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나와의 평화로운 同居( 욥29:18-24 ) 본문
제 29 장 ( Chapter 29, Job )
누구에게나
밤은 찾아 옵니다.
밤은 어두워서 싫지만
그 밤이 오면
달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
그 밤에
달은 멀어 느끼지 못하고
가끔은 가까이 있는
가로등이 더 밝아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
달의 그 대단함에
비유할 수 있을 까?
아무리 어두워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주님 만 바라 봅시다.
18.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I thought)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하리라 나의 날은 모래 같이 많을 것이라
욥이 과거의 영화를 회상한다.
아.
이것은 노년의 회고록이 아니다.
몸부림 침도 아니다.
친구들의 삼각 공격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그들이 날리는 화살을
'등背'으로 받아가면서도
하나님과 독백 만을 고집하던 것을 지속하며
그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축복하셨던
고난 이전 때를 추억하는 것이다.
1절 부터17절까지는
자신의 부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18절 부터는 자신의 자신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던
그 시절의 자화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때
그 자신은 그를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직 죽을 날이 멀고 멀었고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죽을 것이라고..
19. 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내 가지는 밤이 맟도록 이슬에 젖으며
내 뿌리는 물로 뻗어 나가고
내 가지는 밤새도록 이슬에 젖으며...
글쎄...
다양한 해석으로 뿌리와 가지를 해석할 수도 있다.
자손 ?
재물?
하지만 그가 물로 뻗어가고 이슬에 젖는다는 표현은
그냥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생각으로 해석하기는
너무 고아하다.
더구나,
자신에 대한 '자화상' ,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 하고 나서
그리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넘치는 생각이다.
뿌리는 물로 뻗어간다.
주님을 향해 깊어가는 그의 '믿음信心'이 아닌가?
신심이라면
십일조 열심히 하고 구제를 엄청하고 선교에 최선을 보이는..
이러한 행위적인 답답한 것을 의미하는 것 만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는
물로 뻗어간다는 표현을 한 것 처럼
그의 믿음은 '촉촉한 믿음'
뿌리 깊고 여유로우며 걸리지 않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 나면
그러한 촉촉한 평강,
영혼의 샬롬을 주시는 하나님께
가지무성한 나무처럼
팔을 들고 들어
주님계신 그 곳을 향하여
자신도 모르는 뻗침을 뻗어가는
그러한 열정적 믿음을 말하는 듯하다.
그는
그 당시
그러한 열심의 믿음을 가진
놀라운 열정의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게 그의 그에 대한 돌이켜 생각하는
스스로의 자화상이다.
놀라운 것은
세상적 성공이 많을 수록
감동적이고 촉촉한 믿음,
인격을 녹아내려 들어가는 기쁨을 간직한
영성을 유지하는
참으로 힘들었을 것을..
그는 그게 가능한 듯하다.
부자들의 천국과 낙타 바늘귀는 누구나 다 알지 않는가?
그러하니
그의 친구들의 거듭되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자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인식, 자화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우울이 무엇이란 말인가?
자살이 또 무엇인가?
정답은 '주님'께 있음을
작금의 세상 돌아감에 비추어
다시한번 느껴지는 바다.
주님을 모르는 세상은
주님을 잊어가는 세상은
'파탄의 형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사단의 세상일 뿐이다.
20. 내 영광은 내게 새로와지고 내 활은 내 손에서 날로 강하여지느니라 하였었노라
내 영광이라한다.
오랫동안
욥의 이러한 고백을 볼 때마다
전에 쓴 것처럼
비단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적을 못하고 묻어 넘어갔겠지만
욥의 '교만'함이 가슴을 누르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냥 슬며시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광이 날로 새로워 졌다는 것은
자신의 의도가 아님에도
물질적으로도 놀랍게 성장하고
더구나
물질과 반비례하게 되는
영적인 불편감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갈구함으로 얻어지는
부수적인 축복을 얻는 자로서의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매일같이 새롭게 느껴진다는 뜻인 것 같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그렇게도 물질이 늘어남에도
물질로 인하여 마음이 둔하여 지고
그날이 도적같이 임할지도 모르도록
세상에 파묻히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물로 뻗는 뿌리가 되고
두 손이 가지처럼 펼쳐지는
눈물겹고 촉촉한 믿음이 되니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고 놀랍다는 이야기다.
21. 무리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가르치기를 잠잠히 기다리다가
세상 인심이 어떠한가?
돈 있을 때는
그 사람 앞에서 잠잠하고 기다리게 되겠지만
22.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었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이슬 같이 됨이니라
돈 많은 부자의 이야기가 끝나고 돌아서면
욕하는 게 세상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니
옛 말에 '나랏님 욕도 안보이는 데서는 한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욥의 독백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그 뒷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들이 욥의 말을 '이슬'처럼 알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참으로 시적인 표현이다.
이 심각한 상황에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그의 인격적 소양이 놀랍다.
이슬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반응이 놀랍다.
그 '이슬'
이슬 먹고도 성질 부리는 자는
성격 파탄자 밖에는 없다. ^^;;
그것은
그의 말이 그들에게 욕할 거리가 하나도 없고
이슬처럼 달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놀라운 영적 성취를 이루었을까?
얼마나 놀라운 인격의 사람이었을까?
23.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 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비를 바라는 것은 갈증을 이야기 한다.
진심으로 갈구하는 것이다.
늦은 비란다.
지금 얼마나 가물었는지
식수가 없는 곳이 남부지방에 있다고 한다.
우리 집 아래의 개울도
거의 물이 말라가
계곡에 흐르는 물이 없어져 가고
그 안에 피래미 떼들이 한곳으로 뭉쳐
바글바글 거리고 있다.
