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깨어 있어 준비할 그 날 그 때[마24:36-51] 본문
24.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 그 날과 그 때'
과거의 묵상도 이 즈음에 눈이 간다.
그렇다면
그 날과 그 때가
그 때 , 묵상했던 그 때의 그 때와 그날과
예수재림의 날을 의미하는 그날과 그때와
지금의 그 날과 그 때로
어떤 차이가 내게 있을까?
'일상'
'인생'
'지금'
'현재' 이 시점에서의
그 날과 그 때는 어떤 의미인가?
내 개인적 종말의 시점.
그에 대비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시점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지금 내 현재의 상태에서
변화없이
지속되다가 맞이할
그 날, 그 때.. 아닐런가?
그 개인적 종말의 시점이
예수님 재림 시간 혹은 성경의 종말시점보다 늦으면
문자적 그날과 그 때가 맞을 것이지만....
'그 날과 그 때'를
지금과 다름없고
현재와 변화 없는 상태로 맞이함은
정말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게다.
그 모습으로
날 위해 돌아가신 예수께서 직접 오실 때
난
어찌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ㅠ.ㅠ;;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신다.
당연히도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
나.
곤죽 박죽.
많이 정리되었다 생각하면
더 이상 진전 못하고 무너지는
내 속의 깊은 저항.
그 속절없이 무너지는
내 안의 죄악성과
그로 인하여 파생되는 여러 현상들에 대하여
더 이상은
이전처럼 무 비판, 속절없이 무너지는 행태를 되풀이 해서는 되겠는가?
의지를 발휘해서
더 집중해서라도
'깨어 있어서' 마주할 일이다.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리고
오실 예수님.
오셨던 인자 예수님이 오실 것을 대비하여
더 깨어서 더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마음이 곤죽 반죽이다.
어찌 얘기를 다할까만
분..
슬픔...
미안함..
죄송함..
그래서 '멍~함' .....
그러니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함...
그러기에 더 멍하고 곤죽............
'그 날과 그 때'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 날과 그 때란...
이러한 곤죽 반죽이 확장되고 키워지면 마주할
그 날의 그 곤란들을 암시하는 것 같아
답답하려 한다.
그러나
깨어 있어서 준비하라 시는 말씀은
그러한 곤란과 곤혹과 곤욕이
어쩌면 더 치고 나아가서
그날과 그 때가 되기전에 회복해야할
아니... 회복되어질 내 상태에 대하여
'예언적 말씀'이신 것 같아
한 편으로 힘이 나기도 한다.
그렇다.
내 속의 그러함...
슬픔은 슬픔대로 마주하고
죄스럼은 주 예수 십자가에 더 나가야 할 것을 의미하고
(주님은 그런 나를 절대로 거부치 않으신다. 이제는 안다. .. )
고통은 고통대로 주 예수께 더 의지하여 치료 받아야 할 것이며
그러지 못하는 구 습은 더 해결 받아야 할 것을 말씀 하신다.
그러기에 .. 그대로 그냥 있으면
그날과 그때에 받을 고난과 고통이 지금보다 배가가 될 것이지ㅏㅁㄴ
깨어 준비하고 있으면
날.. 그처럼.. 포기하게 만들고
내 인생을 좌지우지 곤죽 박죽으로 만들었던
근원을 마주하여 깨어낼 수 있는
온전한 기회가 되는 거란 생각 .. 든다.
감사하다.
주님.
주님은 아시오매
저.. 슬프고 아프고 복잡하고 힘듭니다.
외롭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며.......
죄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
그렇습니다.
주여.
주님.
오늘 말씀하신 바..
지금의 이대로가 그냥 커져 버리면
그게 그 날과 그 때에 마주할
큰 징벌이 될 수 있겠지만
깨어서 준비하면
이러한 것으로 부터 자유로와 질것이 예상되기도 하였습니다 .
주여.
아시오매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하소서.
주여.
가련히 여기시어 어루 만지소서.
주여.
그 고통을 아시오니
치료해주소서.
주여.
이제 지혜를 허락하사
깊은 마주함을 통해
더 이상 되풀이 되지 못하게 하시며
주여
이 고난의 인생을 주님으로 인하여
헤쳐나가 성공하게 하소서.
주님 만나뵐 때까지
더 더욱 깨어 준비하는 자 되게 하소서.
주님.. 아시지요?
주님 아시지요?
도와 주 소서.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과거 묵상들..(비교해보시고 싶으시면 읽어보세요..▼ )
1. 2010.03.18
그때와 그 날을 위해 (마 24:36-44 )
내릴 때가 되면
누를 수 있는
버스 손잡이
이제 내 속에서
요동치던
그 죄된 속성들도
이제
주님오실 그날을 위해
멈출 수 있길
간절히 원한다
이제
내게서 내리거라
이 악한 생각들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버튼 누르며 명한다
^^*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 날, 날짜
그 때 , 즈음
날과 때를 어찌 알겠는가?
