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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III (실제적 제사 - 예수님) 본문

십자가가 왜?

십자가 III (실제적 제사 - 예수님)

주하인 2006. 3. 14. 12:28

 차례)      1) 실 제 적 속 죄 제                  2) 실 제 적 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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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적 속죄하는 제사는 '실제적 속죄제'와 '실제적 번제'로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속죄은총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백성들을 위하여 드려지는 제사이다.  

 

 이 실제적 속죄제는 성도들 자신과 직접 관계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지식적으로만 깨닫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고

성도들 자신이 직접 속죄하는 제사에 참여하는 자세로 연구하면 대단히 유익할 것이다.    

 

 

 

 

 

 

 

 

 

 

 

   1) 실 제 적 속 죄 제   

 

 

 

 (1) 제사 준비

 

    가) 속죄 제물

 

 

 

 모형적 속죄제에서는 속죄 제물이 흠 없는 수 염소 두 마리였는데
신약 시대의 실제적 속죄제에서는 속죄제물이 과연 무엇인가?    
속죄제물이 다리를 절뚝거린다든가 털이 빠졌다든가 해서는 안되고 온전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홈이 있는 제물 즉 수 염소는 절대로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는 것이다. 
 속죄제물이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모든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흠이 없는 실제적 속죄제물로는 합당하지 못하다.
그리고 흠이 없다는 것은 죄도 없고 거룩하고 의롭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과연 이러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겠는가?
어떤 성도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자기가 흠없는 속죄제물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성도들은 죄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믿음으로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는다 할 지라도 결코 실제적 속죄제물로서는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죄악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 생길 때 잘 참고 견디다가 순간적으로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내는 등 부끄러운 행실 즉 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속죄제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렇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속죄제물이 될 수 있겠는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현군자라고 존경을 받고 있는

공자 ,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같은 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내 몸을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제물로 사용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면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시겠는가?
과연 하나님께서 만족하실만한 속죄제물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사람들도 아담의 원죄 즉 죄악성을 물려 받은 죄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도덕적 생활을 완벽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성현군자일지라도 하나님께 열납하실 수 있는 흠없는 속죄제물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성현군자들조차도 속죄제물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을 향하여 주신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고하였다.   
 이 말씀은 재물이 없어서 속제하는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죄인들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직 한 분 의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만이 죄인들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원죄없는 유일한 의인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행 4:12에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하셨다.  
이와 같이 절망할 수 밖에 없던 이 세상의 죄인들에게 완전 무결한 속죄제물이 준비된 것이다.                          
            
 그런데 앞께서 알게 된 바와 같이 모형적 속죄제물은 흠없는 수 염소 두 마리라고 하였는데 실제적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일인 이역 즉 두 마리 수 염소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이다.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로서는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참으시며 산채로 버림 받으신 것이었고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로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시면서 버림 당하셨을 때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의 사명을 감당하셨고 옆구리를 창에 찔려 피를 흘리시며 죽으실 때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의 사명을 감당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아사셀이란 무엇인가?  
아사셀이란 말은 모세 당시에 민간신화 가운데 나오는 귀신의 일종을 가리켜 말한다.   
이 속죄하는 제사를 드릴 때의 아사셀이란 악령세계의 최고 통치자 즉 사단 곧 지옥의 왕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은 곧 사단을 만족시키는 제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적 속죄하는 제사를 드릴 때 아사셀 즉 사단을 만족시키는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에덴낙원에서 타락한 후 원죄와 자범죄를 가지고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산 채로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지옥형벌을 받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대신 지옥 형벌을 받아주셨기 때문에 지옥형벌을 면제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피 흘리는 속죄제물 즉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이 피를 흘린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피를 모두 흘려 주신 것을  상징한다.     
  이상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속죄제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셨다.
                                                                 
 

    

나) 대제사장

 

 

 모형적 속죄제에서 대제사장은 먼저 자기를 위하여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야만 백성들을 위한 제사를 집행하는 대제사장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제사장 자신도 죄인이므로 대제사장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의인이어야만 대제사장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원죄와 자범죄가 전혀 없는 의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므로 실제적 속죄제에서의 대제사장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히 3:1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신다면 모순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속죄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속죄제물로서 죽으셨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는 속죄제물의 사명을 감당하신 것이다.  그때까지는 속죄제물이었으므로 결코 대제사장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속죄제물로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위하여 대제사장의 자격을 갖추게 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의인으로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시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끝나셨다면 성도들을 위한 대제사장이 없었을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으므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나 석가모니 혹은 소크라테스 같은 성현군자들이라도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될 수 없고 교회의 담임 목회자 들도 대제사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과 같은 모든 사람들은 죄악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한 분 의인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속죄하는 제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상과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과 대제사장으로 준비되신 것이다.
 히 7:26-28을 보면,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고 하였다.
     

