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고난도 한 호흡일 뿐 (욥 7:1-7 ) 본문
제 7 장 ( Chapter 7, Job )
밤이
아무리 깊고
아무리 어두컴컴했었어도..
그래도
주님이 베푸시는
아침 하늘은
참으로
싱그럽고도 맑습니다.
1.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NIV : hard service)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2.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군은 그 삯을 바라나니
욥이 말한다.
세상 누구에게도
어려운 날 ( 전쟁 )이 있다고..
그날은
마치 품삯을 받는 자들이
일이 너무도 힘이 드니
날이 저물고
어서 삯을 받는
그런 심정과 비슷하다고 한다.
인생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온다는 것이다.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그러면서
자신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벌써
수개월 째라고 한다.
곤고
수고로운 밤 ( NIV에서는 끔찍한 밤) 이라 한다.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누울 때 말하기를 ...
이라면서
부드럽게 말한다.
애처럽게 말한다.
그러나,
그 욥의 고통이
정말 애처로운 정도에 끝나는가?
우리는 안다.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도
그의 고통을 이리 적나라하게 표현해준다.
그의 감성의 정도에 비해
현실은
구더기와 흙조각의 범벅이고
살가죽이 터지고 뒤집히는
엄청난 고통이다.
언젠가 이야기 했지만
젊었을 적
옴에 걸려
심하게 고생해 본적이 있다.
죽도록 가렵다.
밤이새도록
피가 나오도록 긁어도 시원치를 않다.
아프지만 가렵다.
그것의 몇배는 더 고통스러운 현상을
의사의 눈으로 보아
욥은 앓고 있다.
그것 뿐인가..
가족의 몰살
아내의 저주와 이별.
경제적 파탄...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다.
그것을 그는
엎치락 뒤치락 한다는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남들도 다 하는 인생의 고통에
자기도 들어와 있고
그것이 여러 달째라고 할 뿐이다.
그의 품성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얼마나 온유하고
자신의 신세가
극도로 괴롭지만
있을 수 있는 힘듦 정도로만
느껴지도록 하소연한다.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7.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표현을 보라.
나의 날이 베틀의 북 보다 빠르다 한다.
하루가 여삼추이고
한날이 끔찍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빠르다니..
한 호흡처럼 빨리갈 생명이라니..
무엇을 그는 말하는 가?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룬 것 없이
단지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그래서
주님께 죄송함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절대로
짧은 인생 ,
누리지도 못하고 흘려보내다가
이제 인생의 막장에 있으면서
더 이상 누리지 못할 것에 대한
신세한탄이 아닌 듯 싶다.
그렇다면
그의 아까움이나 고통에 대하여
위에 열거된
저러한 고통 중의 천성의 여유로움을
내 비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고통 중
최고의 고통이지만
주님을 알고
주님 때문에
그 고통을
누구나 받아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되
자신에게는
약간은 길고
조금은 더 고통스러운 정도라고
애써 내려 놓는 것이다.
그런 그가
주님 앞에서
좀더 높은 성화된 인격으로
그
하나님의 베푸신
당연한 고통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더 현명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고
한스러워 하는 것이다.
비록
그게
정신이 온전하도록 한가로운 상황에서
베풀어져서
앞뒤가 조금 다른 듯한 뉘앙스로 표현되지 못할 뿐...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보이고자 하시는가?
짧은 시간이지만
들어오는 느낌은 이렇다.
그렇다.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욥이
고통 별로 받고 있지 않고
고통을 내색하는 것이 죄송한 듯한 뉘앙스로
비록,
친구들에게지만
하나님 앞에 표하는 것처럼
'고통은 누구에게나 놓여있는 견뎌야 하는 의무인 것'이다.
주님의 뜻이다.
고통은..
고통은 찾아서 쫓아다니는 '새디스트'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올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품꾼이 품삯을 받을 때를 기다리듯,
일하는 자가 어둠이 와 쉼을 얻을 때까지
'고통을 인내하고 기다리면
고통은 반드시 간다는 것이다.
특히
주님 안에서 거하는 자들에게는
고통은 필연이지만
그 고통을 통하여
더 큰 쉼이 있기에
여유롭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머리의 차원을 넘는 것이다.
욥이 그런 것 처럼
심정적으로도 믿어 의심치 말아져야 한다.
어제
후배 의사 랑 식사를 했다.
늦은 수술을 부리나케 끝내고
제법 좋은 곳에 가서..
그 선생님은 나랑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다.
심한 환란을 겪다가
이제 조금은 쉼을 얻으려는
그러나
아직은 그게 온전한 '품삯의 시간'이 아닐 듯한...
그래서,
조금은 큰 환란을 건너온 선배로서
알지 모르는 가슴의 떨림이
그 후배를 볼 때 마다 있어왔다.
어제의 시간은
서로의 이야기를 조용히 내어 놓고
잔잔히 이야기 하면서
주님의 안에서 만이
회복이 될 수 있음을
서로에게 가르치는 시간이 되었다.
고통..
고난은
주님이 연단하시는 시간이다.
그 연단이 있어야
금처럼 제련이 되어
성숙한 성화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 .