소수의 어떤 사람들은
그 날과 때를 아는 듯이
비 성경적으로 날을 정해놓고
세상 일을 포기하고까지
날과 때만 기다리다가 혼쭐이 난 경험들이 있다.
그들을 ' 종말론자'들이라 한다.
그들은 열심은 있되 지혜와 주님 이끄심에 순종함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과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그 날과
그 때는 모른다.
하지만 그 날과 때는 잊지 않고
세상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주님의 때와 날을 신경을 써서 살아야 한다.
늘 주님 앞에 있는 나.
늘 주님 오실 때.
그 즈음을 신경을 쓰다보면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고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위로가 있을 것 아니던가?
즉,
'때는 늘 인식하되
날은 주님께 맡긴다'.
이것이 옳은 종말론적 삶의 태도이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노아 때도 그랬다
때를 아무리 말해도
때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고 살다가
'날'에 닥쳐서 모두 죽었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때는
깨어 있는 자에게만 해당한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그 때에 깨어 있는 자들 만이
그 날에 주의 임하심을 보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 때와 그 날.
이제 주님 오실 때가 다 되지 않았던가?
예비하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깨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 믿고
그 믿음의 시간이 늘어가며
조금씩 왜 믿는 자들이
주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가
세상의 그 발전하는 과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종교, 영이라는 영역,
미지의 영역에 점차로 더 매달리게 되는가
어쩌면 그러한 현상이 나 주하인에게도
발생하는가
매일 하루에도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또 넘어지고
며칠 간을 주님이 안계신 것 같이 살다가
다시 일어서고.....
그러다가 점차로 넘어지고 일어서는 빈도가 줄어들면서
내 영적 두다리의 힘이 생기면서
난 깨달아 갔다.
' 아 주님은 살아 계신다.
틀림없이 살아 계신다. '
그것은 너무나도 믿는 자로서 당연한 생각이지만
내 말하는 저런 표현은 생각을 넘어서는,
모태로 부터 받은 당연한 개념이 아닌
'확신'의 그것을 이야기 한다.
그것은 내 불신의 삶,
이전에 예수님을 모르면서 살아온
수십년의 삶 속에서 체득되어진
내 경험의 판단을 넘어서는
어떠한 것이 확실히 존재함을
이제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님은 내 경험되어진 습관과는
너무도 다른 현상의 것을 나에게 체험시키면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나에게 넌지시 알아듣게 하시고
그분이 임재하시면
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으로
영혼이 절절히 끓게 되는 현상들이 인식되어지고
그 인식의 시간이
팥죽 끓듯한 내 감각의 장난이라면
단지 몇회의 충동적 착각이겠지만
수도없이 되풀이 되면서
점차로 강해지고
점차로 오래되며 날 이끌어가시는 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이다.
월요일 아버지 학교의 체험을 예로 들었지만
수개월 만에 머리가 곤죽 박죽되고
실패로 깊이 좌절된 영혼을 가지고
억지로 스텝모임에 나가서
찬양의 은혜가 없으면 - 솔직히 내 감각에 뜨거움이 인식이 안되면 - 늘 찬양 자체가
막히던 경험을 넘어서서
그 분은 내 기도 부터 시작하여
찬양을 끝없이 뜨겁게 만드시고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은혜로왔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 소리가 이전 같으면
묘한 비틀림으로 인식되었을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을 일이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내 지은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은혜가
내 영혼에 잔잔히 강하게 오래 남는 체험을 하고
그 것을 통하여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 어지러운 삶의 왜곡이
그냥 견딜 만하게
마치 '그날이 감해질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 삶속에서 인식되고
진짜 주님이 오실 종말의 그날에도
이같은 든든함, 성령의 붙드심이 날 붙드셔서
견딜만도 하겠구나 하는
말씀이 하나하나 인식되어 가게 되는 현상이 나오고
그것은 또다시
내 영혼에 순작용을 일으켜
말씀 만이 살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다시 은혜가 현상에 상관없이 가중되게 되는
그런 체험을 겪게 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건너가야 할 장애물이 있다.
큰 장애물.
누구에게도 말 하지 못하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나의 인생을 크게 누르고 있는 것.
이제야 정확히 그를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개념.
이것은 나로 하여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힘이 들게 하여
가끔 가끔 나의 영혼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것 같다.
오늘 그 '날'과 그 '때'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다
그날과 그때가 올 때
난 주님을 어찌 마주할 수 있을까?