 

 

 

 

 

     

다) 뜰

 

 

 

                                                           
  뜰에 있는 번제소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로 준비된 수 염소가 피를 흘리고 죽임을 당한 곳이므로 실제적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죽임을 당하신 골고다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속죄제물의 피를 흘리게 하기 위한 번제소로 골고다 언덕을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 성막의 속죄소

 

  성막은 죄가 없고 거룩한 장소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세상에는 결코 실제로 거룩한 장소를 찾아 볼 수 없다.   교회나 사람들의 심령 속에는 죄가 있으므로 거룩한 곳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적으로 거룩한 장소는 천국 뿐이고 이 세상에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막으로 상징한 실제적 장소는 영계의 천국이라는 것이다.        히8:5을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새가 장막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성막은 천국을 상징하는 곳이므로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 위 하나님의 보좌는 실제적으로 천국의 시온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드려지는 속죄제는 이 세상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 있는 천국까지도 제사를 드리는데 꼭 필요한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알게 된 바와 같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한 네 가지 준비해야 될 조건들을 보면, 속죄제물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시고 대제사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고 뜰의 번제소는 골고다 언덕이고 성막은 영계의 천국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 실제적 속죄제의 진행과정에 대하여 알아보자.

 

 

 

 

 

 

 

 (2) 실제적 속죄제를 드리는 과정  

 

                                                         가

) 분향

 

 

 실제적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모형적 속죄제와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분향이다. 즉 하나님의 보좌를 향연으로 가려야만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모형적 속죄제에서 만약 향연을 피우지 않는다거나 법을 어기면 대제사장이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속죄제를 드릴 때 분향을 먼저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5:8을 보면,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향연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한다.  따라서 모형적 속죄제에서 향연으로 속죄소 즉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운다는 것은 속죄함 받기를 소원하는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출애굽한 성도들은 완전한 구원을 받을 때까지 범죄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나 죄악성 때문에 고민을 할 때 끊임없이 속죄를 위한 기도를 드리게 된다.  그러므로 분향을 먼저 하는 이유는 성도들이 속죄은총을 기원하는데 대한 응답으로 속죄제가 드려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향연 즉 성도들의 기도는 의식주에 관한 것이나 신령한 은사들이나 능력 등등을 간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직 죄 문제 때문에 드려지는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속죄제를 받으시고  속죄은총을 준비해 주신 것이다.

 

 

 

 

 


     나) 뜰에서 속죄제물이 희생 당함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속죄제물이 여호와를 위하여 피흘리는 수 염소와 아사셀을 위하여 버림받는 수염소로 구별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두 가지 속죄제물의 사명을 감당하신 것의 모형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죄가 없으신 의인이셨기 때문에 흠없는 속죄제물이 되신 것이다.

 

 

 

          ㄱ) 아사셀을 위하여 버림 받은 속죄제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시면서 고통을 당하셨다.  그리고 아사셀을 위한 수 염소가 버려지는 광야 무인지경이란 성막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없는 곳 즉 천국과 천국 백성들이 없는 지옥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받으시며 버림 당하신 것은 앞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원죄와 자범죄 때문에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성도들을 대신하여 산채로 버림을 당하심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지옥 형벌을 면제 받게 하신 것을 의미한다.

 

 

 

 

 

          ㄴ) 여호와를 위하여 피 흘리는 속죄제물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신 후에 피 한 방울 남김없이 흘려 주시고 죽으신 것은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의 사명을 감당하신 것이다.  여호와를 위한 수 염소는 죽으면서 흘린 피를 속죄소에 뿌리기 위한 속죄제물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여호와를 위하여 피 흘리는 속죄제물은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을 드려서 지옥형벌을 면제 받은 성도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정결하게 하는데 필요한 제물이다. 

 

 이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다) 성막의 속죄소에 피를 뿌려 속죄은총을 준비함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셨는데 두 가지 사명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다.     

