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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 방에서의 주일 아침 기도 ( 시 88:1-18 )

주하인 2010. 6. 27. 10:36

제 88 장 ( Chapter 88, Psalm ) 

  이 학교는 아니고

이런 대낮은 아니지만

이런 생기는 맞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은

세상의 것과는 다릅니다

훨씬 더 밝고

훨씬 더 맑고

훨씬 더 생기넘치고

훨씬 더 기쁨입니다

 

주님의 앞에

늘 상달되는

내 기도되길 바랍니다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  

 

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주야로

주의 앞에서

부르짖는 기도를 할 수 있길

나는

간절히 바란다.


 
2.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내 기도할 때

내 기도가 주님께 상달됨을 늘 ~ 확신할 수 있길 바란다.

주께서 내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심을 느낄 수 있길 원한다.

 

 

 어제 저녁 우루과이랑 16강전 하는 것을 새벽까지 보고는

낮동안 내내 키지 않았던 TV에 붙들려서는

새벽까지 누워서 보다가

겨우 잠을 이루었다.

 하지만 당직방에서 자면 이상하게 개운하게 아침에 깨게 된다.

자는 시간이나 내 그 전날 잘잘못이랑 상관없이..

아마도 기도하는 것을 바라시는 주님의 뜻이리라.

그게 회개이던

이전에 그리 풍성하게 누리던 하나님과의 동행을 기억나게 하시려는 뜻이시던

무엇이던 간에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받고자 하시는 뜻이신 것으로 받아들여

얼른 일어나 침대 맡에서 무릎을 꿇었다.

 

주님을

찬양하는 기도로 시작하여

감사하는 기도

회개하는 기도

중보하는 기도

간구하는 기도.. .

순서대로 짧게 짧게 기도하다 보니

몇가지 생각이 자유롭게 기도하는 내 머리 속을 떠돈다.

   


3.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왔사오니  
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5.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데 두셨사오며  
7.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셀라)  
8.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이전에 겪던 그 곤란들..

예수님 믿기 전에 ,

믿고 나서도 한참이나

말씀을 본격적으로 묵상하기 이전에 그토록 힘들었던 일들이 떠 올랐다.

내 인생은 어려서 부터 돌아보면

그리 밝은 기억이 별로 없는 듯하다.

늘 힘들고 답답하고 두렵고 어둡고 비전이 없는 삶.....

하시라도 빨리 커서 '미국'으로 이민 가버리거나

얼른 나이 들어 죽었으면.....하던 바램으로 그득차 있던 것만 기억난다.

기도하고 나서 들여다 본

위의 나열된 시편 묵상 구절에 그 마음이 그대로 적혀 있음을 보고는

'참으로 하나님이 또 나를 하나 하나 만지시고 공감하시는 구나'하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저분, 시편을 쓰신 분은 당시에 '주님'을 깊이 만나는 분이라서

저 고통을 저렇게나 고백할 수 있었지

그 동안, 특별히 어렸을 적 내 마음은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도 없는

깊은 막막함이었음이 생각나니

스스로 내 그 때의 기억이 나 가슴이 멍하다.

 그러나, 기도 중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이러신 것 같이 내 뇌리 속을 스치고 지났다.

그렇다.

'하나님, 살아계시다고 하시고

말씀 중에 분명코 태에서 남으로 부터 안고 배에서 남으로 부터 안아 주시고

노년까지 백발까지 그리하겠다 하시는 이유로

당신께서 나를 지으셨다고, 내 장부까지 만드셨다고 하시면서

그 때 그 어려운 시절을 왜 그냥 두셨어요~~?'라는...

하지만 분명코 난 기도 중 '원망'이 옅어져 있었다.

그것은 심한 질병을 건너오고 회복되어 가는 나른함을 깨달은 자의

생기도는 눈빛으로 떼는 첫마디 같은

그런 느낌이 맞다.

나.

주님과 많이 친해져 있음이 사실인 것을 스스로 느낀다.

그 분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기도가 그 분께 상달됨을 조금씩 믿는 게 맞는 것 같다.

그게 기뻤다.

위의 첫구절에서 그러지 않으시는가?

그 고백이 나의 스스로의 느낌이 맞다.

앞으로 훨씬 더 강력한 저런 믿음의 기도가 필요하다.

 

 어쨋든,

주님의 응답이신 듯한 깨달음이 이렇다.

' 누구에게나 달란트대로 허락된 '고난의 분량'이 있다. '

' 그 고난의 분량은 주님 만이 아신다.

 그 고난은 자신의 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주님을 모르던, 잘모르던 시절까지

나에게 허락되었던 것은 그 분량 내의 고통이고

그 고난을 잘 견뎌 왔던 탓으로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훨씬 마음이 가벼워 진다.

날 힘들게 했던 '의미있는 타인'들에 대한 원망이나 원통이

조금은 더 줄어 듦을 느낀다.

 최근에 내 뇌리의 레이더에 걸려드는 '미움의 물고기'들을

다시 놔 줄수 있을 것만도 같다.

주님이 허락하신 고난의 분량이 얼른 얼른 소진되려면

빨리 미움을 내려놓고 모든 용서를 다 하여야 하는 게 아니던가?

 그 대상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조금만 잘못하면 늘 자책하는 ..

자책이란 무엇인가?

'난 안돼,

 역시 나는...

