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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손을 놓는 것이 惡의 시작이다 ( 렘 2:9-19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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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손을 놓는 것이 惡의 시작이다 ( 렘 2:9-19 )

주하인 2009. 9. 4. 07:13

 

어디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이런 아름다움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원하오니

주여

전 주님의 빛이 있어야만 

그럴 수 있음을 아시지요?

 

절 놓지 마소서.

주여...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님이 싫어하시고

아주아주 싫어하시는 일.

 惡 한 것.

 

그것을 주님이 말씀해주신다.

아직 애정이 남아 있고 안타까우신 심사시다.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주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다.

 

 

17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주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길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우리를 기쁘게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나와 길 동무하시려 나를 만드신 것 같다.  

그게 나를 지으신 목적이시다.

 

 난 주님의 성령의 생수를 마시며

주님의 손을 잡고

내 인생을 살아가야 할 필연적 입장에 있는 자다.

 

 

 

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惡'은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이고

즉, 생수를 마시지 않는 것이고

주님의 손을 놓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표현하면 '성령'의 임재를 막는 행위 - 대표적으로 우상 숭배로, 물질의 우상, 안목의 우상, 이생의 자랑... 모두 우상이다. -  이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멈추는 것을 '惡' 이라 하신다.

' 반역' 도 악이다.

반역은 거역 하는 것이다.

거역은 순종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사술'이라고

어제 당직방에서 읽은 '존 비비어 목사님의 순종'이라는 책에서

명쾌히 써 놓았다.

 

 즉,

惡은 주님을 멀리하게 하는 온갖 '죄'다.

그 죄는

성령님을 느끼지 못하게 하겠고 - 너의 죄가 너와 나 사이를 내었고..-  또한

말씀을 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순종하지 않는 죄다.

 

 악한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살인, 간음... ' 이런 종류의 것을 예상하지만

주님이  생각하시는 악은 그런것이다.

한마디로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야 말로

'악'의 시초이란 것이다.

 세상은 악의 전초기지다.

아무리 우리가 면벽을 하고 절제를 하고 도덕적인 노력을 해도

주님의 손을 놓는 순간

주님의 성령을 잊는 순간

그것은 '악'하게 될 수 없는 지옥의 소굴인 것이다.

살인,,.... 은 모두 증상일 뿐이다.

원인을 제거해야 증상이 완치가 된다.

일시적인 증상제거제로는 치료가 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관심은 증상에 있지 않으시다.

 주님의 손을 놓는 순간이 바로 악에 빠지는 순간임을 잘 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을 다시 손잡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당연히도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의 성령에 민감할 결심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만으로 가능한가?
 

 거기에 죄를 벗어날 노력을 해야한다.

죄의 근본적 두려움은

주님을 알아차리는 영적 민감도를 둔화시키는 데 있다.

'[이사야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라는 구절이 있다.

죄를 지으면  멍해진다.

주님 묵상을 하고 은혜를 받아야 하는 데

그럴 수가 없다.

자꾸만 짓는 고범죄는 특별히 죄의식도 없으면서

마음이 무뎌지게 만든다.

오랫동안 은혜를 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게 된다.

그러게 되면 여지없이 마음의 평강은 무너지고

옛 성품이 고스란히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알아도

죄를 벗어나는 것은 자의적으로는 불가능 한것이다.

오직 주님 앞에 내려 놓아야 한다.

마음이 더 무뎌져 더 주님 앞에 나오기 힘들어지기 전에

습관적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십자가의 보혈로 해결 받아야 한다.

그러한 결심이 확고하고 죄의 회개가 습관화가 되어야

주님의 동행하심

성령의 임재하셔서 흐르심이 명료해지고 뚜렷해진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평화와 평강으로 차게 된다.

물론, 죄가 항상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가 해결되어야

주님의 생수가 생수처럼 인식이 된다.

성령은 늘 우리 곁에 계시지만

우리의 영혼에 생수로 충만히 차고 흐르시는 것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결단의 시간과 비례하는 듯하다.

 

 어제는 여성 병원에서 당직을 섰다.

한달에 서너번 서는 당직.

