 다음의발칙한 큐티 블로그)에 올리게 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블로그는 제가 찍은 사진으로 채워지게 되게 되었고
거기에 묵상 시가 접목되도록 인도하셨으며
그것을 현상하여 제 진료실에 걸어놓게 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사진들은 어떤 환우 분들이나 보호자들, 또한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여러 분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 묵상을 통하여 제 생각도 많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내적인 정화. 말씀을 통합 통합적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제 속을 흐르는 기쁨의 기조는 점차로 진폭이 적어지며 지속적이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목표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조금씩 더 뚜렷이 깨달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즈음 병원에서는 목요일 마다 환우분들을 대상으로 전인치유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땅에서 보이신 치유사역의 모델로서 육적 심리적 치료와 더불어 찬양과 예배를 겸한 영적치료를 통한 영육혼의 '통합적 치료'를 전인치유의 개념이었습니다.
우연히도 찬양 인도자로서 세움을 받았습니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일단 가외 시간을 투자하여야 했고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돕는 분들이 적었기에 힘들고 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인내했습니다.
참여하지 않는 시간은 때로는 홀로 '음향기기'를 세팅하고 보면대를 가져다 놓고 악보를 준비했습니다 .
2년 정도의 이 시간은 은혜의 시간이 맞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찬양을 통하여 '가정회복'을 ,
어떤 분들은 '건강의 회복'을 ,
또 어떤 분들은 자기 발로 교회를 나가겠다고 고백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수년간 전혀 진료 실적에서 바닥을 치던 제게
갑자기 '두배 ' 이상의 실적의 증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시간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저를 치유하시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박자를 맞추지도 못하던 기타를 치게 하시고 리더자로서 이곳 저곳 불려다니게도 하시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 인내의 달란트가 있음을 확인시키신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이 시기는 힘이 든 만큼 더 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던 시간이 맞았습니다.
리더 분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듯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해요.. 라는 말씀에 전 이리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 남들은 헌금하면서 예배 드리는데 전 월급 받으면서 찬양 예배까지 드리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예. 그게 정말 저의 진정한 마음이 맞았습니다.
점점 내 삶의 기조는 감사함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전인적인 하나님의 치유는 심리 상태나 영적인 부분의 깨달음에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제 '진료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 복강경'을 자연스레이 시술하게 하셨습니다. 복강경이란 같은 수술을 하여도 이전에 개복을 할 수밖에 없던 것도 최소한의 상처를 내고 기구를 이용하여 하는 시술로 환자분들의 회복과 미용면에서 드라마틱한 개선을 이루는 시술로 기술적 습득이 쉽지 않을 뿐더러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술의 특성상 중년의 나이로는 새롭게 배우기는 가능치 않다는 게 대부분 의사들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는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단일 절개'라는 최첨단 방법으로 앞서나갑니다. 많은 환우 분들이 찾아 오셔서 시술 경험이 축적되게 되었습니다. 얼마전에는 ' 대학병원 교수'가 아님에도 '논문'을 써냈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정말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에는 어떤 의무조항이 없습니다. 예배 후의 선한 부담으로, 말씀 묵상하다가 , 기도하다가 혹은 불현듯 맑은 깨달음으로 다가오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루어진 결과들입니다.
이제 기회가 되어 잠시 제 간증을 쓰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제 인생을 통하여 역사하시던 하나님의 손길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했던 그 어려운 인생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둠속에 비치는 빛'이 더욱 찬란하고 뚜렷한 것과 같이 '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정말 뚜렷이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어찌 표현하기 힘든 '전율의 감동'이셨고 환희의 '기쁨'이셨습니다. 그 기쁨이 기억이 너무 놀라와 첫사랑의 감격이 약해졌을 때에도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 몸부림을 쳤고 그런 나의 심사를 뚫고 말씀하신 세미한 음성을 통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얻어지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기쁨을 에너지 삼아 넘어지고 일어나며 또 넘어지고 일어나서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도 계획한 바 없고 수행할 능력이 없었찌만 그 분은 말씀 묵상과 내 가진 달란트를 내려 놓음을 통하여 하나하나 '삶'의 방편까지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을 저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확고 부동한 삶의 목표' 입니다. '삶의 의미의 깨달음'입니다. 인생은 제 본과 1학년 때 오인했던 잠시 휴가 나온 자의 여행과정이 아니고, '천국시민'으로 영생을 살자로서의 '성화'되어가는 '연단'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불가운데서 잘 연단하여 제련 받으면 정금으로 나오는 자가 된다는 것. 사람마다 달란트와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있는 삶의 장소에서 매일 말씀 묵상을 통해, 예배를 통해 주어진 뜻에 맞추어 살도록 노력하는 과정으로 생각이 되었고 때로는 '선교의 현장에서', 때로는 있는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려 노력하기도, 때로는 찬양자로서, 때로는 그것이 아니어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주님 모습을 닮아 변해가는 자로 서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면되었습니다. 환우 분들에게 틈만 나면 전도의 말을 전하려 애를 씁니다. 내 가진 기쁨을 달란트를 통해 나누길 주저 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묵상시화 사진을 통해 관심을 가지는 분들을 에게 설명하며 말씀을 전합니다. 수술대 위에서 불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합니다. 마취해놓고는 간호사들과 보조자들 듣도록 크게 소리내어 기도한 후 수술을 시작합니다. 아직도 순간 순간 올라오는 부정적 소리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으려 애를 씁니다. 주님 앞에 죄를 지을 때는 얼른 회개하려 애를씁니다. 그분의 허락하신 기쁨이 사라질까 두려워서 입니다 . ... 그리고 ,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을 만난 제 기쁨을 남에게 좀더 드래내어 알리기위해 '하기오스' 성가대에 섭니다. 아버지 학교 특송의 자리에도 갑니다.
( 최근 저희 부모님과 형제 모두 예수님 영접하셨습니다. )
아직 전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솔직히 여러 내적인 터부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세상에 더욱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저의 내면에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려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때가 되어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세상을 향해 더 뚜렷이 나갈 수 있을 것도 기대합니다.
부탁의 글을 첨언합니다. )
목사님께 드리는 글 (간증 발표하라심에 대하여.. )
오십셋의 나이를 몇줄로 간추리자니 쉽지는 않았습니다.
너무 긴글이 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돕니다만 그만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많으셨음을 이해하시고 읽어주시었음을 믿습니다.
사이사이에 고백했지만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심리적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사회 공포증으로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제 간증은 분명코 저와 어떤 분들에게는 너무도 놀라운 일이 될 것이라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 제 자식들과 젊은이들의 사이, 저와 일어날 어떤 심리적 역동을 가지신 분들에게는 부딪침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많습니다.
예.
걱정이 많은게 어쩌면 저 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담임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쓰기는 했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발표되는 것은 '가능하면' 막아주셨으면 하는게 저의 간곡한 바램입니다.
단, 영적인 판단은 목사님께 맡깁니다.
참조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2. 09. 11 김병창 집사 배상
'주변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혈복강에서 회복된 다낭성 난소환자 (0) | 2020.11.25 |
---|---|
복 나누기 (0) | 2013.09.24 |
여기까지 인도하셨으니 (0) | 2010.07.25 |
눈오는 밤 갈멜산 기도원 (0) | 2010.03.18 |
내 안의 요동 (0) | 2010.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