 

 성막은 천국의 모형이므로 모형적 속죄제에서 대제사장이 성막에 들어가 지성소의 속죄소에 피를 뿌린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사 천국의 속죄소에 피를 뿌리심으로 속죄은총을 준비해 주신 사실에 대한 모형인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면 누가 어떻게 성막 즉 천국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부활된 몸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속죄소에 피를 뿌리러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즉 육체를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때는 속죄제물로서의 사명만 수행하신 것이고 성막의 속죄소에 피를 뿌려야 할 대제사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이다.   그리고 모형적 속죄제를 드릴 때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성막의 속죄소로 들어간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피 묻은 몸을 가지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즉 속죄소에 들어가신 것을 상징한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모형적 속죄제에서는 대제사장이 레위인들과 장로들에 의하여 준비된 속죄제물의 피를 그릇에 담아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에 뿌렸는데 실제적 속죄제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피를 그릇에 담아서 천국으로 가지고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부활된 몸에도 묻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승천하신 것이다.       그리고 모형적 속죄제를 드릴 때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성막으로 들어가서 피를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없게 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가?  

것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천국의 속죄소 즉 하나님의 보좌에 피를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없게 하신 것에 대한 모형이다.  그리고 모형적 속죄제에서 보면,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속죄소 위에 한 번, 속죄소 앞에 일곱 번 피를 뿌렸다.   속죄소 위에 한 번 피를 뿌린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성도들의 자범죄를 용서하시는 은총 즉 사죄은총을 준비하신 것에 대한 모형이다.   또한 속죄소 앞에 일곱 번 피를 뿌린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정을 성결케 하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성도들의 일곱가지 죄악성을 제거하는 성결은총 즉 영적할례은총을 준비하신 것에 대한 모형이다.
  대제사장 피를 뿌린 다음에 성막에서 세마포 의관을 벗고 나옴으로써 속죄제 드리는 과정을 끝내게 된다.  
이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피를 뿌려 준비하신 사죄은총과 영적할례은총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공급하시기 위하여 성령께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강림하신 사건을 상징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제사장이 성막에서 나오는 것을 예수님의 지상재림으로 보려고 하는데 잘못된 견해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상재림은 성도들을 정결케 하는 일이 끝나는 때이기 때문에 해당이 안된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성막 밖으로 나온 것은 성도들을 정결케 하시는 일을 시작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에 대한 모형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형적 속죄제에서 대제사장이 성막 밖으로 나오는 것과 성령강림 사건이 같다는 것인가?      요 16:14을 보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하였다.  이 말씀은 성령님께서 "내 것" 즉 예수님의 모든 것을 가지고 오신다는 말이다.  성령님께서 가지고 오시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수님의 희생으로 준비된 사죄은총과 영적할례은총인 것이다.         또 요14:16-17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셨지만 성령님께서는 육체가 아닌 영으로 오셔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 거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강림 사건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천국으로부터 나오실 때 직접 나오시지 않고 성령님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대신하여 나오시도록 하였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모형적 속죄제에서 대제사장이 밖으로 나와야 백성들이 속죄제가 다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듯이 실제적 속죄제에서도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모든 속죄제가 끝났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속죄제가 끝나게 됨으로써 사죄은총과 영적할례은총이 준비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속죄은총은 지금부터 1900여년 전에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이제부터 성령님께서 어떤 삶들에게 속죄은총을 공급하시는가에 대하여 알아보자. 

첫째,

성도들이 구원 받을 때 즉 출애굽할 때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나타내주시고 그와 동시에 사죄은총을 공급하여 과거에 범죄한 모든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속죄은총을 공급받지 않는다면 아무도 출애굽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성도들은 출애굽한 후 광야의 길을 통과하면서 많은 죄를 범하고 회개하게 되는데 이런 자범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게 하고 양심에 평안을 얻게 하여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정진하도록 도와 주신다.  셋째로 광야연단 과정을 통과하여 자기 옷 즉 자기 행실을 정결케 한 후 영적할례은총을 받게 하신다.  따라서 성도들은 출애굽할 때부터 광야 연단 과정을 다 마치고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오직 예수님의 속죄은총으로만 정결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 바라보면 모든 속죄은총을 다 받고 구원이 완성된 줄로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속죄은총을 다 받은 것이 아니고 단지 준비된 것을 바라보는 것 뿐이다. 성도들 각자의 몫으로 은총은 준비되었지만 성도들 개개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처음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속죄은총이 준비되었 다는 것을 알게 한 것뿐이고 성도들에게는 아직 실제적이며 경험적으로 적용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준비해 주신 속죄은총이 어떻게 해야 성도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하여 오순절날 성령님께서 속죄은총 즉 사죄은총과 영적할례은총을 가지고 나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님께서 가지고 오신 사죄은총과 성결은총 즉 영적할례 은총을 받아야만 여호와 앞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해 보자.