어제 묵상에서 TV를 켜지 않고 기도를 하겠다는 결심 탓으로

내 당직방은 조금 조용한 편이었을 것이다.

당직 방은 조리원 한구석에 있어서 옆방의 산모들 아가 소리와 식구들 소리가

벽을 타고 조금씩 들리는 것으로 보아서 말이다. ㅎㅎ

몇번 응급실 환자 때문에 전화오는 것 빼고는

오랫동안 시간이 주어져서

성경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좋은 책 - 존 비비어 목사님의 순종 - 읽고

시간내어 내려가서 지하에서 트럼펫 불고

참 나름대로는 善한 시간을 보냈다.

 새벽 4시에 산모가 안좋아서 응급수술하고

연달아 분만하고는 또 차분한 시간이 이어진다.

 대기 산모는 두 분이지만

의외로 출근시간 까지 잘 버텨 준다.

 묵상을 하고

잠시 기도를 하고

당직방 냉장고 위에 비치된 컵라면 하나 끓여 먹고

들고온 트럼펫을 가방에 걸쳐놓고

세면한 다음 걸어나왔다.

 하늘은 맑고 청명하다.

바람은 시원하다.

길가에 보이는 꽃들이 참아름답다.

 마사이워킹 신발 -싸구려 ㅎㅎ- 을 신고 열심히 걷던 걸음을 멈추고

얼른 허리에서 사진기 빼어 들어 몇장 찍었다.

다시 걸었다. 

 여성병원에서 본원까지 걸어서 약 20분 내외지만

사진 탓인지 30여분 걸린다.

 피곤하지가 않다.

나이가 들어서 근육이 쇠약할 법도 하고

당직 방의 잠이라는 것은

내 젊은 시절 산부인과 의사로서 늘 겪어 왔지만

그럴 때마다 뼈마디가 쑤시는 것 같고

아침에 일어나면 늘 심장이 뛰고 답답한 마음이 몰려 왔었다.

언젠가 꼭 무슨 일이 터질 것 만 같은 대기 상황의 산부인과 의사의 삶.

거기에 의료사고라는 것을 겪고 나서부터는

정말 분만이라는 과정을 지켜 본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상당한 심적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것이라서

자고 일어나면 그 젊은 근육에도

언제나 아픔이나 찌부두둥함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길 일수 였었다.

 하지만, 언젠가 부터인가?

오늘 처럼 잠을 못자고 나와도 별로 힘들지 않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었다.

아니 오늘처럼 개운할 때가 자주 있었다.

돌아보면 당직방에서 TV를 켜고 눈만 내놓고 침대에 누워서

편히 지내다가 분만도 별로 안받고 나올 때는

이런 상쾌함이 오히려 덜했었다.

  돌아본다.

난 주님 말씀대로 적용하려고 약간의 노력을 했었고

깨달은 바가 있어 회개를 했다.

 주님은 환우가 줄어 들게 하셔서 날 피곤하지 않게 하시지 않으신다.

시간을 조절하셔서 효율적으로 그리하신다.

그래서 개운하게 하신다.

 

 지난 한달.

정말 최고로 바쁜 한달이었다.

수술 건수가 역대 최대.

그런데 지난 한달 코피한번 쏟지 않았다.

하루에 수술 4건까지 하고 ( 평균 한건 이상 ..)

저녁 10시에 퇴근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었다.

그 수술의 질이 Major급이 대부분이었다.

정말 그러함에도 피곤은 했지만 못견디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들지 않았었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받쳐주서인지 그 많은 서류 job이 하나도 밀리지 않고

그리 많이 몰리는 외래 환자 분들이 시간에 맞추어 딱딱 진료가 마쳐지고

응급 환자는 그 틈을 이용하여 쏙쏙 아구가 맞듯이

기다리지도 않고 수술을 하게 되고

................

정말 말그대로 '톱니바퀴'처럼 맞아 들어가는 한달이었다.

 

아침에 걸어서 본원, 내 본 진료실로 출근하면서

그런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돌아보면 난 그리 열심이 있고

절절한 기도를 하는 훌륭한 신앙인은 아니다.

