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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욥, 미스터 욥 ( 욥 8:3-9 )

주하인 2008. 9. 12. 10:29

 제 8 장 ( Chapter 8, Job ) 

 

 

 

노란꽃이

빨간 꽃보다

아름다운가?

 

더 커보이니

더 좋은꽃인가?

 

멀리 있어서

빨간 꽃은

노란꽃 보다

열등한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신경질 나려한다.    ^^;;;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 시켜

그 궤에 맞추려하는

어리석음이 화나려 한다.

 불쌍한 욥에게

아이들 죄까지 들이대는

그 냉엄함에 섬뜩하기도 하다.

 하나님의 원리를

다 아는 듯한

그 엉터리 같음이

짜증나려 한다.  ^^;;;

 그러면서

돌아다 보면

내 인식체계를 보는 것 같아

조금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회개해야할 문제로 생각되기도 한다.

나로 인하여 

아팠을 '미스 욥'과 '미스터 욥'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럴 듯하다.

멋지기도 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이리 찝찝한가?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더욱 그럴 듯하다.

이제 우리가 이땅에 존재하는 것이

겨우 어제인듯

지구상의 거대 공룡 들의 존재 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존재한 존재이고

그보다 훨씬 후에

겨우 몇십년을 살다 죽을

인간이 존재 뿐인..

어제 부터 있던 인간들인지라

지식이 망매한 것은 당연한 것...

거기에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은 것은 맞는 표현이다.

 

정말

어디하나 그른 것 없는 듯한

걸작의 표현이다.  

위에서 걸리지만 않았다면

참으로 그럴 듯하다.

 

 권선징악.

참 옳다.

공의라는 표현을 뵈면

참으로

그것마져 옳은 듯,

어디하나

반론을 제기할 여유마져 없는 듯하다.

 

 그러나,

권선징악을 행하는 자의 면에서 보면

시원하고 당연하고 그럴 듯하지만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디하나 저항할 의지 마져 생기지 않고

그냥

절망과 죄책감의 나락에 빠져

온몸의 힘 하나 일으켜 세우지 못할 만한

논리다.

 

 가끔

이러한 권선징악의 논리는

누구나 다 빠져 들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논리다.

죄가 있으니

벌을 받아야

힘이 없는 자들이 살아갈

시원함이 되지 않는가?

죄많은 자들이

번성해 가는

현 상황의 세상은

어찌 견디겠는가?

당연하지........

 세상에 '정의'라는 것은 없다면

이 세상이 어찌 되겠는가?

 참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런데,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모든 고통이 '죄' 탓이냐.. 다.

아니기도 하다.

그리 따지면

난 무슨 죄가 있어

그런 가족에서 태어 났다는 말인가... 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내 아들은 또..

 

 그리고

죄와 벌 사이의 상관관계다.

죄와 그에 따른 벌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인가?

시기는?

그 벌이 이 땅에서 만 유효한가?

시편 73편에

죄와 벌

권선징악 적 관점에서 당혹해 하는 시편 기자의 심리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난, 우지 무매하기가 짐승같다.

성전에 들어가다 비로소 깨달았다..'

 라는 표현들이 잘 나온다.

 

또,

인간의 바램과

하나님의 징벌 사이의 비례 관계 여부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간의 원하시는 대로

그 왂구 ('틀'의 일본어??? ) 에 들어 맞으셔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그것이야 말로

엉터리 같은 심사가 아닌가?

모든 게

다 주님의 뜻이고

징벌 조차 주님의 고유 권함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는 어떻게 벌을 받아야 하고

그리하지 않으면

속상해 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

 

 

 

오빠와

여동생.

누가 이뻐?

오빠는 울어서

잘못했나?

 

 

 

 

 

 

아가는 천사 닮았다.

그래서

천사인가?

 

모두 하나로

왁꾸에 집어 넣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아기는

아기 스러워 이쁘다.

천사가 아니라도.ㅎㅎ

 

 

 

어제

오랫 만에

아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

개울을 건너

산보를 나갔다.

 갔다가 오면서

수도적 성향의 울 교회 목사님의

'물질관'에 대하여 물어본다.

'다 버려야 할 것.. 물질'

그것이 그 분들의 소신이시다.

당혹스럽다.

그렇다면

나같은 '의사' - 평균적 연봉이 높은 계층- 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다 버리기 전에는

높은 경지의 성화에 오르기 힘들단다.

맞다.

성경에

부자 청년의 비유에

'부자는 낙타가 바늘구멍.. '얘기가 나온다.

이것 역시

권선징악과는 다르지만

같이 보는 개념이 아닌가?

 그렇다면

교회의 재정은 어떻게 하는가?

내 삶은 버리고라도........

무소유의 놀라운 해방감을

누구보다 잘아는  나로서

저러한 메시지를 접할 때 마다 

교회를 더 다녀야 하는가.. 고민할 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면서도

물질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 내 느낌이다.ㅎㅎ  - 그 분들을 뵈면서

묘한 마음이 자꾸만 든다.

 

 최근에

도둑을 맞고

생각지도 않은 '상대적 손해'를 보기도 하고

예기치 않게

놀랍도록 늘어난 내 환자 분들로 인하여

덩달아 생각지 않게 안정되어 가는

내 경제 환경을 보며

물질에 대하여 확고 부동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 주님이 허락하신 재물' 이외는

좇지 않으리라... 는 것이다.

