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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종 걸음으로도 ( 삼하3:1-16 )

주하인 2008. 9. 5. 11:55

제 3 장 ( Chapter 3, 2 Samuel )

 

 

 

출근할 때 마다 뵈는 할머니.

 

연세가 얼마나 드셨는지

걸음을 옮기시는 게

오종종 걸음으로

참 안타깝다.

그래도 열심히 운동하시고

쉬시는 품이

여유로우시다.

 

할머니의 걸음보다 느리고

오종종한 성장이지만

그래도

다윗의 집을 향해 가고 있다.

^^ *

 

 

 

 


1.  사울의 집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가니라 
6.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사울의 집

 다윗의 집

 

사울은 약해가고

다윗은 강해가고

전쟁이 있고..

 

 둘 모두 '하나님'을 믿는 자들.

그럼에도

다윗은 신실한 ,

사울은 덜 신실하고 현실 타협적인 자.

 

내 믿음 중에

적당하게 타협하고

적절하게 순응하고

그럭저럭 맞추어 가는

나 만의 변형된 '사울'같은 믿음과

 

 훨씬 더 순전하고

본질적이고

주님의 동행하심을 체험하며

일상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신앙인

다윗 같은 믿음

사이에서

늘 전쟁을 하고 있다.

 

 전쟁을 하지 않고

늘 다윗의 집 같은 모습을 유지하면 좋겠지만

그나마

고민하고 갈등하고

가끔은 넘어지지만

조금씩이나마

다윗의 집이 강해지듯

내 믿음도

엉터리 같은 부분이 제해져 간다는 게

다행이긴하다.

 고민도

전쟁도 없이

사울의 집처럼 되어가면

어찌할 뻔 했누?

 

 

 

 

  

 


12.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사자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또 가로되 당신은

      나로 더불어 언약하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13.  다윗이 가로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하려니와 내가 네게 한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사울의 편에서 실권자인

아브넬이 모욕을 받자

다윗에게 찾아와

사울을 배반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다윗은 옳다구나 하지 않는다.

'좋다 !' 한다.

시원하다.

하지만 '조건을 건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얼씨구나 하면

받아들일 조건인데

그는 다르다.

 

 다윗의 집

순전한 믿음의 표본이

다시 한번 보이고 있다.

 

 함부로 탐을 내지 않는다.

탐욕과 거리가 멀다.

 순수하고  담대하다.

하나님의 허락하신 것만 취하겠다는

기본 마음은

그로 하여금 담대하고 순수하게 보이게 한다.

 여유롭다.

서두르지 않는다.

헛된 욕심에 썩은 내 풍기며

이를 박는 이리와 같은 모습이 아니다.

탐욕에 이글거리며

아닌체 하는 이중적 모습도 아니다.

 

 

 사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동안

왜 인지도 모르고

너무 허덕 거리며

세상을 돌아볼 여유도

가까운 자들을 배려함도

날 위한 한가로움도

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었다 .

 마치

무엇인가 이루어야 만 하는데

어떤 것인 지 모르고

마구 마구

이 땅에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초조감에 밀려

안절 부절 못하며 살아 왔던 것만 같다.

열심히 경쟁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그러다가

뜻대로 안되면

가끔

깊은 나락에도 빠지고..

비단

그런 것은

불신자 시절

혈압 높고 불면증 심하던 그 시절 만은 아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그 분의 평강을 알면서도

한참을 그랬던 것 같다.

 거기에는

우리 나라라는

초유의 고속성장을 이루어낸

환경이 만들어낸 분위기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살다보니

유한함 속에서

쫓기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는

본질적 한계 때문도 원인이긴 하다.

거기에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깊은 내적인식의 오류도

한몫하고........

 그러다가

예수님을 닮아감이

인생의 목적임을 확신하면서도

방법론에서는

개인적 특질에서

많이 벗어나기 어려운게 사실이었다.

