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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진정으로 안심하라[삿19:20-3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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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진정으로 안심하라[삿19:20-31]

주하인 2015. 10. 10. 09:02

내 진정 두려워할 것은

어둠이 아니다

 

내 진정 기뻐할 것도

소유가 아니다

 

내 안심할 이유 또한

잠시의 여유가 아니다

 

말씀이 있으심이다

주께서

그대는 안심하라시는

그 진정한 위안 말이다

 

고개들어 세상을 본다

다르다

어둠은 햇살을 꾸미기 위함이고

구름은 그 빛을 받아내 영혼을

안식의 감탄으로

채색키 위한

어우러짐이었을 뿐이다

 

그래 그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오직 그것은

주님의 안심으로 인한

진정한 안식이

 

 
20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 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

   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그대는 안심하라 '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얼마나 착한 사람이던가?

잘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이 얼마나 듣고 싶은 일이던가?

'그대는....

 안심하라....'

이 말이 전해지는 순간, 가슴이 녹아나는 듯하다.

'마음이 즐겁게'될 것이다.

 

이런 언어,

이런 위안과 사랑이 식어져 가기에

이 적은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그리도 쉼을얻지 못하는 게 아닌가?

 

세상이 각박해져 가는 이유.

가정 안에서도

사회의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도

얼마나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는가?
 틈만 나면 패륜이요,

수도 없이 많은 우울증 환자, 자살....

총기 난사 , 왕따....

 

그들에게 그래보라.

"그대는 안심하라"

아마 울던 아이가 순간 뚝 울음을 멈출 것이고

대들던 사춘기 아들 딸이 순간 소리 지르든 것을 멈출 것이며

총들고 나타났던 자가 멈칫 거리고

수많은 정신과와 상담실이 문을 닫아 버리게 될 것이다.

....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잠시지만...

 

잠시 ?

그 논리적 근거가 무엇이던가?

사회에 얼마나많은 좋은 말들이 많은가?

하버드를 나온 잘생긴 젊은 스님의 책이 한동안 세상을 안심시킨 일이 있다.

비록 그 분이 쓴 책 내용 거의 100%가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서 차용 된 내용이긴 해도...

 데일 카네기 님의 책은 1920년 대에 나와서

어마어마하게 읽혀져왔다.

벌써부터.....

 지금도 인터넷에서 '힐링'하고 쳐보면

수도 없이 좋은 , 안심시키는 구절들이 무료로 정신없이 많이 뜬다.

서점에 가봐라.

안심시키기 위한 책들,

성공을 위한 처세술 책들..... 일 이위를 다툰다.

모두 읽는 동안 마음이 '안심이  된다'

즐거워하라,...라한다.

 

그러나

정말 그들이 안심이 되어서 그러한 글들을쓰고

죽을 때까지 즐겁게 살았으며

손들고 잘살았다 외치며 죽어갔을까?

 정말일까?

 

그런데 왜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고

저들은 저리 외칠 수 밖에 없을까?

 왜 지금 세상은 신문 , 인터넷, 스마트폰을 들기만 하면

저라한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지나?

 도저히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패악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안심하고 편안해진 결과,힐링 받아가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아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더 많아질까?

왜 의술이  극도로 발달함에도

메르스나 조류독감 에볼라.,암...은 더 만아지는가..하는 것처럼....

 왜 현대인 마음에는 그런 힐링이 더 많이 필요해질까?

그들의 내면이 이전과 비교하기 어려운 '불안이나 불행'이 커져감 탓이 아닐런가?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지금'...지금 만 말이지만.... 왜 하나님 말씀이 있었음에도

잠시 안심하지 못하고 있던가?

왜 흔들리는가?

 

'그대는 안심하라 ''

이 위안의 언어.

긍정의 언어

이 사랑스러운 말이 필요없어서가 아니다.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만 아니라

이웃에게

더 열심히 해주고 위안해주어야 할  '생명의 언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말씀에 나오는 저 처참함의 원인..

오늘날 벌어지는 절대악의 근거들은

그 안심이나 위안의 근거에 '하나님'으로 부터 베이스가 되어 나오는

진실한 위안이 아니란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해야한다.

자꾸 써야 한다.

안쓰는 것 보다는 낫지만

하나님의 원리로 인하여

성령으로 의하여 넓어진 마음, 밝아진 영혼이 근거가 되지 않고는....

아니, 최소한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는

언어여야만이 그 위안이 '지속성'이 있고

'생명력'이 생기게 되어 사단이 장난을 하지 못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좋은 글과 향기나는 시어들도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지 않은 글들은

마치 오늘 노인의 언어,  그의 헛된 몸부림 같이

세상의 패악, 세상의 권세잡은 자

사단의 장난으로 부터 벗어날 수없다.

 솔직히 '언어의 유희'들 만이 세상에 넘치고 넘쳐

썩은 무덤위에 횟칠을 한

허상의 세계에서 눈치채지 못하는

x파리들이 춤추고 있는 느낌이라면 정말 과도한 표현일까?

 

난 SNS를 않는다.

잘한다는 이야기는아니다.

그 안에서 자신을 아무리 아름답게 꾸미고

수많은 팔로워를 지닌다해도

그것으로 끝이다.

 잠시의 위안,

꿀바른 썩은음식이 아니던가?

즐거워도 곧,세상에 이런일이...할 것이다.

 

 하나님으로 다시 세워져야한다.

말씀으로 다가오신 말씀이신 하나님.

매일 만나는 로고스 하나님

그분이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그대는 안심하라 할 때 만이 내가 살아날 수 있다.

진정 즐거운 것은

말씀이신 로고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그대는 안심하라 라 하시는 것이시다.

 그게 진정한 즐거움이다.

그때 우리는 은혜라 표현하고 느낀다.

그때 , 성령께서 말씀을 타고 우리의 영에 흐르시는 것이시다.

그때, 진정으로 안심이 들게 된다.

그럴 때 마음은 평안으로 가라앉고

눈에는 촉촉한 습기가 돌게 되며

가슴 한구석이 따사로움으로 차게 되고

등골은 나른해지며

기분이 평안하고 날아갈 듯해진다.

 삶은  그 여건과 상황이 어떠하든 잘 풀어진다.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상황이든 기쁘게 될것이며

그러한 자의 얼마 후는

자신도 모르게 달라져 잇게 된다.

이렇게 표현하며  감사하게 된다.

"그때 그러셨어~!"

 

 내게 지금 필요햔것.

지금 저 노인이 말한 것이

지금바로 하나님께서 깨달은 나에게

그대는 안심하라 라고 하시는 것임을 믿는 것이리라.

 

 

주님.

그렇지 못하지만

즐겁기를 원합니다.

주여.

주님이 그대는 안심하라 라고 제게 말씀하셨기에 입니다.

안심을 넘어 안식하는 제가 될 것임을 기대합니다.

주여.

저들은 온전히 인간인 자신의 경험과

그들의 경험만을 믿고

실제의 위험을 망각해버리려는

마취된 인간의 그것이기에 결국 곪아 터지는 위험한 안심이지만

저는 우주의 주재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믿기에

그러합니다.

 

제게 필요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대는 안심하라 .

주하인아 안심하라.

 

예.

주님.

안심하고 안식을 기대합니다.

진정한 안심.

진정한 안식을 기대합니다.

 

성령으로 온전히 이끄소서.

저혼자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즐거워하기 힘들며

영혼으로 폭을 넓히기에는

제 믿음의 그릇이 너무 작기에

오직 성령께서 부족한 이 믿음마져 허락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게안심과 평안을 주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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