 

 예수님께서 속죄제를 드리신 것은 성도들을 위하여 속죄은총을 준비해 놓으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교역자들과 성도들은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처음 믿을 때 이미 해결된 줄로 착각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속죄제를 드리심으로 속죄은총이 준비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계속하여 번제를 드려서 그 속죄은총이 성도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속죄은총이 완전하게 준비되었고 이후에는 이 은총을 성도들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광야를 통과하는 성도들은 순간순간 속죄은총을 받아 실제적으로 적용하면서 심령과 행실이 점진적으로 정결케 되는 것이다.
   
 속죄론이 이와 같이 뚜렷한데도 속죄제를 드린 것만으로 다 된 줄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즉 믿기만 하면 다 된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매일매일 번제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대속죄일에 드리는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대신하여 번제 드려주신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드려주신 번제로 말미암아 헌신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신 은총을 힘입어 매일매일 번제 드리는 생활을 계속하여야 하는데 이것을 성도들의 상번제라고 말한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 사건은 인류 역사 가운데 오직 한번 예수님에 의해 속죄제가 드려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실제적 속죄제 즉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 사건들은 출애굽한 성도들을 위한 사죄은총과 영적할례은총이 준비된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며 이 땅에 내려오신 성령님께서는 사죄은총과  영적할례은총을 모든 성도들에게 공급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2) 실 제 적 번 제     

 

 

 

 (1) 실제적 번제 드릴 준비와 드리는 과정                                 

 

 

 

 

속죄제

가 끝난 후에 대제사장은 본래의 대제사장 복을 입고 번제를 드린다.  번제물은 흠없는 수 양 한 마리인데 이것은 거룩하고 의인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 당하신 것은 속죄제물로서 뿐만 아니라 번제물로서도 모든 성도들을 대신하여 헌신 즉 번제 드리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속죄일에 드리는 번제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드리는 번제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모든 성도들의 속죄를 위한 회생적 번제를 드려주셨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이 헌신하는 것조차도 은총으로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을 당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대제사장이 번제드린 것은 성령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죄 문제 해결을 위한 헌신을 할 수 있도록 은총으로 도와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헌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상번제를 드리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헌신은 앞에서 이미 말 한 바와 같이 성도들이 교회에 나가서 전도하거나 구제하거나 봉사하는 것 등의 헌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헌신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헌신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성도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참회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도 학고 때로는 걸어 다니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가슴을 치며 회개하기도 하고 탄식하며 한숨 쉬기도 하고 대성통곡하면서 회개하기도 하고 금식하면서 용서를 빌기도 한다 .   그리고 어떤 성도들은 마음에 나타나는 죄의 법칙 때문에 고민하면서 영적할례은총을 사모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타나는 마음과 행실들은 성령님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 문제 때문에 안타까와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성도들의 선한 의지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성도들 안에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곧 죄 문제를 해결할 때 생기는 마음이나 언행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이다.  성도들  개개인은 이와같이 성령님의 역사와 은총을 힘 입어 번제 드리는 생활을 계속하게 될 때 즉 상번제를 계속 드릴 때 점진적으로 정결케 되어 결국 가나안 땅 쪽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성도들이 번제 드린 실례를 알아보자.

 

