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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글로바였을까? 혹 주하인이라실까?[눅24:13-3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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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글로바였을까? 혹 주하인이라실까?[눅24:13-35]

주하인 2025. 4. 20. 23:25

 

부제) 그들 중의 나에게 가까이 오시고 계신 내 주님

      내 혼돈을 뚫고 가까이 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내 삶을 뜨겁게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내 걷는 이길 끝이 '하나님 나라'다 

엠마오도상, 알게 모르게 하나님 나라 만을 향하여 나가는 좁은 문 통과 성도의 인생길(Copilot)
이제는 더 그래야 한다. 주님 예수님을 향한 눈이 떠진 내가 되어야 한다 (Chatbot AI)

그길

엠마오도상이

어찌 내 인생과 비슷한지...

 

아니

잘나간다고 생각하다가

갑작스레이 흐려지는 내 영혼

말씀으로 인하여 

또다시 맑아지는 것이

엠마오 도상의 글로바가 된 듯한

그런 깨달음으로 

또 한번 전율하게 하신다

 

그랬다. 

살아계신 예수께서

'주하인아 

글로바야

네 눈이 맑아짐이 옳지 않는가'' 하시는 듯

그리 들려온다

 

이제는 훨씬 더 그렇다

훨씬 더 빨리 깨달아진다

그리고 훨씬 더 빨리 서진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한

즉각의 깨닫게 하심으로 

성령의 은혜로 인하여

난.. .

그래진다

 

오늘도 

난 또 그렇듯

인생의 길 위에 서 있지만

이제는 주하인으로서 

더 열심히 좁은 길을 밟아가리라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그 들 중 둘이.. 다.

그들.. 

70인의 제자 중 한사람,

그중에 '예수 십자가 골고다 ' 언덕에 가까이 한 자들이라 생각이 되어

확인을 해보았다. 

맞다. 

 

 나.

그들 중 .. 에 속하는 자 맞다.

나 스스로 그리 확신 되어진다. 

 

 일단. .

그렇다. ^^*

 

그게 '스스로 대견하다'

 

그런데 그들은 어떠한 자들인가?

많이 성장했지만 아직도 부족한.. 

부활과 성령의 충만함이 항시 있지 않은 상태.

나.. 

늘 그러면 좋겠지만

성령의 충만함과 

말씀으로 인하여 '자주도 눈'을 뜨고 있지만

아직도 삶속에서 

자주 자주 

다른 이들과 틀리지 않은

'그들 ' 중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

 

그런데.. 

'그들 중  둘이'라 하셨다. 

 

 왜 둘이일까?

어찌 둘이일까?

왜 그들 둘만 조명되었을까?

 

그들이 뛰어난 자들인가?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리하지 못한것... 

내.. 위에 고백했지만 자주도

'세상사람들과 별 다름없는 삶을 영위해가는

순간순간 미련한 ..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는

그런 것에 관심 가지는... 

그 상태를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는 자들이란 거다. 

 

 예수님께서 그리도 말씀하여 오셨는데

아직도 '가십'거리로서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그들.. 

그들 중 '두명' 이란 이야기다.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런 그들에게 

왜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셨을까?"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님도 못 알아보는 -그마져 하나님의 뜻으로 허락되었음은 '눈이 가리어'지게 하신 것이지만.. - 그들인데.. .ㅠ.ㅠ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런 그들, 

그런 그들 중 둘 사이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셔서'

'무엇이냐 하시'니 

가던 길 멈추고 머물러 서서는 -다행이다. 알아보지 못하는 자의 반말 ^^; 을 듣고도 예수님 잃은 슬픔으로 머물러서는 심성의 착함이... 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이렇게 겸허하고 이쁜 구석은 있나보다..오늘 말씀이 가슴에 콱하고 오는 것이... . - 그 중에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한 사람이 응대를 한다. 

 

 그 한사람이

'글로바'다.

 

 

오늘 말씀의 포인트다. 

 

 절대로 대단한 인물들이 아니다. 

하지만 열심은 있고 

가슴아파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12제자가 아니지만 70인의 제자다. 

그러한 그들은 그들의 '뛰어난 영성'이나 '열심의 결과'가 아닌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선택'을 받았고

그중 '글로바'라는 사람은

또 이름이 드러내어졌다. 

