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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납함[고후11:1-15]

주하인 2013. 4. 17. 08:03

 

 

 

 

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 I hope you will put up with a little of my foolishness; but you are already doing that.

5.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 원하건데' 하신다.

사도바울 그 분이 무엇때문에 이처럼 원하는가?

 

 '나의 좀...어리석은 것'

겸손을 넘어  어찌 약간은 비굴한 듯하기까지한 말투가 느껴지는가?

무엇이 부족하여 그 분이 그런 말을 하셔야 하는가?

그분이 진정 부족한가?

진정 비굴한가?

아니다 .

그 분은 '로마인'이기도 하며 '바리새파' 중 가말리엘 문파로 최고 지성임을

스스로 밝히기도 하지 않던가?

그러면서 5절에 말씀하시듯 '사도 들보다..조금도.. 부족함없다.'라는 표현을 보더라도

비굴은 아니다.

그렇다면 위선인가?

아니다.

그 분의 행적을 잘아는 우리는 건강한 자기 낮춤임을 잘 알고 있다.

 

오늘 ' 용납하라'  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타인에게 자신을 용납하라고 말할 자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비굴을 취해야 하지만

위에서 묵상한 대로 비굴은 아니다.

비굴은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 아니면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 외적 꾸밈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님이 그럴 이유는  없다.

그 분의 그러한 낮추심은 오직 고린도 교인의 복음화를 위함이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어

용납하라.. 라고 간구하기까지 한다.

 

이 용납함.

용납함은 두가지 측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일단 '타인'을 용납함이다.

또한 '자신'을 용납함이다.

 

고린도 교인의 입장이 되어서 '바울'님을 용납하는 것이 타인을 용납함이다.

그러나, 그 타인을 용납한다는 것이 쉬운가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본다.

걸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각난다. ㅜ.ㅜ;;

용납하기 위해서는 속의 거북한 생각들이 없어야 한다.

'용서'를 해야 한단 이야기다.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어찌 용납할까?

하지만 용납하는 것 만이 '하나님의 뜻'인 걸 어찌하는가?

내 속에 '용서하지못함'이 도사리고 있음은

강력한 '판단자'가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세상에 판단자로 오신 것이 아니시다.

오직 판단의 근거를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에 내려 놓으신 공생애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며 모든 것을 '용납하고 천국백성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신 것 뿐이다.

주님은 그리도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모범을 보이셨음에도

아직 내 안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 판단자의 '진'은 무엇인가?

용서를 못하게 하고 결국 용납을 안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온전히 들어가는 데 방해하는 ...

그래서 '용납'은 하나님의 위치에 서지 않기 위한

귀한 영적 무기이다.

용납해야 한다.

무조건 용서하고

혹여 아직도 부족한 부분,

속상함은 주님께서 판단하시고 갚으시길 기대해야 하고

나름의 교만한 판단의 근거.. 는 주님의 강력이 깨셔야 할 '사단의 진'임을 깨달아 고치시길

기도해야 한다.

 

반면, 타인에게 용납 받음의 측면이 남아 있다.

겸손해야 한다.

남에게 어찌 판단을 받겠는가?

내가 누구인데 감히.. 나를.. 한다.

나.

특별히 '자존심'이 세다.

자존감이 높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

누구든 내 아픈 부위를 건드린다 생각하면 '불끈~' 하려한다.

말씀 가운데 많이도 갈아냈지만 ^^;;,

아니 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런 부분이 남아 있다.

그래서 꼿꼿이 하늘 향해 도도히 코를 세우고 있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그것..

괜한 자존심..

약한 자존감의 반댓말이 아닌가 싶다.

아주 많은 언어 폭력 가운데 '나를 유지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내가 그러한 자존심의 틀을 세우는 지 몰라도

그것은 '용납 받기를 원하는'  겸손에는 하등 도움이 안된다.

아니다.

영적 성장의 큰 장애물이다.

어쩌면 내 안의 수 많은 영적 전투 중에도

아주 오랫동안 남아 있는 단단한 '진지' 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 안다.

사도 바울님은 내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여러 위치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의 '이룸'을 지닌 자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낮춘다..

그 분은 하나님 안에서 건강한 '자존감'을 회복하신 분이시다.

자신의 열등한 부분, 외모(대머리)와 '안질'을 세상에 고백할 용기를 가진 분이시고

그러한 열등한 부분을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결 받은 분이시다.

그리고 자신의 가진 모든 세상적 이룸을 초개와 같이 던지고

예수님 복음을 세상에 선교하는데만 걸어버린

'자존심'이라고는 세우지 못하는

진정한 자존감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 분은 오늘 자신의 '좀 부족한 부분'을 용납해달라고

저리도 당당히 세상에 외치고 계시는 것이시다.

 

그렇다.

오늘 나는 용납을 내 하루의 살아가는 근거, 즉 레마로 삼아 다니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용납하겠다.

이렇듯 부족하고 어이없는 왜곡을 가진 나를 용서하고 받아 들이겠다.

그리고 끝없이 되풀이 될 것 같이

나의 영혼을 틈나면 파고드는 용서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그들... 대상을 용서하고 용납하겠다.

내 '틀'을 깨기를 기도하겠다.

오늘 그리 살려 노력하겠다.

주님이 인도하시면 성공하게 하실 줄 믿는다.

늘.. 그러셨듯이...

 

 

 

주님.

오늘은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을 용서함으로

용납하는 것에 대하여 묵상합니다.

용서라기 보다 용납이라는 단어는 훨씬 부드럽고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이 인도하시기에 가능한 표현임을 알고

또 그리 받아 집니다.

용납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임을 압니다.

그러함을 준비하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시기에

주님께서 이리 용납하라는 명령을 하시는 줄도 믿습니다.

주여.

그래서 가볍게 생각하려 합니다 .

우선 나를 용서하고 용납하게 하소서.

제 약간의 부족함을 받아 들이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서 많은 시간 , 진정 큰 부족함들이

이제는 조금은 부족함..으로 바뀌어 감도 희망입니다.

주여.

그 나머지 나의 조금 부족함을 받아 들이게 하소서.

나를 먼저 용납하여서

부드러운 시선을 허락하소서.

세상에 대하여 용납을 하게 하소서.

그들..

나를 향해 대적했던 자들을 용납하게 하시고

그렇게 했으리라 생각했던 자들을 용납하게 하소서.

받아 들이고 인내하게 하시어

주님 안에서 성령으로 태우시게 하소서.

예수님 십자가 앞에 가지고 와서

그리스도께 모든 생각을 복종시키게 하소서.

주님.

상대들이 내 용납을 알아 채려야만 한다는

괜한 생각들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들의 반응여부와 기대되는 선한 결과 들에 대하여서도

기대를 내려 놓길 원합니다

우선 내 안에서 용납이 일어나길 원합니다.

주님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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