 절대로 겸손이 아니다.

회개도 실은 잘 못했다.

 하지만, 비록 아주 적은 시간을 바치기에 죄송스럽기 그지 없긴 하지만

'주님의 손'을 붙드는 , 묵상의 노력을 귀히 보시고

그 분은 내 일상을 이렇듯 간섭하시고 계시는 듯 하다.

 하나하나 내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정신차려서 들여다 보면 모두가 주님의 간섭임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의 ..

그러면서 영적인 게으름이 시작이 되면 도저히 눈치 챌수 조차 없을 정도의 ...

 

감사하다.

정말 감사하다.

어제 하루를 지켜주심이

오늘 아침의 이 신선함과 상쾌함이

참 감사하다.

 돌아보면

만일 내가 주님의 말씀을 붙들지 못하였던

그 '악'의 시작되었던 시간 - 사람마다 주님을 붙드는 방법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말씀 묵상은 가장 쉬운 방법 중의 하나란 생각이다.

최소한 나에겐 그렇다 .  - 동안이 지속되었더라면

난 원망과 불평과 불안 속에서

퇴락해가는 나이든 산부인과 남자 중년의사로서 지낼 수 밖에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 고생은 위에 장황히 썼다.

이제 돌아보면

난 악에서 벗어나서 사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다.

깨닫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안다.

그게 너무도 감사하다.

 이제 기도의 분량을 높이고

주님 말씀 순종에 의지를 높이는 일이 남았다.

겁이 나긴한다.

 

 

 

 

적용

1.  주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다.

  성령의 흐름은 생수의 흐름이시다.

  그 생수가 배에서 강 같이 흐름을 사모한다.

 

2. 기적과 은사와 은혜를 사모한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다 가능하다.

  어제 책에서 너무 당연하지만 너무 귀한 말씀을 읽고 '아'했다.

  아프리카나 선교오지에 가서 장님이 눈뜨는 기적을 보게한 분들이 

  귀국해서는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다 받는 이의 '간절함' 의 부족이란다.

  맞다 .

  주님도 그러셨다.

  고향에서는 기적을 '못'일으키셨다 .  - 일으키신 게 아니다.  

  양자 역학에서도 분명히 전능자의 의지에 따라 입자와 파동이 바뀐다 했다.

  주님이 일하시려면 절대적으로 내 믿음이 필요하다.

  내 믿음에 따라 주님이 역사하실 기적을 기대한다.

   나도 온전한 회복을 경험하고 싶다.

 

3. 회개한다.

   회개하는 기도를 하겠다.

   많이 ..

   내 현재의 삶의 힘없음이 죄 탓이 맞을 듯 싶다.

   순종하지 못한 삶의 부분이 너무도 많다.

 

 

4. 성경 일곱장 읽겠다.

 

5.  기대한다.

    

 

 

기도

 

 주님.

주님은 주님을 멀리하는 것이 악이라고 하십니다.

그 주님을 멀리 떠난 후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죄의 탓이라 하십니다.

주님 생수를 마시길 원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더이상의 비전이 없음을 압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볼수록 갈증과 허기만 더합니다.

입이 마르고 목이 탑니다.

생수로 목을 축이고 싶지만

벌써 멀리 떨어져 와 주님과 나 사이가 먼듯한 것은

주님의 말씀 대로

나와 주님 사이를 낸 것은 오직 나의 죄 탓인 듯 합니다.

불현듯 입에서는 '죄인'이라 습관적으로 외쳐 왔지만

난 내가 죄가 별로 없음으로 단정짓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어제 책을 읽어가며

순종하지 못한 여러가지 죄가 떠올랐습니다.

그 죄가 나를 주님의 평강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주여.

 이제 난 내 죄를 회개할 의욕을 가지고 있사오니 도우소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압니다.

주여.

저로 회개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똑같은 고범죄의 틀에서 절 깨주소서.

그리하여 힘있는 삶을 원합니다.

주님이 증거되는 힘있는 삶 말입니다.

저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생수의 시원한 평강만 원합니다.

예수시여

도우소서.

성령이시여 인도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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