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지금껏 그러셨으니( 딤전 5:1 -16 ) 본문
제 5 장 ( Chapter 5, 1 Timothy )
작년에
찍은 사진.
당직 방 컴에 사진 모아놓은 것 없어서
작년 양화진 사진 걸어 놓았네요.
주님의 말씀은
고리타분한 것 같아도
그 말씀안에 침잠하여
말씀으로 영혼이 평강을 누리게 되면
그 마음은
타는 듯한 붉은 紅心으로
행복하고
절절히 기뻐진답니다.
오늘 묵상이
조금은 고리 타분한 듯해도
준행하면
놀라운 은혜가
영혼에 임하게 될 줄은...
전 안답니다.
그 기쁨
같이 누리시지요.
저로 더 크게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한 번 부탁합니다.
생각 나시면요.
샬롬
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다.
주님의 말씀대로 행함은
평강을 보장하시니...
그래서
연세드신 분들에게 '꾸짖지 않고 권하는 '말로
"이거 어떠시겠습니까?"
" 이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네요..."
젊은이들에게는
"자네 이렇게 하면 어떻겠나?"
" 얘..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하고
2.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연세드신
환자 분들- 특별히 나는 산부인과라 연세드신 여자 분들이 많다.ㅎ-에게
아주 다정히
손 잡고 등두리며 '어머니'처럼 대해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젊은 여자 분들에겐
하등의 잡생각 - 음탕한 ^^ ;;;- 하지 않고
그냥
일절
깨끗하게 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새는
환자 분들에게
정말 인기가 좋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 바빠졌다.
전인치유 무대에서
말씀대로 이끌림 받으며
조금은 주님께 붙들린채
반 강제적으로 -^^;;;- 준행한 탓이리라.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게
노인 환자 분들의 손을 잡고
그 분들에게 스킨 십을 하게 되고
조금은 장난 어린 대화를 하고
젊은 환자들을 쳐다볼 때
훨씬 맑은 눈으로
농담- 잘한다.. 최소한 환자 분들에게는 .ㅎㅎ - 툭툭 건네며
그들을 가까이 대하는 탓이
많이 작용한 것 같다.
그것은
예수님 믿고
말씀으로 다져지면서
본의 아니게 행실로 표출하는 적용을 하다보니
나름대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조금씩 채워지기 때문이리라.
죄송한 이야기지만
개인 병원 원장 자리를 내려놓고 - 강한 자의식이 믿음 초기에 작용한 결과도 있어서
믿는 자로서 낙태를 안하려는 이유가 첫번째 폐업의 이유였다. - 현 병원의 과장으로
내려 앉게 되자
많은 혼란이 있었다.
폐업은 외적인 이유였다.
참으로 열심히 열심히 살았지만
그러나, 늘 나를 누르는 생각은
인정받고자 하는 허덕임이었고
그것은 역기능 가정의 폐해였다.
'사랑 받지 못했었음'이 늘 알지 못하는 내 무의식 속에
허전함으로 자리했었고
내 행동 동기의 거의 대부분은
'인정받아야 함'의 강박적 욕구 탓이 었다.
그것을
최선을 다하는 정직한 모습으로
인정받고 사랑 받아 보려는 시도로
다람쥐 쳇바퀴돌듯했지만
그들 부모님 들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의 분들이 아니었고
형제들 역시 마찬 가지였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며
중년을 들어서는 내 육신과 영혼은
피곤과 허전함과 답답함으로
늘 외로웠었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빈마음이 드라마틱하게 기쁨으로 바뀌는
첫사랑의 체험을 하였으나
수십년을 되풀이 해왔던
그 눌린 허전함과 상대적인 원망은
열심히 살던 내 인생의
예기치 못했던 순간순간에 폭팔 하듯이
나오기도 했다.
착하지만 순하지는 않던 '주하인의 과거' .. 월하랑.