1시에 끝나는 외래 시간에
갑자기 외래환자가 폭팔적 - 정말 폭팔 적이다. - 으로 몰려들며
수술 환자 세분을 연달아 입원시키고
수술을 마치고
블로그 정리를 마친 후
집으로 향하는 시간이
늦은 밤 11시였다.
그 중 첫번 째 환자 분이
'자궁외 임신 파열'로
거의 '피의 1/2'을 내 출혈로
죽음 직전에 갔던 분이다.
다른 두분도 '내출혈'로 응급수술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 분처럼 심하지는 않았었다.
너무도 아파하고
의식은 가물 가물..
얼굴은 백지장..
그런 그 세분의 수술이 마치고
월요일.
두분은 아파하지만
먼저하신 그 분은 웃는다.
전혀 안아프시단다.
산모들도 마찬가지다.
심한 진통을 겪다가
결국 제왕절개 수술하신 분들은
그 다음날 뵈면
하나도 안아파하신다.
반면에
그냥 예정된 제왕절개 산모들은
오랫동안 아파하신다.
실제다.
시사하는 바가 있다.
고통을 겪어 본 자들은
고통을 덜 느낀다.
고통의 원리를 아는 자들은
고통에 덜 반응한다.
욥은 고통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의 고통은
주님의 원리 안에서
고통의 정도가 감해져 느끼는 듯하다.
참으로
인생은 '일장춘몽'이다.
인생은 '호접몽'이다.
인생은 '신기루'다.
맞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전제가 안되었을 때다.
마찬가지로
인생은 '한호흡'이다.
하지만
주님이 일생에 간섭하기 시작하는
주님 동행의 삶이 되면
인생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고통이 고통스럽지만
덜 고통스럽고
고통이 있을 수록
위안이 더 커지는 것처럼
인생은 짧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다 보면
충분히 긴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자고 깨고 눈감고 뜨고
또 자고 깨고..
하루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과 고통이
육적 물질적 영적으로
파도가 밀리듯 밀려온다.
쉼을 가질 틈도 없이
고난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욥이 그랬듯,
고난이 유익이고
고난은 필연일 것을 알고
고난을 주님께 맡기고
가만히 흐르듯 견뎌내면
어느 순간에
확 하는 깨달음이 우리의 내적 통찰을 열어줄 때가 있다.
그때는
고통은 고통이되
고통이 그리 고통 만은 아니고
고난은 고난이되
고난이 위로의 또다른 모습임을 알 때가 온다.
적용
1. 힘이 들때 '약함이 강함'임을 명심한다.
기다린다.
인내한다.
2. 성경 여섯 장 읽겠다.
3. 고난은 필연이다.
기뻐한다.
4. 욥의 온유함을 배운다.
5. 누구에게도 고난은 필연이다.
알면서도 받아 들이지 못했던게 부족한 나다.
고난을 죽도록 두려워 했었다.
욥의 의연함과
고난이 필연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현 상황의 내가 사랑스러울 수도 있다.
다른 의미 붙이지 말자.
6. 인생은 한 호흡 일 뿐이다.
지금까지도 금방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땅은 영원하지를 않다.
잠깐이지만
모두 그랬듯 착각을 하고 살 뿐.
그러다 죽으면 모두 바람 앞 먼지 일 뿐.
해뜨면 없어질 말라버릴 같은 ....
큰 의미를 둘 이유가 없다.
너무 깊은 상심도 필요없다.
그냥 머물다
본향에 돌아가면 그 뿐.
그 영원한 본향이
우리의 영원한 종착지 일 것을...
돈에도
자식에게도
누구와 무엇에게라도...
거칠 것이 없다.
자유다.
주님 만이 의미시다.
기도
주님
그렇습니다.
고통이 오고
고난이 들이 칠 때는
죽고만 싶었습니다.
창피한 것도 이루 말로 할 수 없고
자괴감은 얼마나 컸었는지요.
그보다 더한 외로움은
절 얼마나 내리 눌렀던지요.
좌절감은요.
그럴 때는
고통보다
그러한 눌림이 더욱힘들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뜻을 조금씩 알아가며
아..
꼭
고난이 고통 만은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은
그것이 내 영혼에 내리 스며들어
주님 말씀대로
고난을 기뻐할 수 없는
이 어이없는 인격적모남과 지혜없음이
얼마나 답답했는지도 모릅니다 .
서서히
고난 중에서도
주님의 말씀이 머리 속에 기억나기 시작하는 요즈음
주님의 뜻을 영혼 깊숙이 담아 있는
욥의 고백과
그의 상태가
어찌 그리 부럽고 죄송한지요.
주여
간절히 바라올 것은
고난이 올 때
그것을 피하기 보다는
주님의 뜻
인생의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그에 따르는
여러 생각들을
주님 말씀 안에서 녹여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정말 간절히 바라옵기는
고난을 피하는 것보다
고난을 받아 들일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 약함을 통하여
주님
당신께서 내 영혼에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여
다시금 원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내 원함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그러셨으니
고난을 주님뜻안에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원함의 가장 근본이 될 수 있길 원합니다.
주님
욥 같은 고난은 주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
욥같은 주님의 충성자가 되길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