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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받는 위안의 비밀 ( 고후7:2-16 )

주하인 2009. 8. 13. 12:33

제 7 장 ( Chapter 7, 2 Corinthians )

 

 

 

기도원

 

하늘

십자가.

 

호적함

외로움

편안함

 기쁨.

 

근심

위안.

 

근심은 힘들어도

남을 위한 근심

주를 의식한 남을 위한 근심은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기쁨이다.

위로다.

평안이다.

진리에 가까워짐이다.

 

 


 
 
 
4.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환난 가운데 위로와 기쁨.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

    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환난의 어려움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고

밖으로는 타툼이 있고

안으로는 두려움.

 그리 낯설지 않다.

 눈길이 가는게 이런 익숙한 ,  어찌 보면 유치한 '나'에게나 있을 법한 이런 고난이

내가 그토록 존경하던 '사도 바울'선생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 분과 내가 다른 것은 , 아니 달랐었었었던 것은 ㅎㅎ

그 환난으로 난 깊은 좌절에 빠졌었지만

그 분은 '위안'이 따라 온다는 사실이시다.

 무엇이 차이였던가?

 


 
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그 분에게 오는 '위로'의 정체는 무엇인가?

은혜 때, 위안의 개념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고통이나 고난으로 표현되는 그 어둡고 답답함의 길이에 비하면

은혜로 표현 되는 시간은 턱없이 짧았었었었다는 게 문제지..

실은 이제는 점점 더 길어지고

그에 따라 흔들리는 기간과 폭이 점차 줄어 들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 사도 바울 님의 그 절정의 사명을 행하기 위하여서는

'위안과 위로'과 폭포수 처럼 넘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

이 '폭포수 같은 위안과 위로'가 어떻게 왔던가?

오늘 묵상 구절에 여섯 번,

기쁨이란 비슷한 의미의 단어까지 포함시키면 훨씬 더 많을

그 사도 바울의 폭포수 같은 위안은 어찌 왔단 말인가?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

    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 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

    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

    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 근심'

이 단어는 여덟번 나온다.

비슷한 다른 단어를 포함시키면 역시 더욱 많아진다.

 

 근심과 위안.

근심이 깊어질 수록 위안이 커진다.

그의 역시 역설적인 고백이 여기에서도 다시한번 사실이 되어 등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근심'에 있다.

위에서도 고백했지만

 나도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고

밖으로는 타툼이 있고

안으로는 두려움이 많았었다.   

근데..

난 타는 듯한 괴로움이었지만

이 분은 '놀라운 은혜의 위로'의 연속이었다.

이상하다.

정말 내 인생을 짓누르던 그 타는 듯한 고난이 왜 누구에겐 기쁨이고 열정이던가?

왜 누구에겐 눈물나는 위안이던가?
 

 근심에 비밀이 있다.

 나는 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맞았었다.

같은 육체의 근심도 모조리 나를 중심으로 한 상실의 근심이었다.

사도 바울님의 육신의 근심은 육신의 가시로 인하여 주님께 누가될 근심은 아니었을까?

환난.

나는 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환난이 태반이었다.

사도 바울님은 복음 전파가 됨을 두려워하는 사단의 세력들의 저항에 의한 것이 맞을 듯 싶다.

 다툼.

난, 급한 성격으로

사도 바울님은 '전도'에 대한...

 두려움.

난 내 기질적 취약함과 부정적 시선으로 인한 두려움.

사도 바울님은 주님을 위한 약함.

그 약함으로 인한 주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도록 하기 위한 선한 두려움.

......

더 정확히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닌 내 개인의 뜻에 의한 근심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냐 차이다.

그것은 어떤 일이 그 근심의 근원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근심 거리가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 지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다.

 '회개'라고 나온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다'고 나온다.

 

누구든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근심으로 눌리고 눌리지 않고는

주님이 전제가 되느냐 아니냐다.

그 근심의 형태가 어떻든 이것을 가지고 '회개'를 통하여

주님의 뜻 안으로 가져올 수 있느냐 아니냐 이다.

물론 사도 바울님 처럼 대단한 상급은 아닐지라도.

 

 또한 하나님 뜻대로의 근심은

남을 위한 근심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절절히 하는 근심을 .

그 근심이 디도의 옴으로 기쁨으로 바뀌는 그 정체를.. .

 나도 그리하게 하고 싶다.

더 이상 내 기쁨 내 속에서 머물지 않게 되고 싶다.

