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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도 괴로우셨다[요13:21-3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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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도 괴로우셨다[요13:21-30]

주하인 2017. 2. 24. 10:18

2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심령이 괴로워'라신다.

그 분도 갈등을 하시는 것이시다.

'제자 유다'를 끝까지 붙들어 세우고 싶으시지만

그의 선택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십자가 역사'가 이땅에 세워지기 위하여

그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마음대로 바꾸어 회개시키시지는 않지만

그런 그 유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 그의 자살...로 이어지는 것일 것임을 다 아시는

우리 예수께서 '갈등'하시지 않으실 수 없으셨던 모양이다 .

 

이 갈등.

이 고통.

..........

이것이 없으면 그자신은 얼마나 편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 말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아픔을 굳이 왜 피하시지 않으시던가?

그 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인자 예수님'

즉, 인간 예수님의 그 아픔을 그대로 유지하고 느끼심은 무엇 때문이시던가?

만일, 남의 아픔을 알면서도 '공감'하지 못하면

그 자신은 참 편안하고 좋을 것이지만

그를 중심으로 한 주변은 힘들 것이다.

특별히 그 사람이 '금수저'나 '능력'을 가진 자로 주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면

타인에게 전가되는 그 아픔의 정도는 아주 많이 클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P씨 ' 아닌가?

자신이 너무 아파왔던 (부모의 타살 경험, 그로 인한 배반의 경험들과 사람 사이의 감정의 교류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성장 과정...) 경험들로 인하여

일체 감정의 문을 닫아 버리고 '외톨이'로 행하며

아주 소수의 사람들하고만 교류하다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갈등도 안느끼려고 '차단'해버리는

아니 어쩌면 그런 갈등을 느낄 수 있도록 교육 자체를 받아오지 못하였기에 공감능력이 없어진 관계로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해버리니

아마 그니는 별로 힘들지 않을 지 모른다.

그러나, 이 나라의 백성들이 어떠한가?... 쪼개 쪼개..

 

이 극단적인 예..

아픔을 느끼지 못하거나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는 노력..........이

그 자신에게는 괜찮을지 모르나 타인에게는 얼마나 불행이 될 수 있던가?

하나님이신 예수님.

(원죄가 없으신 )인간이시기도 한 예수님.

그 분 예수께서 오늘 '심령이 괴로우셨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그런의미에서

우리 인생들에게는 얼마나 다행이고 귀한 일이던가?

그 분은 우리를 공감하고 우리를 느끼고 우리와 같이 생각함을

이 땅에서 다 경험하시고 나누어주시고 공감시켜 주시고 까지 가신 것이시다.

 

그러기에

오늘 내가 이 말씀을 묵상하며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나.

나만 힘든게 아니었다.

그 분 예수님도 그러셨다.

그 분도 '심령이 괴로우셨다'

그러니 고난이 없는 것은 '괴물'이거나 '죄인'이거나 ' 오작동'의 결과일 뿐,

그래서 고난은 슬퍼하거나 피하거나 버려야 될 것만은 아니기에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기회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당위성도 있지 않은가?

당연하지만

또 감사해야 할 것.

예수님이 아시면서도 유다를 괴로워하면서도 놓으심은

십자가 ..에 달리시기 위함이시라는 것이시다.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내 이 ... 정말로 끈적하고 떼어내기 어렵고 도지히 해결할 수 없는 '죄'들을

다 가지고 가신게 아니신가?

그리함으로 난.. ..더 이상 짓눌리지 않고

다시 매일 또 '부활'하여

이렇게 '빛'가운데서 호흡하고 살고 힘을 낼 개연성이 생긴 것이며

그러함으로 난.. 영생의 자격을 허락받은 게 아니던가?

주님이 괴로워 하심은

그 십자가의 고통도 다 아심이고

결국 그 시간이 오게 됨을 깨달아 아심도 그 한 원인이시다.

오늘 '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에 대하여

한번 더 감사함을 유지할 이유다..

 

 

30.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유다는 '밤'에 나갔다.

죄는 '밤'과 주로 연관 되어 있다.

어두울 때 익는다.