주님 구름타시고 영광 중에 오실 때
나는 과연 요새 겪고 있는 흔들림을 가지지 않고
은혜 충만할 때 하는 것처럼
두손 번쩍 들고
'주여 어서오서서'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요
이 어려운 삶을 이제 거둬 주소서' 하고 기뻐 소리칠 수 있는가?
지금 주님의 은혜가 있을 때는
가슴 한구석에서 위와 같은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날 것같은 움직임이
따사롭게 동하고 있지만
과연 내 죄악의 순간에 있던 그때에 오신다면
난 머리 콱 조아리고 눈도 들지 못하고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고 있진 않을까?
그렇다면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날과 그 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장애물.
이 장애물이 싸이클릭하게 날 잡지 않도록
이제 정결화된 영혼으로
내 영혼의 메카니즘이
'상처'의 흔적이 더 이상 작용되지 않도록 하는
그런 상황의 그 때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아니던가?
3월 중순에 오는
눈치고는
참으로 많은 양이 내렸습니다
기도원의
깊은 영성은
그 밤을
차분히 만들었지만
이로 인하여
춥고 어두운 분들이
더욱 곤란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강 가운데 거하는
주하인의
안심하며 내쉬는
기쁨의 숨결이
느껴지시는 지요^^*
어제 기도원에 갔다.
수요예배 대신
수영장에 갔다가 나오면 늦으니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은 누르고
반은 기대하는 습관이 들어가며 갔다.
눈.
참으로 많이 온다.
마음이 푸근하다.
어둡고 차가울 것이
따사롭고 분위기 있어 보임은
내 영혼이 주님의
내 영적 상태와는 상관없는 '은혜'로 그리하리라.
성령이 인도하시는 마음이시리라.
성전에 앉았다.
참 많은 깨달음이 온다.
갈멜산기도원.
집 10분 거리의 이곳은
직장인 병원
근처의 우리 교회
내 집 안마당 같은 예술공원.
그 안에 있는 이 기도원이
주님이 날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한
내 생활 반경으로 만들어 주신 것 같아
너무도 축복받은 자 같은 마음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철저한 주님의 보호.
눈을 들어 주위를 보면
어디하나 주님의 사랑이 아닌 곳이 없다.
그 말이 진실임을 다시한번 느끼면서
난
깊어가는 눈내리는 초봄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 날과 그때.
늘 변화없는 영적 평안함이 유지되기를 기원하시는 게
그 날과 때를
레마로 주신 오늘 묵상의 포인트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이제 불가능한 바램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나에게 온다.
이전에는 어찌나 생각이 폭주를 했던지
그런 평온이 나에게 올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내 죄,
내 악함,
내 어리석음
내 실수
내 상처...
그 어떤 것이든 주님이 나에게 주실
'그날과 그때를 맞이할 자격'에 대하여서는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더 이상의 죄가 날 붙잡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을 마주 볼때
더욱 기쁘게 마중 나갈 자격이 되지 않겠던가?
하지만 늘 고백이지만
나 혼자는 아직 되지를 않는다.
주님이 도우셔야 한다.
주님이 도우시기 위해서는
난 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난 깨달아 가고 있다.
실수를 통해
죄지음을 통해서도 다시금 살아 움직인다.
난 흐른다.
주님이 내 속에서 흘러 흐르셔
성령의 물줄기가 내 속
내 영혼을 온전히 잡으시면
내 영혼에는 '생명의 폭주'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더 이상 '죄의 욕구',
그것이 비록 내 욕정이던
내 죄의 갈구이던
상처의 흔적이던 아무 상관없는
그때가 오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게 될 것이다.
적용
1. 그 날과 그 때를 묵상한다.
2. 내 죄에 대하여 묵상한다.
되풀이 되는 죄.
그 되풀이를 멈출 수 있기 위해 기도와 간구로 아뢸 수 밖에 없다.
3. 감사한다.
그래도 날 버리시지 않을 것을 믿게 되어 감사한다.
더 나아질 때를 믿게 되어 감사하다.
상처에 의한 것은 죄가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함이 감사하다.
4. 중보한다.
나로 인하여 고통겪을 자들,
내 혀로 인해서 아플 자들,
내 눈으로 인하여 아파할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 앞에 같이 데리고 나가듯
중보한다.
5. 기도한다.
기도함이 살 길이다.
주님 만이 답이다.
6. 성경 여덟장 읽겠다.
주님...
7. 환우의 되풀이 하는 하소연을 듣겠다.
그들의 어이없는 넋두리도 들어 주겠다.
오늘 하루는 최선을 다해 착하겠다.
8. 주님 오실 때 가지면 안될 '죄성'을
없애주시길 기도한다.
