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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생활 (펌 )

주하인 2007. 6. 15. 11:36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생활 (펌)

 

1. 애굽에 팔려간 요셉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때보다 40년 전 쯤에 기록된 애굽의 파피루스 문서가 최근에 알려졌다. 이 조각난 기록은 감옥 문서인데 그 당시 감옥 제도가 쓰여 있고 뒷면에는 어떤 애굽 집에 속한 75명의 종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중에 45명은 아시아 사람으로 애굽에 팔려 온 종들이다. 요셉도 그후에 이들처럼 팔려 온 것이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 온 요셉이 30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국의 총리가 되었을까? 이를 뒷받침해 주는 뚜렷한 역사가 있었다.

 

번영하던 애굽의 중왕국(12, 13왕조)이 갑자기 세력이 약해지면서 지방 통치자들의 분할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 때에 힉소스(Hyksos; 목자 왕들, 이국의 통치자)라는 셈족으로 이루어진 민족이 아시아 팔레스틴 쪽에서 말과 병거를 몰고 쳐들어 왔다. 그 때가 기원전 18세기 중엽으로 그 때부터 약 150년간(약 1720-1570 BC) 애굽의 두 왕조(15, 16 왕조)는 이민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들은 수도를 동부 아바리스에 정하고 애굽과 서부 아시아를 다스렸다. 이 때에 요셉은 애굽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창 39:4)가 되었다. 그러나 무고(誣告)를 입어 투옥되었다(창 39:20).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기원전 13세기쯤의 애굽의 세티 Ⅱ세(Seti Ⅱ) 때 기록된 파피루스(d' Orbiney)에 두 형제 아누비스아와 바티스 (Anubis and Bitis)이야기에서 다른 형태의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요셉은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창 40:1-23)을 만나게 된다. 이 두 직분은 애굽어를 히브리어로 풀어서 쓴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궁중 관리의 직분이었음이 애굽의 고대 문서에서 확증되었다. 감옥의 총무가 된 요셉은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였다. 꿈 이야기에서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위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각종 구운 식물이 있"(창 40:16, 17)다. 이 설명은 고대의 애굽 무덤의 모형 목각에 뚜렸이 나와 있어 성경의 확실성을 입증하고 있다.

 

요셉은 2년의 옥중 생활 끝에 총리직과 아울러 "곡식 창고장"까지 겸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창 41:40). 이러한 직책은 당시의 직분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요셉과 관련된 수레(또는 병거)와 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기원전 18세기 중엽에 힉소스 족들이 애굽에 쳐들어오기 전에는 병거나 말을 타는 습관이 소개되지 않았다. 이것은 힉소스의 시대인 것을 분명히 입증한 것이다.

 

요셉은 애굽인 바로가 아닌 이스라엘과 같은 셈족인 힉소스 민족이 애굽을 통치할 때 그 밑에서 총리를 지낸 것이다. 바로가 요셉에게 지어 준 애굽 이름인 "사브낫바네아"(창 41:45)는 당시에 통용되었던 인명이었다. 근대의 애굽 발굴물 중에서 이 이름이 드러났다.

 

총리와 곡물 총 책임자가 된 요셉은 7년의 풍년기 동안 전국의 곡식을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창 41:46-49). 기원전 15세기에 속하는 고대 애굽의 수도인 테베의 한 무덤의 벽화에서 추수한 곡식을 기록하는 관리들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어 이 사실을 입증시켜주고 있다. 요셉이 섬기던 힉소스 족속의 바로는 제 16왕조에 속한 키안 또는 카안(Khian 또는 Khayan)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이름이 애굽의 상형문자로 쓰여진 것이 발견되었다.

 