노인들에게
형식적으로 잘하여
예의 바른 듯하고
가족이나 이웃에게도 선을 긋고
번듯하게 있지만
절친한 상대가 별로 없었던..
실은 해야한다는 사랑의 의무는 있지만
방법을 몰라 행하지 못하고
특히 예수님 영접하고
성경에
마치 '도덕책'처럼 나오는
오늘과 같은 '효'와 '이웃에 대하여 잘하라'는 얘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는 분노와
알지 못하는 좌절감으로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야.. 성경은 자유지 어디 도덕책인가.. 라는
자위를 가지고 얼른 넘어가며
일상에서
주님의 그 사랑의 향기를 들어낼 엄두조차
못했던 것이 나다.
환자 분들 중에
부모님 연배들께서
아프다고 호소하며
도움을 청하는 오랜 잔소리 -ㅎㅎ 최소한 한동안 그랬다. 망한 병원의 원장일때는.ㅎ - 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속상함이 올라왔었다.
누구도 느끼지 못하겠는가?
수년 간을 그렇게
난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들여다보는 묵상의 구절이
훨씬 편해졌음을 느낀다.
그러나,
아비처럼
형제처럼
어미처럼.. 이라는 구절은
'어떻게 해야지..'하는 생각이 든다.
수십년을 '원망'을 선택하고
살아왔던 탓인가..
막연하기는 하다.
그러면서
'용서'
특히 의미있는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어찌하여 중요한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그 분들...
특별히 어린 시절에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가까운 분들의 '사랑'이
그리고
그 분들의 사랑주지 못함에 대하여
'원망'이던 '용서와 포용'이던 간에
자신의 선택을 어찌하는 가의 상관관계 속에서
인생의 질이 결정됨을 다시 한번 되뇌이게 된다.
분명코
난 그 분들의 사랑을 그리도 간구하면서
되풀이되는 상처로 인하여
그 분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함으로
늘 가슴이 허전하고
삶이 무거웠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사랑이
말씀을 통하여
서서히 가슴에 들어오고
내 영혼의 사랑의 탱크가
성령으로 채워짐으로 인하여
나는 '노인'들에게
비록 아비와 어미에 대하는 정도는 못하지만
훨씬 사랑스러운 몸짓을 보낼 수가 있게 되었고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도
훨씬 깨끗한 -온전히는 아니지만 ㅎㅎ - 마음으로 쳐다볼 수 있게 되어 가는 중이다.
그게
현실에 나타나 '환자 분들의 칭찬과 내원 환자 수의 증가'로 조금은 반영되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부모님에 대한 이해와 사랑과 용서가 필요하다.
비록
그 분들에 대하여 원망은 거의 없어져 가지만
조금은 더 살가운 관계를
내가 먼저 베풀고
아직도 현실에 남아 있는 '버거운 비판'이
온전한 용서로 회복되어야 하겠다.
그것이
주님 말씀 앞에 섬으로
지금까지 날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평강과 사랑하심을
앞으로 더욱 크게 확장시켜
내가 알지 못하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빠르고 크게 이끌어 내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는 길이라 생각이 된다.
용서는
그냥 내가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냥 주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아무렇지 않은 상태가 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한걸음 더나가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애뜻한 마음이 생기면 더없이 좋겠다.
오늘 묵상은
그 마음까지 말씀하시는 듯하다.
용서는
그 분들이 용서하시고 안하시고는
별의미가 없는 개념이란다.
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일락.
하루의 낙.
주님의 말씀의 기쁨을 모를 때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쳇팅,
당구,
영화.........여러 곳에
마음을 빼앗겼었다.
그러고 나면 더욱 허전했었다.
일락..
그 표현은
위의 거론한 여러 취미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영혼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하여
반발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하루의 쾌락에 빠져 들어가는
중독적 성향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비록 중독은 아닐 지언정
주님의 말씀에 걸림돌이 되는
육신적 쾌락의 추구를 일컫는 듯하다.