  어느날 성 배네딕또가 스비아꼬 산속의 한 동굴에 누워 있었는데  한쪽에는 돌 위에 성경이 펼쳐져 있고 십자가가 놓여 있었으며 다른  쪽에는 그릇이나 푸대 같은 여러 물건들이 있었다. 그때 베네딕또는 누워서 옛날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고향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다  알고 있는 여러 사람들까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옛 애인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 음욕이 치밀어 올라와서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때 보니, 동굴 입구에 예쁜 여자가 옷을 다 벗은 채로 서 있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다름 아닌 베네딕또의 옛 애인이었다.   베네딕또는 깜짝 놀라면서 "아니, 당신이 웬일이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 여자는 동굴 안으로 들어오면서 "베네딕또 추워요" 라고 하면서 배네딕또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베네딕또는 "이러면 안되지" 라고 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옷을 벗어 애인의 벗은 몸을 가려 주려고 하였다. 그때 그 여자는 "추워요 베네딕또, 안아주세요" 라고 하면서 가까이 다가왔는데 베네딕또는 처음에 고개를 떨구다가 그 여자의 나체를 보고서는 그만 껴안아 버렸다.   그러자 그 순간에 여자는 마귀로 변하여 동굴 밖으로 나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동굴 속에는 기분 나쁜 마귀의 웃음소리가 계속  울렸다.  그 여자가 마귀였다는 것과 자신이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은 베네딕또는 크게 후회를 하면서 동굴밖으로 나가 산 속에 잇는 가시덩굴 속에 들어가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가시가 베네딕또의  온 몸을 푹푹 찔렀다.  나중에는 스스로 온 몸이 더욱 찔리도록 뒤틀면서 쉬지 않고 애통하며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몸에서는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베네딕또의 눈에서는 참회의 눈물이 더욱 흘러 내렸다. 

 

 이

같이 베네딕또 성인께서 참회하는 모습은 참 번제를 드리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죄를 범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고 철저히 회개하는 모습은 성령님께서 베네딕또 성인에게 죄 문제에 대하여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셨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이때 성령님께서는 사죄은총을 공급해주셔서 용서받은 확신과 새로운 희망을 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조그만 죄라도 안타까와 하면서 주님께 용서함을 받고자 철저히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실례를 들어보자.                                               

  
 어떤

목사님이 안마소에 가서 여자 안마사에게 안마를 받는 중에 그만 음욕에 사로잡혀 그 여자를 강간하게 되었다. 그 다음날 그 목사님은 집으로 돌아와서 태연하게 어제 일을 생각하며 기도하는데 잠시 앉아있다가 그냥 일어났다.  기도를 하면서 애통하는 마음도 없이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라고 점잖게 기도하다가 마쳤다.  그리고 며칠 후 주일이 되자 교회에 나가서 여전히 태연하게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볼 때 그 목사님은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사라는 직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욕적인 쾌락을 추구하였고 간음죄까지 저질렀으므로 크게 애통하면서 회개하여도 모자랄 터인데 잠시 앉아서 형식적으로 기도한 것을  어떻게 진정한 번제를 드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베네딕또 성인의 회개와 비교한다면  이 목사님은 참 번제를 드린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 번제에 대하여 설명했던 모든 진리들을 좀 더 알기 쉽게 정돈해 보자.                                        
   

에서 알게 된 바와 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성도들을 위한 속죄은총이 준비되었다.  속죄소 위에 피를 한 번 뿌려 사죄은총 즉 성도들이 범한 죄를 용서받게 되는 은총이 준비되었고, 속죄소 앞에 일곱 번 피를 뿌림으로써 성결은총 즉 죄악성이 제거되는 영적할례은총이 준비되었다.
 
 레 16:~16, 9에 나오는 부정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심령 속에 일곱가지 죄악성 즉 원죄가 뿌리 박혀 있으므로 마치 문둥병과 같이 부정한 병에 걸려있는 것과 같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이와 같은 부정 즉 일곱 가지 죄악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속죄소 앞에 일곱 번 피를 뿌린 것이다.
   일곱 가지 죄악성을 일곱 번 피를 뿌려 제거하는 영적할례은총에 대해서는 레 16:14-16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혼동하기 쉽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레 16:15의 하반절과 16절의 상반절을 보면 그 순서가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레 16:14, 15에서는 속죄소 위에 한 번 피 뿌리고 속죄소 앞에 밀곱번 피뿌리고라고 하였고 16절에는 백성들의 부정과 백성들의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19절 말씀을 보지 않으면 한 번 피 뿌린 것은 부정을 위한 것이고 일곱 번 피 뿌린 것은 백성들의 범한 죄를 위한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9절 말씀을 대입시켜 보면,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 라고 하였으므로 부정은 일곱 번 피를 뿌려  일곱가지 죄악성을 제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 번 피를 뿌린 것은 백성들의 범한 죄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성령강림은 사죄은총과 영적할례은총을 가지신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켜 말한다.   또한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목적은 성도들 개인개인에게 속죄은총을 공급해 주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번제를  드리는 것은 성령님을 통하여 사죄은총과 영적할례은총을 경험적으로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번제까지 드려야만 여호와 앞에서 완전히 정결해진 성도들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축도를 할 때 들어보면,"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하심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으로 하여금 만세 전부터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게 하셨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독생자를 보내실 것을 예언하도록 하셨다.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사 준비해 주신 속죄은총을 가리켜 말한다.    또한 성령님의  교통하심은 성령님께서 속죄은총을 가지고 오순절날 이 땅에 오신 때부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모든 성도들에게 공급해 주시는 사역을 가리켜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의 교통하심이라는 것은 성령님께서 성도들이 번제를 드릴 때 마다 사죄은총과 영적할례은총을 전달해 주시는 사역을 가리켜 말한다.        