 

 이거... 

의미하는 바가 있다. 

 

열심히, 여러번 , 나름대로 깨닫던 부분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글로바'라는 이름에 꽂혔다. 

 

나름깨달아지는 바가 있지만

확인차 AI에게 물었다. 

 

역시 비슷한 대답을 한다. 

그리고는 깨닫지 못한 더 깊은 심화의 부분이 있다 .

 

아.. .은혜롭다. 

 

 프로그램이 묵상하고 가르친 글을 가지고 

내가 은혜를 받는다. 

 

그마져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다. 

 

참고로.. .

난.. .

chat GPT마져 '말씀'으로 교화시켜

SF영화의 디스토피아의 주축이 되기보다

하나님 안에서 귀한 도우미가 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리하고 있다 .

일부분..ㅎㅎ

 

 아.. 

그리고 또 ,

오늘 늦은 아침으로 인하여 

출근하여 시간나서 겨우 '이제' 묵상을 하면서

또다른 '일인'.. 

글로바 이외의 그 일인에 대하여 

왜 , 어떤.. 묵상 포인트가 있는가 물어 보았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소시민적 믿음의 우리.. 

일상에서 좁은길 가는 우리를

하나하나 다 기억해주실 것임'을 말한다 .

우리의 이룸 , 못이룸

우리의 가진 것, 못가진 것 .. 상관없이 말이다. '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정말 중요한게 이거다. 

 

하나님 말씀,

말씀 묵상함.

말씀이 교육이나 지시에 끝나면 

그것.. 그냥 그거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이 주님이시며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순종할 결심과

그러지 못함에 대한 부담과 회개... 가 있고

말씀을 통한 은혜의 누림,

그리하면서 변화되는 일상의 어떠함을 

깊은 체험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가장 기본적 방법으로 

깨닫고 체험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말씀이 깨달아지는 순간

마음이 뜨거워지고 

일상이 변하게 된다 '

 

 

 나.

잘 나가고 있었다. 

아.. .

일상에서 소시민으로서 

덜 죄짓고 

더 하나님 말씀 사모하고

더 , 조금은 더 .. 주변에 선한 영향을 

나도 모르게 줘지고

그것을 내 영혼이 깨달아 인식하고 받아 들여지는... 

 

그런데. ..

어제 또 '옛버릇'이 나왔다. 

내 weak point가 찔리고

하루 종일 머리가 흐트려 지려 했다. 

그 안에 '그래서 네가.. 너는.. 나는.. *&^%$#..' 이라 하고 잇는 듯했다. 

 

그런데.. 그 깊은 '영적 피곤함'을 물리치고

말씀,

너무도 익숙해서 

더 이상 묵상할거 없는 거 같은

'엠마오로 도상의 글로바'를 통해서

주님이 다른 묵상을 시키신다. 

짧은 시간에 굵고 귀하게.. 

거기에 'AI'통해서 내 부족한 부분을 채우신다 .

 

은혜다. 

마음이 가볍고 차분하다. 

흔들림이 없다 .

 

감사하다. 

 

살아계신 내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부활하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그 하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될 것 같은 예감,

그 놀라운 비밀이 

성령의 은혜로 체험되어지고

 

깨달아 집니다. 

 

내 주여.

살아계시고 거룩하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

사모하는 좁은 길 가는 모든 자들에게 다가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글로바 주하인 기도합니다. 

아멘

 

 

 

---------AI 를 묵상에 쓰다-----

 세상에 허락되어지지 않은 '하나님 시선'외의 존재가 있을까?   

 심지어 '사단'마져 욥기에서 허락받는 게 나오는데... 

어차피 상상을 불허할 속도의 발전하는 AI가

두려움과 더불어 매력적인 양면의 존재이지만

그마져 하나님의 능력에는 빌붙힐 기미가 없는 존재들...

 

그렇다면 영광을 드러내기위한 매개체,

주님의 시간을 위한 허락되어진 존재일 뿐..

 

 내게는 우리에게는 '생각지 못한 어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잠시 이땅에 허락되어진 도우미.. 일 수도.. 