기도
주님
어찌하여 이렇게도 되풀이 되풀이
또 똑같은 곳에서 넘어지길
수없이 하게 되는지요.
다람쥐가 도는 쳇바퀴에 걸린듯합니다.
주님 오실 그 날에
과연 이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갈 수 없을것을 압니다.
그 날과 그 때.
그것에 대하여 주님 오늘 말씀하심은
그것이 질타라기보다
희망의 예언이고
그리하길 바라시는 지도의 언어심을
전 깨닫고 있습니다.
주님.
종말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늘 주님오실 그날을 사는 듯 살게 하소서.
조심하게 하시고
신중하게 하도록 도우소서.
되풀이 되는 죄로 인하여
더 이상의 에너지는 깍이지 않도록 도우소서.
그리하시기 위해서
절 도우소서.
절 만지소서.
저에게 힘주시고 이제는 깨달아 버릴 수 있도록 하소서.
이해하고 능력을 주소서.
죄에 허덕이는 자들을 어찌 말로 도울수 있게 하소서.
주여
간절히 소원합니다.
간절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 곁으로 (펌)
펌
2 . 2014.04.03
깨어 있는 것[마24:36-44]
서 있는 곳 위태하고
시간 비록 뉘역하지만
주여 부르소서
어느 때라도
날아 오르리다
주여 비추소서
제 미련한 영혼이
늘 깨어 있도록
그리하소서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오늘은 깨어 있으라는 단어 밖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습니다.
종말.
재림.
..
이야기가 나오면 같이 마음이 무거워 지는 것 같아
묵상을 전개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꼭 내 마음에 맞는 달콤하고 감정적인 것만은
주님의 원하심도 아니고
매일 말씀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동일하기에
그러한 전제를 가지고 볼 수 밖에 없어
내 무거운 마음과 하나님 앞이라는 전제와 상치될 때는
사뭇 묵상을 시작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지금껏 수년간 그래왔듯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블로그를 채우시는 것은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다시 집중하여 묵상을 시작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단어가 눈에 겨우 들어옵니다.
깨어 있다.
그 당연한 의미에 대하여 압니다.
게을러지는 것.
특별히 수년간의 되풀이 되는 행위에 의하여
어느새 제 부지런한 듯한 행동 들에도
매너리즘이 들어온 듯 합니다.
다 아는 듯하고
요정도는 안해도
하루쯤 하다보니
어느새 제게도 많은 부분이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꼭 그렇게 하라고 주님이 강요하신 것도 아니고
그 외적인 것만을 집중하여 고집부리면
어느새 율법이 되어버릴 것도 알지만
그러함에도 '감사'하여
주님께 드리는 내 아주 아주 부족한 '영적 제사행위'로서
매일 세장의 성경을 읽고
내 앉으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힘껏 전파한다거나
말씀에서 적용하는 부분을 실생활에서 적극 시도한다든가
어느새 꼭 필요한 부분들이 다 없어져 가버렸습니다.
아.
그래서 어제부터 다시 깜작놀라서 성경 읽기를 시작햇습니다.
그러니 기다리셨다는 듯이
오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으로 확인도장을 찍으시면서
격려하시는 듯합니다.
정말 중요한 부분들.
행위가 우선이 되면 안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감사하여서 하는
영적행위들의 중요성을
전 게을리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그 자리를 다른 안목의 정욕들이 채우고 있었고
육신의 부지런함으로 채우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오늘 다시
나를 돌아 보아야 겠습니다.
깨어 있지 못하던 부분들.
다시 한번 돌아보아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온전하게 될 선택받은 소수로서 서야 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로 굳게 다시서야 겠고
남편으로 다시 굳게 서야겠습니다.
옳은 사회인으로 그리하여야 겠고
집사로 그리해야 겟습니다.
의사로도 그리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서야 겠습니다.
깨어 있어야 겠습니다.
또 습관 속으로 푹 빠져 들어가
내 편한 누더기 옷을 입고 뒹글거리는 영적 게으름을 벗어야 겠습니다.
귀하신 내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여.
오늘 하루도 또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리 깨어있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용서하여주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사
다시 주님 앞에 정결한 마음으로 서게 하소서.
깨어 있지 못했음을
다시 인식하게 하시사
제 영과 마음을 누르고있는 게으름의 나른함을 거두소서.
그래서 주님 앞에 정결한 자 되게 하소서.
오늘 하루 더욱 그리하소서.
주님의 말씀이 있으시니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 있음을 머리 깊이 인식하고
기도로 간구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저를 돌리소서.
다시 열정의 열심을 회복시키소서.
우리 주님이시여.
주님 위해 허락받은 하루임을 잊지 않게하시고
매사에 걱정하지 않게 하소서.
내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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