이와

같은 진리를 쉽게 이해하도록 예화를 들어 설명해 보자.
 대학생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는데 시골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부였다.  
이 아버지는 공부하는 아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였으며 특히 학비나 용돈 등을 비롯하여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려고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더위가 극심할 때나 병충해가 심할 때에도 괴로움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을 하였다.  이와같이 아들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수고한 결과 사자, 배, 포도, 참회, 수박 등의 과일을 풍성하게 수확하였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준비해 놓은 은혜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준비해 놓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수확한 과일들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공급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그 과일들을 팔아서 돈으로 만들어 보내주어야만 학비도 내고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과일을 팔아 송금을 하게 되면 우편 배달부를 통하여 사랑하는 아들에게 공급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예화를  분석해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하심에 대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적으로 일을 하여 많은 과일을 수확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속죄은총을 준비해 놓으신 것을 가리켜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수확한 과일들을 돈으로 바꾸어 아들에게 배달해 주지 않는다면 아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속죄은총도 성도들에게 배달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속죄은총을 성도들에게 배달해 주시기 위하여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께서는 속죄은총을 성도들에게 배달해 주시는 우체부와 같은 역할을 해 주시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돈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만세 전부터 독생자를 보내시고자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사죄은총과 영적할례은총을 완성시켜 놓으셨다.  이렇게 준비된 속죄은총을 성도들이 상번제를 드릴 때마다 항상 공급해 주시는데 그것은 성령님께서 성도들과 교통하심으로 전달해 주시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성도들이 순간순간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마다 또는 성결의 은총을 필요로 할 때 성령님께서 속죄은총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침에 아내에게 신경질을 낸 것이라든가 저녁에 아이들 때문에 짜증내고 혈기부린 것 등의 죄악들을 순간순간 용서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안타까와 하며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참회할 때 즉시 우편배달부처럼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사죄은총을 공급하여 평안을 주시는 것이다.  곧 "내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으로 속죄제를 드려 준비된 사죄은총을 너에게 주노라"고 하시는 속죄은총이 성도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성도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와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은 매일매일 생활하면서 이와 같은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자기 행실"이  광야 연단과정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님의 교통하심으로 자기 행실이 정결케 되는 원리이다.                  이러한 성령님의 교통하심에 의한 성도들의 번제드리는 생활은 출애굽할 때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속죄제를 드려서 준비해 놓으신 속죄은총을 성령님께서 가지고 나오셨는데 성령님께서는 이 속죄은총을 성도들이 출애굽할 때부터 공급하시고 실제적으로 적용해 주신다든 말이다.
 이렇게 성도들이 번제드리는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죄 문제가 모두 해결되면 성도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즉, 성도들이 번제를 드리면서 광야 연단과정을 마치게 되면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졌기 때문에 영적할례 즉 흰 옷 입는 은총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할례를 받은 교회시대의 이긴 자들 일지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죄를 범하게 될 경우에는 번제를 드려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출애굽한지 얼마 안되어 영적으로 어린 성도가 "영적할례를 받고 싶은데 지금 주십시오"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기다려라 아직 받을 만한 준비가 되지 못했다.  너희 행실을 정결케 하고 가나안 땅 입구에 가면 받게 된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속죄은총 즉 사죄은총과 영적할례은총은 성령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주시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보잘 것없는 성도들일지라도 이미 그리스도의 회생을 받으셨기 때문에 속죄은총을 필연적으로 주시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속죄은총만은 틀림없이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어떠한 죄를 범하든 진정으로 참회하기만 하면 용서받은 줄로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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