이럴 때 갈구하는 '늦은 비'
그것은 세상의 돈 만 많은 부자의 소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는 그런 자신을 스스로 놀라와 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을
그는
'영광이 날로 새로워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다.
주님을 믿으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앞 뒤 先後' 즉,
순서를 알고 지키는 것이라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세상의 다수의 기독교인이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주님의 앞을 나서고 있다.
주님을 믿는 자로서 열심히 해야 한다며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며 다구치고 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며
기복을 이야기 하고 있다.
주님이 땅 끝까지 선교하라고 하였다 하며
자신의 내적 평화와 내적 선교는 이루지도 못한 채
세상을 향해 유치한 발걸음을 내딛고는
수많은 상처를 입히고 있다.
모두 옳다.
그리해야 한다 .
하지만,
그러기 이전에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을 늘리고
주님의 허락하신 놀라운 기쁨을 맛보고
날로 '자신의 영광으로 자신이 새로워져 야 한다.
자신의 그러함이 놀라워야 한다.
자신이 그러한 놀라움이
자신의 잘남이 아니고
주님 앞에 올바로 섬의 결과 뿐임을 알고
더욱 기뻐야 한다.
그것은 내 노력의 결과는 한계가 있는
길어야 80여년의
찌그러질 깡통 육체에 갇혀 있는 유한적 영광이지만
하나님의 그것은
영원하고 무궁하고 무진한
예기치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할 경지의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경이로운 '영광'의 그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난 그렇다.
지금껏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
진짜다.
주님을 알기 전
38살까지
내 잘난 멋에 살았다.
내 잘나지 못한 결점에 상처 받으며 살았다.
그래서
내 잘난 멋을 자랑하려고 애썼고
내 잘나지 못한 부분을 들키지 않으려 몸부림 쳤으며
잘난 부분은 알아주기를 바라며 눈치를 살폈고
잘나지 못한 부분은 들키지 않으려 노심 초사 했으며
잘난 부분이 드러날 때는 한없이 내 영광에 날 뛰었고 ^^;;;;
그렇지 못하면 한없이 쭈그러 들었다.
말은 거칠었고
행동은 드셌으며
표정은 차가왔고
인격은 편협했었다.
지금
내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
세상은 한없이 광풍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정신없이 회오리 치는 세상의 휘몰아치는
이 어려운 시점에...
다시 한번
내가 나를 돌아 본다.
성경에 맞추어..
욥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욥의 그것은 너무나도 편하다.
너무나도 향기롭다.
너무나도 물기서린 촉촉함이다.
하지만
그의 그것이 이해가 간다.
이전에는 그의 그러한 것이
교만함으로 거북스레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의 독백의 원인이 이해가 간다.
그것은 이렇다.
그 모든 바탕에는
그의 스스로를 쳐다보는
선한 자아상, 자화상 또는 '심상'에 달려 있다.
그의 자신을 바라보는 올바르고
자신에 대한 선한 시선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시선이 올바른 원인은
'하나님' 때문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한 선한 이미지는
하나님과 동행하던 시절의 여유로움과 평화에 있다.
자신과의 평화로운 동거.
이것이 그의 과거의 성공의 비결이다.
비록 현재는 '주님의 주님 만의 뜻'에 의한 고난 중에 있지만..
이게 필요하다.
난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자아 성찰에 의하여..
주님이 허락하시는 평화에 의하여...........
적용
1. 난 날 사랑한다.
주님은 날 사랑하신다.
그러니 내가 날 사랑해야 한다.
부끄러움은 의미없다.
가라.............
2.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다.
날 사랑하는 만큼 그들을 사랑하겠다.
3. 안되는 것 , 성령의충만하심을 구한다.
4. 성경 여섯 장 읽겠다.
말씀이 모든 선한 출발의 시작점이다.
5. 세상의 것은 주님 나라를 추구하다 보면 이루어 진다.
욥의 재물관과
재물이 있음에도 선한 의를 유지할 수 있음은
주님으로 인한 재물이기에 그렇다 .
이게 '나의 영광이 날로 새로운 '비결이다.
5. 내 영광은 내게 새로와지고 를 백번 외우겠다.
6. 내 뿌리는 '주님의 물'로 뻗어갈 것이다.
늘 주님을 사모한다.
세상은 주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나면 아무 의미없다.
세상 것도 주님의 뜻 안에서 쳐다보려 몸부림 친다.
나에게 세상과 주님은 분리해서 볼수 없는 존재임을 명심 명심한다.
죽어도 주님
살아도 주님
7. 순서'를 잊지 않겠다.
물질은 주어지는 것이다.
쫓지 않는다.
아무리 돈이 보여도 주님의 것이 아니면 안한다.
어렵지만 그렇다.
혹여 망함이 두려워도 주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연습을 하겠다.
큰 성공이 보여도 주님이 주시는 것 아니면
서두르지 않겠다.
그럴 듯한 명분이 있어도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주의 일일듯하면 버린다.
모두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난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충만감'을 에너지로 받겠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이리 마감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 뜻대로 살길 원합니다.
주여
욥의 그 놀라운 자아 확신을 보고 있습니다.
왜곡되지 않은 올바른 자기 인식이야 말로
평화와 행복의 시작임도 느낍니다.
그를 닮기 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나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주신 그 길을
아직은 차곡차곡 걷고 있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주님 뜻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으실 줄도 알기에 감사드리나이다 .
나에게도
주님안에서
이러한 놀라운 자기 확신을 주소서.
주님으로 인한
놀라운 평강으로 절 가득 채우소서.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