일락을 추구함은
살아 있고
역동적인 듯하지만
그것은 죽어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
하루를 죽이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유를 대더라도
자신의 것 만을 추구하는 것은
일락을 좇는 것이다.
'가족의 건강'을 이유로 들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과도한 촛불시위하고
폭력을 불사하는 것도
역시 '일락'을 좇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어제그제 묵상에도 나오듯이
올바른 신앙의 모습은
그것 마져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만드신 것은 선하신 것이니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 짐'을 믿고
대승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것인 듯하다.
개인적 생각이다.
어쨋든
오늘
주일은
주님께 뵙기에
일락을 추구하지 않는 하루가 되길 소원한다.
살았지만 죽지 않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
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가끔은
홀가분히 도망가버렸으면 하는 충동이 많이 든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삶.
특별히 내 자식 만큼은 공부 잘 하고
나보다는 훨씬 건강한 삶을 살고
주님 안에서 누리는 영적 축복을 크게 누리며
남들에게 도움 주는 자로 성장하기를
얼마나 꿈꾸었는가?
현실을 돌아보면
그래.. 비교하면 아직은 신앙안에서
다른 아이들의 타락보다는
훨씬 중심이 잡혀있는 아이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더 위에 바램대로 되었으면 하는 데
많이 미치지 못함이
속이 상하려 한다.
엉뚱한 일이 발생하고
집안 분위기가 썰렁하면
더욱
주님께 기도만 하고
다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들때가 없지 않다.
내 뜻대로 시키기 위하여
직접 치리하려다가
아이들 어렸을 때
얼마나 서로 상처를 입고 입혔던가?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나에게 투영이 되고
아이들의 아파하는 모습이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난 이중 삼중으로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마음을 아시는지
가족을 돌아보지 않으면
믿음을 배반한 자라고 단언적으로 말씀하신다.
역시
처음에 쓴대로
당위성과 그 면에서 훨씬 부드러워 졌지만
어찌 아버지의 역할을 현명하게 할까..
남편의 역할을 당당하게 할까..라는
각론적인 면에서는
탁 걸린다.
아..
남들처럼 고민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 ,가장 역할을 포근하고 다감하게 잘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까운 분들의
자손들의 번성과 멋진 모습을 뵐 때
부럽기가 한량없다.
좌절되기도 했었었었다..ㅎ
하지만,
그럼에도
난 이전보다는 훨씬 '희망'이
내 영혼에 소록소록 돋는다.
그래.
내 자식들은
내 내나이 되려면 아직 30년 가까이 들 남아 있다.
나도 주님 안에서 자유로와 지는데
그들도 그렇겠지.
88만원세대니..
공부 못한 자들의 말로니.. 아무리 어두운 예측이 있어도
주님이 인도하시면
내 암담한
늘상의 예측에도
그리 들어 맞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오게 해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을
나보다는 훨씬 더
주님 안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고 성공하는
귀한 자들로 이끌어 주실 거야...라는
생각이 조금씩 조금씩 커진다.
적용
1. 전화드리겠다.
장모님.
부모님
2. 아들들을 위해 기도한다.
나의 현명한 아버지 역할 위해 기도한다.
3. 성경여섯장 읽겠다.
4. 권하는 말을 하겠다.
특별히 연세 드신 분들에게 그리하겠다.
5. 집 앞 , 공터에서 떠드는 학생들에게
좀더 자애롭게 대화하겠다.
기도
주님..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
저에게
관계 속에서의 여유로운 처신입니다.
그럼에도
돌아보면
예전보다는
훨씬 더 주님 안에서 성장하였음을 느낍니다.
지금껏 그러셨으니
앞으로 더욱 더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게 비단 저 뿐 아니라
내 가족
내 주위
내 아는 모든 분들과
심지어는
지구상 모든 자들이
다
주님 안에서 그리하게 해주소서.
그리 깨닫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