철저한 내 이기주의적 기쁨에서 벗어나

이타적 기쁨을 누리고 싶다.

이타적 사랑을 통해 긍휼의 근심으로 날 채우고 싶다.

그 감성이 천국의 기본 감성임을 최근에 확신하고 있지 않던가?


 
 

 적용 

1.  근심거리가 있는가?

 있기는 있다.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근심 거리 자체를 없애기 위해 몸부림치지 말자.

 근심을 너무 무서워 말자.

 

2. 회개하자.  

  어쩌면 근심은 주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한 증거일 수 있다.

 그 증거를 통하여 주님 앞에 가고 안가고 가 문제다.

 어떤 잘못도 주님 앞에 회개로 가져가면 '주님의 뜻'이 된다.

 그 근심은 암담함이 아니다.

 죽을 외로움이 아니다.

 앞이 안보여도 그것은 한가로움이다.

 두려움도 그것은 받아 들일 만한 차분함이 된다.

 주님 앞에 가져가면 모든 것은 '내 발전'의 도구가 된다.

 회개하자.

 

3. 위로의 하나님을 믿자

 주님의 위로가 뚜렷해지는 첫째는

'모든 근심은 주님의 뜻안에 있다.' 는 것을 믿는 것이고

' 그 것이 주님의 뜻으로 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실천하는 것이며

'평강의하나님을 기다리고 누리는 것'이다.

 

4. 위로의 하나님을 누리는 하루가 되겠다.

 근심아 .. 가라.

 주님 안에 회개로 있을 나는 근심이 더 이상은 근심이 아님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가을 바람처럼 한들거리고

 솜털처럼 부드러운 스침이 되고야 말것이다.

 근심아... 가라.

 거짓 고통아.. 가라.

 

5. 성경 일곱장 읽겠다.

 

6. 근심을 그 하나님께 내려 놓겠다.

 근심이 내 죄와 상관없을 거짓에 속지 않는다.

모두 내 잘못일 수있다.

  가만히 주님 앞에 가서

어쩔 수 없는 내 환경은 위로 받고

잘못된 내 선택은 회개하겠다.

 

7. 남을 위하여 .

 남의 강건함을 위한 사랑으로 날 채우소서.

 그 강건함의 중심이 내 기쁨의 중심으로 되게 하소서.

 

 

 

기도

 

 주님

그랬습니다.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같은 근심을 해도

왜 사도 바울님은 그렇듯 건강하고

같은 근심을 해도

왜 저는 가슴 앓이가 되어야 하는 지요.

주님

이 어리석은 자아는

아직도 관심이 내 만족에 있었습니다.

내 만족이 박탈당할 위험에 있다고 느끼면

여지없이 그 근심은 지옥의 고통으로 바뀔 채비를 하고 있었음도요.

이제 관심을 돌려

주위와 남을 위한 긍휼함으로 채우기를 원합니다.

아직도 그런 생각만 해도 속에서 부딪치며 나오는

어떤 반발이 있는 듯합니다.

주님

그러한 유치한 발상이 아직도 절 근심 속에서 머물게 하는 듯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회개합니다.

주님의 원리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회개합니다.

주님.

일단 고민이라 근심거리라 생각되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기를 선택합니다.

주여.

 회개를 하기를 원합니다.

회개가 무슨 일이냐 반발이 있어도

주님 앞에 선하지 못한 어떤 선택이

내 안에서 자동적으로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회개하려 합니다.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뜻이 아닌

성령의 열매가 아닌

어두움의 논리를 벗기소서.

그리하여 '위안'을 체험하게하소서.

주님의 원리는 '근심'과 강제적 '징계'에 의한 고백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놀라운 주님의 동행을 주시기 위한 고난과 근심임을

저로 한번 다시한번 체험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뜻안에 있음의 이유가

주님을 동행하는 체험의 쌓임에 있게 하소서.

저로 확신하게 하소서.

흩날리는 바람 같은

어리석은 세상의 비아냥과는 아무 상관없는

주님의 원리에서 머물게 하소서.

주님의 살아계심으로

전 근심을 통하여 위안과 위로를 얻게 하소서.

그 위안을 통하여 절절히 주님의 뜻을 더 준행할 수 밖에 없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로 그 사실을 알리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이 곳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같은 체험하게 하소서.

소수 만이 그러리라 생각되지만

소수를 넘어서는 다수가 모두 주님의 평안 아래서 거하길 원합니다.

모두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도 바울님 처럼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은혜(이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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