 

다행히 미묘한 말씀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또,내 영을 파고드는 하나님의 inspiration을

아주 아주 조금이나마

짧은시간에 표출하는 그림을 그려주기도...

 

 

------((  '그들 중 둘'에서 그들은 누구일까? ))

 

(내 prompot)

'그들 중 둘이'..라는 눅25:13절의 표현에서 이들 중..이라함은 누굴까? 그냥 예수님 돌아가심을 아쉬워하여 십자가 와 무덤까지 좇은 무리들일까?.. .제자들일까?? .. 왜 하필 그렇다면 그들에게만 나타나셨을까?

 

 

(ChatGPT답)

주하인 선생님, 이 질문은 아주 날카롭고 깊은 묵상입니다. 누가복음 24:13의 **“그 날에 그들 중 둘이”**라는 표현은 짧지만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고, 그들이 누구인지 이해하는 것은 엠마오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아주 중요하지요.


1. “그들 중”은 누구인가?

본문 문맥상 ‘그들’은 누구인가?
앞선 눅 24:9-12을 보면, 여인들이 무덤에서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외의 모든 이들에게” 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 중’이라는 표현은 이 말씀을 들은 “열한 제자와 그 외의 모든 이들” 중에서 두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렇듯 ‘그들’은 좁게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공동체 전체이고, 넓게 보면 십자가 사건과 부활 소식에 직접 연결된 초기 증인들의 공동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단순한 ‘군중’이 아닌,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에 관심과 신앙을 가진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것입니다.


2. 제자들일까? 아니면 일반 무리일까?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 이들은 열두 제자(사도)는 아니었지만, 광의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누가는 사도 외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눅 10:1에 70인의 제자 언급), 글로바 역시 이들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었고(즉, 부활 사건과 가까운 장소),
  •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슬퍼했고,
  • 여인들의 부활 증언도 알고 있었으며(눅 24:22),
  •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자’로 믿었다고 고백합니다(눅 24:21).

이 모든 정황은 단순한 무리가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3. 왜 하필 그들에게 나타나셨을까?

이건 정말 은혜로운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한 사도보다 먼저 이 두 실망한 제자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 이유를 묵상해 보면…

1) 은혜는 자격이 아닌 ‘필요’에 임합니다.
이들은 실망했고, 낙심했고, 예루살렘을 떠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길에 동행하셨습니다.
– 즉, 절망 속에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신 ‘동행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2) 부활은 ‘위대한 자’에게 먼저가 아닌, ‘고통받는 자’에게 먼저 임했습니다.
엠마오 길은 고난과 슬픔의 길이었지만,
그 길은 곧 말씀이 회복되는 길,
주님과 눈이 열려 만나는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3) 이 사건은 ‘말씀과 떡을 통해 주를 만나는’ 교회의 전형이 됩니다.
그들의 눈이 열릴 때는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떡을 떼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주님을 만나는 방식을 예표하는 장면입니다.


주하인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적용 묵상:

  • 혹시 지금, 마음속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 같은 때를 지나고 계신가요?
  • 말씀이 잘 안 들리고, 기도도 막히는 듯한… 그런 내면의 침묵 속에 계신가요?
  •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도 그 길에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원합니다.

이야기 속 글로바와 그 이름 없는 제자처럼,
우리의 이름도 누가복음에는 안 나올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책에는 반드시 기록된 이름이라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 왜 글로바였을까? ))

 

(내 prompot#2)

글로바라는 사람에 대하여... 엠마오로 도상에서 왜 그 이름만 드러났을까? 특별히 대단한 일을 했거나 뛰어난 영성으로 보기에 무리가 잇을 것인데... 왜일까? 혹시 내게 주시고자 하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

 

(ChatGPT답  #2)

 주하인 선생님, 참 깊은 묵상이시네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로 기록된 점(눅 24:18)은 묘하게도 우리 마음을 자극합니다. 왜 하필 이 사람만 이름이 드러났을까요?