그리도 애써도

늘 어렵기만 하더니

돈을 애써 좇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있으며

주님의 일 - 내 나름대로.. .ㅎㅎ-을 하니

그 분이 알아서 챙겨 주신다.

잃어버린 돈은

그리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적은 용돈이지만

내 쓰고 남은 돈은

가까운 자 - 주님이 주시는 영감에 따라 - 돌려 나눈다.

....

이게

권선징악적 개념

내 '자아의 의'로 꽉 막아 놓았던

물질에 대하여

나도 모르게 바뀌어 가는

내 모습이다.

 

목사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행하는 자들의

현재 상태와

그들의 영적 성장도

과연 그들이 바라는 원함이 무엇인가.. 에 따라

적용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도 그렇다.

'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우선 추구하면

 나머지는 다 이루신다 '한다

아브라함도

욥,.. 도 물질의 충분한 베푸심을 얻었다.

 하지만

12 제자 들에게는

부자 청년에게는

'물질을 버리라'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연합'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음에도

제자들에게는

'장사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고 하셨다.

'우애를 위해 오셨다.'하심에도

'형제가 형제를 고발하고... '라고도 하셨다.

사랑을 최우선으로 보심에도

하나님 보다 형제 사랑을 우선 하는 자는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고도 하셨다..

 

이러한 모든

이율 배반 적 말씀은

권선징악이나

하나의 논리에 꿰맞추고 싶어하는

이 땅의 모든

어리숙하지만

주님을 열심히 사모하는

기독교인 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원리는 이거다.

무엇하나도

주님 앞에서 옳은 자는 없다.

어느 것도

하나로 정해진 것은 없다... 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일 뿐이다.

모든 것이 주님의  장중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과 판정은

주님 만이 하실 뿐이다.

모든 말씀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어린 자는 '부드러운 음식'

어른은 '딱딱한 음식'.. 바울이 말씀하시지 않는가?

권선징악의 개념은

혹여 시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자칫 큰 우를 범할 수 잇다.

주님 위에 서는 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 놓아야 한다.

 

판단,

좌절,

흥분.... 조차도

주님의 뜻아래 내려 놓는 연습을 해야한다.

그길 만이

폭풍우 치던 감상이 가라앉고

괜한

교만과 분노와

광포와 자책과

우울과 허탈함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일단,

내려놓고

주님

성령님의 인도대로 따르면

놀라운 평강과 인도가 있게 된다.

그것은 '자유'다.

헛된 자아와

어리석은 '관습'으로 부터의 자유.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놀라운

'샬롬'의 기쁨.........

 

 

적용

 

1. 함부로 비판하지 않겠다.

 발닷의 말을 들어가며

 함부로 대했던

 함부로 비판했던

 내 모습을 회개하게 된다.

  나도 내 틀안에서 세상을 보고 있음을 잊지 않겠다.

 도우소서.   주여..

 

2.  고통과 회복.. 모두 주님의 영역이다.

 

 3. 남의 고난은 위로와 긍휼의 대상일 뿐이다.

   함부로 잘못을 읽으려 노력하지 말자.

 

4. 내 힘듦도 주님의 뜻 안에 있다.

  좌절하거나 슬플 이유가 없다.

 

5 성경 읽겠다.

  여섯 장

 

6.  주님 안에서

'난 누구인가?'   '어떤 상태인가? '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난 무엇을 원하는가?'

  ..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맡길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7. 겸손해야 한다.

 비판은 내가 그들 보다 낫다는 어리석은 교만이 출발이다.

 겸허하고

 긍휼한 자에게 탓할 자가 없다.

 

8. 무슨 평가든 '단정'하지 말자.

  어리석은 '주모'

 늘 단정에 집착한다.

 주여.. 용서하소서.

 이해와 온유가 우선이다.

 

 

기도   

 주님

발닷의 이야기가  그럴 듯합니다.

 그럼에도

다양한 생각을 줍니다.

우선

그와 비슷한 논리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그 비슷한 자를 또 누르는 논리로

다양하게 펼쳐왔던

어리석고

냉정한 판단자, 제 모습이 드러나는 듯하여

당혹스럽고

억울하고 속상하기도 하여

징죄당하던 피 비판자의 모습이 겹쳐져

당혹스럽습니다.

그가 옳은 듯하지만

꼭 옳지도 않고

그가 틀리지도 않는 이러한 혼란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고

나는 무엇을 원하고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잊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여

저를 붙드셔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시어서

주님께 맡기는

자유의 삶을 허락하소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조신한 입을 주시고

불을 뿜지 않는

부드러운 시선의 눈을 허락하소서.

주님

주님 안에서

전 자유하고 싶사오니

세속의 것으로 부터

흔들리지 않도록 하소서.

무엇보다

겸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순간순간 저도 모르게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제 입장을 정리하고 싶은

유혹이 옵니다.

더욱 낮아지게 하시고

더욱 주님 만이

제 정체성의 기본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긍휼한 마음을 주소서.

고난을 겪고 잇는 자들을

들어주게 하소서.

그들의 말에 신중을 기하게 하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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