 나만 가면......'

그러면서 타인의 손가락질에 조금더 민감해지는

그게 자책이고

그 자책은 자신을 미워하는것이다.

그 미움의 실체는 내가 아니다.

분명코 잘못형성된 개념이 맞다.

주님의 성령의 열매에 의한 '온유, 희락, 화평, 사랑....'의 감정에는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틀림없이 사단의 영역이 아닌가?

그렇다면 버려야지..

마음이 편하다.

아침의 기도가 너무 좋다.

 성결대 아랫쪽에 위치한 '샘 여성병원' .

성결대는 산 속에 위치하고 있다.

그 우측으로 큰아들이 다니던 성문 고등학교 역시 산속 중턱에 위치하고

병원은 그 아래에 위치하여

아침이 되면 '산새소리' 지저귀며

시원한 산 바람이 살그머니 내려와

맑은 아침햇살과 더불어 내 당직방을 안온하게 감싼다.

생기가 느껴진다.

하나님의 위로 같다.

그 분의 만지심 같다. 
  
 
 
13.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한편의 시 운율같다.

시편이 시편인 이유다.

 이 구절의

이 운율의 흐름을 보며

눈물이 시끈하게 차오름이 느껴졌다.

가슴의 한켠이 따뜻해지며 촉촉한 감성이 올라옴을 느꼈다.

그 분은 내 가슴을 이 운율로 어루 만지시며

'내가

 당직방에서 피곤한 몸을 들어 일어나

 기도를 드림을 기뻐하신다'라는 생각이 순간 스쳤다.

아...

누구도 알수 없는..

그러나 기도하고 임재감을 느낄 수 있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비밀스럽고 세미한 음성'.

살아계시지만

누구도 살아계심을 인정하기도 어렵기도 하지만

누구나 살아계심을

조금만 깨어 있으면 알 수있는 그런 감동.

그게 이 구절을 보면서 느껴진다.

 '주하인아

 네가 아침 기도를 하는 구나

 내 가 네 기도를 기뻐한다'   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 느낌을 아침의 시편 구절을 통하여

이렇듯 뚜렷이 말씀해주시는 듯해서

그게 참으로 감동스럽다.

아.

주님은 살아계신다.

정말 주님 앞에 하나도 드린 노력이 없지만

그냥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내 삶의 동행하심을 깨닫고 잊지 않으려는

약간의 몸부림 만을 가지고도

그 분은 이리 기뻐하시는 구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내 기도가 주님 앞에 다 들어 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님은 그리 말씀하시지 않는가?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였다..라고...

감사하다.

오늘은 주일이다.

주님의 날이다.

이 주님의 날에

주님의 이해하심과 인정하심과 어루만지심과

살아계신 그분이 나에게 직접하시는 소리를 들은 아침이다.

 

 

기도

 

주님

귀하시고 놀라우신 주님

주님을 더 깊이 만나고 싶은

주하인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조금 더 기도의 시간을 늘리고

유혹적인 세상의 것들,

TV나 눈을 잡아끌고 배의 식성을 잡아다니고

잠을 더 자게 하는 등..

이런 것들을 절제하고 달려나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족하지만

주님은 그럼에도 시간만 되시면 저를 만나주고

날 사랑한다

네 모든 것을 다 안다

네 속의 어떤 것도 내 '선'속에 있다..라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듯합니다.

 당직.

듣기에도 피곤한 저 단어가

오히려 저에게는 기쁨처럼 들립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골프'를 치러 다니고

'관계'형성을 위해 허겁거릴 그때에

오히려 역으로 당직방에 쭈그려 앉아서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이런 감동을 느낌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비밀하고 놀라웁고 풍성한 감동이

이 나이에 남아 있게 해주시고

날이 갈수록 커지게 해 주심은

얼마나 감동인지요.

 잠깐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절히 젊음바쳐 세상의 중심가까이 간

내 동기생들과 나의 입장을 요.

부럽지가 않았습니다.

확실히 요.

난 뒤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앞에서 오실 영원한 생명의 구주를 쳐다보고 있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허덕이며

겨우 썩어질 그 곳에서 잠시 모두 이룬양 착각하고 있다가

진실이고 진리이신 주님이 재림하실 그날에

당황하고 말 저들이 한편으로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고난.

힘이 들고 돌아가기 싫지만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감동할 수 있는 상태로 해주심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것을 내 자식들과 내 이웃들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선한 흐름으로 내릴 수 있는 기회와 깨달음을 허락하심이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앞으로도 어떤 고난이 저에게 남아 있을지

전 정말 잘 모르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로 가끔은 당혹스러운 흔들림으로 다가올 때도 없지 않지만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주님의 하시는 것이 '선'한 것임을

단순히 아는 차원에서 넘어

조금은 '믿음'으로 담대하게 성장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전 오늘 제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제 흔들릴 때 시편의 고백처럼 다시 되뇌이면서

주님의 내 기도를 받아주심을 믿을 때

그 고난은 있더라도

제 영혼은 더욱 담대함과 감사함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주님 예수님.

주님을 영접하게 됨이

제 인생의 가장 잘한 일이고

가장 복된 일이고

가장 행운임을

깨닫게 되었음이

주님의 사랑탓이었음을

다시 한번 깊이 고백드립니다.

주님

주의 날을 경배합니다.

사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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