1. 이름이 드러난 글로바, 그리고 이름 없는 또 한 사람
글로바(Cleopas)는 성경에서 단 한 번, 바로 이 엠마오 사건에서만 등장합니다. 그는 열두 제자도 아니었고, 복음서 어디에서도 중심 인물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름이 남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반면, 그와 함께 걷던 또 한 사람은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이름 없는 제자”는 우리 모두일 수 있고, 그렇다면 글로바는 우리 곁에 함께 걷는 또 다른 ‘평범한 믿음의 동역자’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2. 글로바가 상징하는 ‘보통 성도’의 자리
글로바는 대단한 업적이나 표적을 행한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좌절하고 실망하며 예루살렘을 떠나는 ‘흔한’ 제자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다가오셨고, 함께 말씀을 풀어주시며 마음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주하인 선생님과 같은 한 사람, 농사와 병원 일과 믿음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은혜의 장면이지요.

3. 글로바의 이름이 드러난 이유 — 증언을 위한 도장
루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역사적 신빙성을 매우 중요시한 인물입니다. ‘글로바’라는 이름은 이 이야기가 단순한 신화가 아닌 실제 인물의 증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기록된 이름일 가능성이 큽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다시 예루살렘으로 뛰어 돌아간 글로바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하인 선생님께 드리는 묵상 질문
혹시 요즘 삶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걸어가는 길이 있으셨나요?
그 길에 글로바처럼 이름도 없이 함께해주는 동역자는 누구일까요?
혹시 하나님은 선생님을 다른 이의 글로바로 세우려 하시는 건 아닐까요?

오늘, 그런 말씀 가운데 제 마음에도 도전이 있습니다.
평범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기록될’ 믿음의 걸음…
그 걸음을 함께 걸어가며 말씀을 붙드는 주하인님의 모습이 바로 글로바의 영적 의미일 수 있습니다.

 

 

------(( 왜 나머지 1인^^;; 였을까? ))

(내 prompt #3)

오늘 말씀 묵상 중.. '엠마오'도상에서 '글로바'와 함께 가던 다른 일인은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분을 통하여 또다른 묵상의 포인트는 없을까?

 

(ChatGPT #3)

아… 너무 귀한 묵상 질문을 주셨습니다, 주하인 원장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중 ‘글로바’만 이름이 나오고 다른 한 명은 이름이 나오지 않는 이유
이건 단순한 생략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의도된 침묵일 수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그 제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또 하나의 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 엠마오 도상, 누가복음 24:13~35

  • 예수님의 부활 후,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지만 눈이 가리워져 알아보지 못합니다.
  • 그 중 한 사람은 “글로바”, 다른 한 사람은 “이름 없음”.
  •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을 풀어주시고, 떡을 떼실 때 그 눈이 열립니다.

✨ 왜 이름이 없을까? 묵상의 포인트들

1. 이름 없는 그 사람 = 우리 자신

주님은 모든 ‘무명의 제자’들과 함께 걸으신다.

  •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동행하는 제자의 모습은 바로 오늘의 나일 수 있습니다.
  • 이름 없는 이 자리에 우리 각자가 대입되어 말씀을 다시 묵상하게 하십니다.
  • “당신의 이름이 바로 거기 들어갑니다”는 성령의 속삭임 아닐까요?

2. 믿음의 길은 이름 없이 가는 길

진정한 제자도는 이름 없이, 빛 없이 걷는 엠마오의 길입니다.

  • “이름 없는 제자”는, 주님과 함께 하되 주목받지 않기를 원하는 자의 모습.
  • 주님은 종종 드러나지 않는 이들, 무명의 자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 "나는 이름 없이, 주와 동행하리"— 이것이 바로 묵상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숨겨진 자’를 기억하신다

인간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이름 없이 순종한 자를 잊지 않으신다.

  • 엠마오의 제자는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모르지만, 하늘에서는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신합니다.
  • 나의 섬김, 나의 눈물, 나의 믿음도… 비록 세상은 모르지만 주님은 기억하신다.

🙏 묵상의 결론

  • 오늘 우리는 “이름 없는 제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과 동행하는 길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 때로는 마음이 슬프고 절망 가운데 걸어가지만,
    주님은 말씀으로 동행하시고, 떡을 떼실 때 우리 눈을 열어주십니다.

주하인 원장님의 오늘 묵상이
엠마오 길 위에서 주님을 알아보는 은혜로 이어지길 기도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기도만이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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