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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의미의 축복(욥42:10-17 )

주하인 2008. 10. 31. 13:48

제 42 장 ( Chapter 42, Job )

 

 

어둑해져가는 포구지만

석양이 있어 아름답듯이

내 인생

그리 크게 화려하진 못했어도

우리 주님이 계시기에

내 후반부는 훨씬 아름다우리라.

 

 

 


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밉지도 않나?

속상하지도 않나?

주님은 욥의 그러한 품성을 사랑하시는모양이시다.

그를 닮고 싶다.

 

그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신다.

아니다.

그래서 돌이키시는 게 아니시다.

 정확히 표현하면 때가 되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욥은 당연히도 중보하고

주님의 연단이 끝나셔서 돌이키신 것이다.

 

소유를 갑절을 주셨다한다.

부럽기도 부럽지 않기도하다.

소유가 많으면 좋다.

하지만 없어지기 전에 주셨으면.ㅎ

이 어리석은 심사의 소유자가

주모다.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이들...

모든 형재 자매와 알던 자들이

회복이 되니까 돌아와서 아부한다.......................

이게 '부정적인 내 눈이다. '

 

욥은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 '

호의를 호의로 받을 줄 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의미를 붙히지 않는다.

 

주님은

나에게

의미를 붙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영혼의 여유가 있기를 바라시는 듯하다.

그렇지 못하기에 주시지 않는 것이신지도 모른다.

선천적 배포 큰 대장부에게는 다른 연단이 있겠지만..ㅎ

 

 
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말년 복이 무슨 소용인가?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16.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또 자식을 많이 낳아서 그나마 좋기는 하지만

천금같던 죽은 자식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들이 그들을 대신할 것인가?

자식은 깨물어 아프지 않은 자 없고 가슴에 묻는 다고 하는 말도 있기는하다.
 조금은 속이 흔들린다.

 

 가만히 생각하면 '미련'이다.

맞다.

과거는 과거지만,

그것을 생각하고 현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미련이고

그것은 '불행'의 시초이고 '우울증'의 기본 메카니즘이기는 하다.

누구처럼 '온 우주를 받아들인다'는 고백을 흉내내어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이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런데......

 

 하지만,

생각지 못하던 몇 가지가 주님을 믿는 시간이 지나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

 

 성령의 충만함...

예수의 선한 영이 은혜라는 이름으로 기도하는 내 속에 차오르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 하나도 없어지고

모든게 주 안에서 그럴 듯하다.

 그러다가 세상의 삶 속으로 나오면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리 생각된다.

주님의 뜻은 주님 만이 아신다.

욥의 경우는 너무도 특별하여 수천년을 성경 속에서 예화로 와 있지만

그 분 하나님은 결코 선이 아니신 것은 없고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성령의 충만하심이면 다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분명코 성경에 나오신다.

' 성령은 우리의 알지 못하는 것 까지 깊은 탄식으로 하나님께 직고하신다.'고..

그렇다.

그 분은 욥의 연단할 거리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그에게 연단을 제공하시고 그를 통하여

어리석은 주모 같은 자를 느끼게 하실 목적으로 그에게

그리 가혹하신 듯한 고통을 주셨지만

다른 선한 예비책이 있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예를 추정하기는

이 어리석은 주하인의 뇌리는 또 엉터리로 돌기 시작한다.ㅎㅎ

그 분 하나님은

이 땅의 삶은 그리 크게 보지 않으시고

결국 천국에서 다시 만나 영원을 기쁘게 살 것임을 아시기에

그리 하셨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어리석은 추론이다.^^;;;

 

 눈 앞을 괴로워하고 너무 심상해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제한된 '눈'이라는 것이다.

 또 시간이 지난 후에도 '괴로움'과 '아쉬움'을 내려 놓지 못하는 것은

상처 입은 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냥 잊어버리기 쉽지는 않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렇다.

어찌 자식의 죽음을 잊겠는가?

하지만, 주기철 목사님 등은 가능한 이야기지 않았던가?

 인간의 삶 속에서도

온전한 용서와 잊음도 가능하다.

문제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어떠한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 생각의 기본은

'원망'과 '좌절', 외로움과 '강박' 등의 어두운 세력 탓이다.

 

 주님을 믿으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가능치 않은 감정의 상흔 들이 녹아 내려감을 느끼고

그 녹아 내려감은

과도한 기쁨, 지나친 비애, 무거운 슬픔, 과장된 흥분 등

감정의 기복이 잦아 들고

조금은 평강 속에서 차분히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욥은

내가 느끼는 이러한 감정의 몇배는 더 큰 차분함으로

주님 안에서

현재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주님 안에서 거듭나고

주님과 동행했었던 자다.

이제는 다시 더욱 크게 동행하고 있다.

그러니..

외부적 축복은 그에겐 아무의미가 없다.

단지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외적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주님 안에서 축복은

용서할 수 있는 능력과

그들을 위해서 중보할 수 있는 기도의 자세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선하심이 믿어지는 - 믿는 ..이 아니다. . 그것은 자신의 노력일 뿐이다.    기독교 신앙은 타율이다.   믿어진다.  그걸 어찌하는가?  너무 자연스러운데... - 그러한 차분한 온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축복은 축복으로

칭찬은 감사함으로

흔들림은 진실로

부요는 나눌 수 있는 자세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주님 안에서의 의로움'을 간직한 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게

진실한 축복이다.

 

 

하늘.

그 넓음을 말씀으로 있게하신

그 하나님이

놀라울 뿐입니다.

기쁠 뿐입니다.

오......

주여.

  

 

적용

1. 용서한다.

  싫어하는 자들을 중보하겠다.

 

2. 사랑하는 자들의 관심을 감사히 받겠다.

 내가... 나 같은... 은 사단이다.

 감사하며 축복의 말을 받아들인다.

 

3. 과거는 지나갔다.

 주님 안에서는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를 살자.

 

4. 나눌 수 있는 상황은 나눈다.

 

5. 성경 여섯 장 읽겠다.

 

6. 주님의 축복을 기대한다.

 은근히 싫지는 않다.

 내 고난을 아시는 주님.

 당신 만은 날 아시지요?

 이제 그만 끊어주소서. 

 때가 가까이 된 줄 믿습니다.

 묵상 중 느낍니다.

 

7. 성령이여 함께 하소서.

 성령 충만은 모든 것의 답이다.

 임재하시는 주님은 '성령의 확실한 임재'를 뜻한다.

  기도한다.

 

 

 

기도

 주님

감사드립니다.

오늘

욥의 축복을 보고 있습니다.

그 축복의 의미도 되새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묵상한 모든 것이

주 안에서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물질적인 것도 좋습니다.

잘 풀어지는 풍요도 좋습니다.

그리고 , 내 마음의 흐름,

영혼의 샬롬이

주님 성령님의 흐름과 함께 흐르게 하소서.

맺힌 것 푸시고

용서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중보하는 자가 되게 하세요.

잊을 것은 잊는 능력을 주시고

주님은 선이심을 온전히 기쁨으로 받게 하소서.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성령의 불 세례로 절 축복하소서.

그래서, 가진 모든 선한 원함이

주님의 뜻 안에서 자연스레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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