식사 후 , 아무런 생각 없이 있다가

사단의 역사로 , 예수님의 허락하에 그대로 이루어져 버린다.

 

며칠전 말씀처럼

예수님은 '빛'이시고 '믿음'으로 어두움을 물리치게 하시러 오셨다 하셨다.

지금..

어떠한 갈등이 우리에게 놓여지고

그 갈등으로 인하여 어쩌면 죽을 듯 힘들어

혹여,그것으로 인하여 살 소망까지 없어질 듯한 상황에 있을 지라도

그것..

그냥 어두움으로만 받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 혼자만 힘든게 아니며

예수님은 내 이런 상황을 전혀 아시지 못할 것 같은

누구도 알 수 없을 절해고도의 상황으로 착각되어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임은 '어둠'에 거함이고

생각을 잠시 돌려

'예수님'도 갈등을 저렇게 심하게 겪으시고 그리 하셨지만

그것은 결말없는 죽음의 어두움이 아니고

고통만의 십자가 지심 만도 아니시며

오히려 '부활'의 약속을 이루시게 하여

도저히 가능치 못할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음을 깨닫고

또한 예수 께서도

우리와 동일하게 '심령이 괴로워 하심'을 같이 겪으신 바

그 모든 우리의 인생의 버거움, 절박함, 절망조차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는

절대로 '소망'의 시작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게 '원리'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게 이유가 있다.

약함이 강함이며

곤란이 강함이며

핍박이 강함이고

쇠약함도 강함이다..

그런 모든 약함으로 인하여 '강함'이 되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원리시다.

그래서 소망이다.

그 모든게 '성령'으로 자연스레이 인도되기 때문에

이 가능치 못할 비가역적 현상들이 가역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게.. 소망이다.

 

 

고난이 유익임을 압니다.

그러나,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너무도 잘 잊습니다.

고난에 매몰되어 '밤'만 보려 합니다.

고난 뒤에 스물거리며 다가올 '로마병정'과 '제자 유다'의 배반을 목격하기만 할 것만 같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두려운 무서움 만이 우리를 사로잡아 앉히려 하는 것같습니다.

 

하나..

묵상을 하며

성령께서 제 영혼에 다시 '소망'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이 고난이 결코 홀로 허락되어진게 아니란 것 말입니다.

예수께서 '제 곁에서 ',

고난 받는 우리 곁에서 같이 '괴로워 하시'고 계시며

결국 이 고난은 끝을 향해 가고 있어

십자가의 예수 보혈을 통해

이 영혼의 이 어둠의 존재들이 밀려나고

빛이 다시 제 영혼에 밀려올 기회이며

'성령'으로 인해 또다시 '부활'을 누릴 기회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여..

이 모든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인도하시는 것이시며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다시 채워질 것을 기대합니다.

 

내 주여.

제 묵상이 머리 속의 논리의 유추가 아니고

늘 삶에서 다시금 형태를 지니고 역사하여 변화케 하심을 목도하여 왔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날 위해 울어주신 예수님.

날 같이 공감하고 아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절위해 돌아가시고

그 하나님이 다시 절 위해 그분을 살리셨으며

보혜사 성령으로 이리 인도하십니다.

 

주여.

부디 간절히 비올 것은

고난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지 마시고

고난이 오면 오히려 감사로 변케 하소서.

그래서 풍성한 깨달음과 감사와 현실의 변화도 기대케 하소서.

 

내 주여..

우리 가정을 기억하소서.

아시오매 .. 모두 주 안에서 깊이 깨닫게 하시고

오직 예수 , 오직 주님으로

서로 서로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는 구성원들 되게 하시고

새로 들어오게 될 큰 아이....축복하시사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새로운 축복의 근거가 되게 하소서.

힘내게 하소서.

주여.

가지고 있는 인생의 어려움들 다 해결하시고

더 축복되고 놀라운 결과들이

내 아내와 내 자식들, 내 며느리될 YAN.. 앞에

그리고 혼돈의 소용돌이 속의 이 나라.. 백성들,

특별히 예수님을 사모하는 자들의 영혼과 삶에 크게 임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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