7년 대풍년에 이어 7년 대흉년이 이집트와 팔레스틴 전역에 극심해 졌다. 이에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두 차례에 걸쳐 요셉의 형제들에게 귀한 예물을 주어 이집트 총리를 방문하여 양식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창 42, 43장). 야곱의 열 아들들은 이집트에 도착해서 총리가 된 이복 아우 요셉을 몰라 보고 그 앞에 예물을 드리고 엎드려 절한다(창 42:6, 43, 26). 이러한 사실은 기원전 15세기 테베에 있는 세벡-헤텝의 무덤 프레스코 벽화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그 벽화에는 팔레스틴(시리아 지방)에서 온 셈족계 아시아인들이 그들 땅의 예물들을 손에 들고 이집트 궁전에 와서 바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요셉의 형들의 당시 사건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야곱은 애굽에 와서 17년을 살았으며 147세에 죽어 장사되었다(창 50:1-3). 야곱의 장례법은 그 당시의 애굽의 장례법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요셉의 "수종의사"(창 50:2)가 나오는데 당시 애굽에는 고도의 의술을 가진 의사가 있었다고 희랍의 기록에 나온다. 요셉은 야곱의 시체, 즉 "향 재료를 아비의 몸에 넣게" 했다. 그것을 넣는데 40일이 걸렸다는 것은 당시 애굽의 특수 장례법, 즉 미이라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애굽의 초기 역사에는 향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시체를 그저 말려서 처리했다. 제 11, 12 왕조와 힉소스 통치 때에는 발달해서 시체를 소금과 천연 탄산소오다로 처리했다. 죽은 사람의 내장을 제거하고 그곳에 고무진이나 방부제를 채워 넣는다(창 50:2, 3).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전신을 붕대로 감고 미이라 모양을 만들었다. 그 후에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나무 상자에 넣고 난 후에 다시 2-3개의 직사각형 나무관 속에 넣어 바위를 깎아 만든 굴무덤에 장사했다. 무덤에 장사할 때 그가 평소에 쓰던 물건들도 함께 넣었다. 미이라를 만드는 데 40일이 걸렸다. 애굽의 습관대로 70일을 울었다. 요셉도 110세에 죽은 후에 같은 방법으로 장례를 치루었다(창 50:26). 이와 같은 기록은 당시 애굽 장례 풍습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신계훈, 조대연, 고고학과 성서배경, 59-62 참조).

 

 

2.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생활

 

 

기원전 18세기 중엽에 셈족 계통의 아시아인들인 힉소스족들은 애굽을 침공하여 14왕조를 무너뜨렸다. 애굽은 약 150년간(1720-1570 BC) 이 민족의 의해 다스려졌다. 이 기간 동안 요셉 덕분에 기근을 피해 이민 온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일강 삼각주 동쪽의 고센 땅 지금의 와디 튜미랏(Wadi Tumilat)을 차지하여 번영을 누렸다(창 47:6).

 

그러나 요셉이 죽고 얼마 후 애굽에서는 대정변이 일어났다. 당시의 힉소스 왕 아포피스(Apophis)가 애굽인으로서 테베의 지방 장관이였던 세켄레(Sekenre)를 죽인 사건을 계기로 그 아들들에 의해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형 카모세(Kamose)에 이어 동생 아모세(Amose)가 힉소스 왕국의 수도 아바리스를 빼앗았다. 힉소스족은 150여년 만에 애굽에서 쫓겨나서 남부 가나안 사루헨(수 19:6)에서 버티다가 애굽 군대에 의해 포위 3년만에 패망하였다. 이 기록은 애굽왕 아모세의 부하 군인 중의 하나인 아모세(왕의 이름과 같음) 장교가 자기가 독립 투쟁에 참가해서 공을 세운 기록을 네갑에 있는 자기 무덤에 글로 써 둔 것을 거의 4000년만에 발굴함으로써 밝혀졌다. 그는 독립 투쟁에서 세운 공로로 왕에게서 받은 19명의 노예들의 이름을 무덤 비명에 써 놓았다. 그 중에는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셈족의 이름이 있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애굽의 독립 전쟁에서 성공한 제 18왕조는 힉소스 시대에 번영을 누렸던 이스라엘 자손을 미워하고 보복하기 시작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 1:8)은 바로 제 18왕조를 가리키는 역사적인 표현으로 성경 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상동, 63).

 

 

3. 강제 노역과 모세의 출생

 

 

독립운동에 성공한 제 18 왕조는 이스라엘 백성의 번영을 두려워 하고 증오를 느껴,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는 강력한 정책을 폈다(출 1:9, 10). 이렇게 세워진 억압 정책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출 1:13, 14). 이런 상황에서 지은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이 1905-1906년 사이의 겨울에 페트리(W. M. F. Petrie)에 의해 발굴되었다. 비돔은 와디 튜밀랏에서, 라암셋은 텔 엘 레타베(Tell el Ratabeh)에서 발굴되었다.

 

아모세가 죽자 그의 아들 아멘호텝 Ⅰ세(1546-1525 BC)가 왕이 되었으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애굽의 장군이며 그의 사위인 투트모세 Ⅰ세(Thutmose Ⅰ; 1525- 1508)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주로 외국 정복에 힘쓰는 한편 셈족 노예들을 대대적인 토목 공사에 동원했다. 이 때 쯤 수도 테베에 끌려와서 강제 노동을 하던 레위 족속의 부부인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준수한 아기 모세가 태어났다. 이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더 이상 번창하지 못하도록 "남자가 나거든…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출 1:22)는 바로의 명령이 시행되던 때였다. 아기의 생명은 위험에 처하였다. 요게벳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 하지 않고"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겨 두었다가 방수진을 칠한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 갈대 숲 사이에 띄우고 누나 미리암이 망을 보게 하였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의 섭리로 구원의 손길이 아기 모세에게 이르러 왔다. 애굽 왕 투트모세 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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