이미

오랫동안

눈 앞에 씌워져 있는

그 수많은 판단의 체계들은

믿음에도

별 다름이 아니다.

 

 내 속에는

수많은 '사울의 집'이 지어져 있었다.

그 사울의 집에서는

편하고

빠르고

눈에 보기에 좋고

내 생각에 좋고....등

'주님을 향한 기쁨'을 느끼는

조금은 특별한 성향이 아니고는

도저히

주님께서 보아주고 싶지 않은

왜곡된 신념들이

주님의 바라심을 어긋나게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난 잘 믿는 줄 착각하고 있었고..

 

 하지만

성령님을 통한 예수님의 인도는

다윗의 집을 사모하게 하도록 하시고

그 사모함은

비록 빈도가 아주 적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놀라운 평강의 기쁨으로

보상 받는 체험을 하게 하시었다.

 

 늘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서

방황하고 전쟁하는

이 모난 주하인의 영혼은

그럼에도

넘어지고 상처 입어도

자꾸만 일어나길 반복하며

아주 아주

조금씩이지만

기뻐하시는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침에 버스를 타려고

아파트 문을 나서는 순간,

위 사진에 뵈는

아주 연세가 많이 드신 할머니를 뵐 기회가 많다.

그 분은

발바닥 반 정도 되는 거리의 길이 만큼만

발을 옮기실 수 있으셔서

다가오는 출근 차량을

한참이나 기다리게 하시면서도

오종종 걸음을

아주 최선을 다해서 움직이신다.

처음에는

그 걸음으로

아침일찌기 어디 가시나 했더니

사진을 찍으면서 느꼈다.

아..

그것은 '운동'이셨구나.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를

그 할머니의

그 오종종 걸음보다도

더 천천히

그러면서도

더 꾀를 부리면서

쉬었다 가고   오랫동안 눌러 앉기도 하는 등

믿음의 성장을 늦게 하면서도

결국은

이 만큼 발걸음을 옮겨오게 되었다.

조금은 여유롭다.

조금은

다윗의 보이는

그 여유로움과 순전함과 담대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원칙이 아닌 물질에서

욕심을 덜 부릴 수 있게 되었고

비교에 덜 초조하게 되었고

모든 것이

주님이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

내 것이 됨을 알 마음도 생겼다.

아주 아주 조금이고

아주 아주 가끔이지만..ㅎㅎ

 

 

적용

 

1. 내려 놓는다.

 

2.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다.

 

3. 정말 필요한게 무엇인가

   늘 기도하며 여쭙는다.

 

4. 주님이 허락하신 것은 한다는 마음을 굳게 한다.

  두렵기도 하다.

   모든 걸 버리라는 소리가 들리는 게..

   여기가 좋사오니도 아니다.

 

5. 다윗의 집을 묵상하자.

 

6. 성경 여섯 장 읽는다.

  말씀이 내 모든 지표다.

 

7. 갈등을 너무 두려워하고 피할 것으로 생각지 말자.

   그래도 사울처럼 자기 합리화의 편안함으로 들어가지 않음이 다행이다.

 

기도

 이제

가끔씩은

산다는 것이

꼭 목표를 이루어야 만 하는 것이고

그래야 만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이 인생을 옳게 산것이라는

강박적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질 것 같다.

 

 할머니께서

조금의 거리를

운동하신 후

스쳐오는 바람 속에 앉으셔서

지친 몸을 쉬어가며

개운함을 느끼시듯

나도

아직 '다윗의 집'은 멀지만

조금씩 조금씩

내 내적인 다윗의 평화를 이루어가는

만족감에

지친 땀을 식히기도 하리라.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그 모든 평화가 가능한줄 압니다.

주님

부디

이 어리석은 자의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울 적' 생각을 내려 놓게 하시고

주님이

무엇을 시키시던 

자연스레이

기쁨 가운데 따르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모든 것

그냥 내려놓고

주님 앞에 갈

'다윗적 마음'으로

주님의 앞에

매일 설 수 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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