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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시선(요18:12-27 )

주하인 2009. 4. 6. 13:59

제 18 장 ( Chapter 18, John )

 

 

어찌

이런

간절한 기도를 잊어왔던가?

 

어찌

모든 해결의 중심에

주님의 십자가가 계셨었음을

잊어버리고 살았던고?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예수님이 결박당하셨다.

이 어이없는 일이..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도 아니고 가야바의 장인이다.

이 사람은 장인된 죄로 죽고 죽을 죄를 짓는 선두에 섰다.

가야바 잘못인가?

딸 죄인가?

자신의 잘못된 선택 아니던가?

 

 대 제사장의 장인으로 얻을 꿀물에

죄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의 기본은 무엇인가?

 

 현실의 만족.

십자가를 돌아보지 않는 회개없는 전진 !

 

 그것이 그로 죽을 죄를 짓게 만들었다.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 가고
 
 '아는 사람'

그래

그 아는 사람 탓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 제사장의 뜰에 들어갈 수는 있었다.

 

 아는 사람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그

아는 사람 탓에

들어올 수 있었고

불을 쬘 수 있었다. 
  하지만, 묶여 계신 예수님 보다 더 춥게 보이는 것은 웬일인가?

더더구나 더 불안한 것은?

불안치 않았더면 '부인'했을까?????????

 

 선후가 바뀌지 않았을까?

아는 사람을 찾아가 들어가기 보다

기도를 더 하고 더 기도하고

기도의 힘으로 들어 가야 되지는 않았을까?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

      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님은 묶여 있지만 더 당당하시다.

덜 춥다.

 

 사람들의 추움.

그게 반드시 육신의 추움 탓일까?

근본, 영혼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모든 이 땅의 존재는 추울 수 밖에 없다.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주님 예수님을 중심에 모셔야 춥지 않다.

그래야 당당할 수 있다.

 

 

 예수님이 묶여 들어오신다.

예수님은 추운 곳에서 갖은 고초를 당하시면서

베드로 일행을 보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고난의 중심에 서 계셨다.

베드로는 고난의 주변에서 방관자로 서 있다.

 베드로는 덜 추운 곳에서 춥게 떨며 불을 쬐고 있다.

 예수님은 묶이셨지만 베드로를 가련히 여기셨을 것이다.

베드로는 안묶였지만 예수님 보다 자신의 걱정이 먼저였다.

 예수님은 제사장 일행의 신랄한 공격에도 초연하시게 대답하셨다.

베드로는 여종 일행의 질문에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며 부인했다.

 닭이 세번 울자

예수님은 안타까우셨을 것이고

베드로는 심한 좌절을 했다

 

 무슨 차이인가?

베드로는 자신의 안위가 우선였고

예수님은 베드로 일행의 마음 고생을 안스러운 마음으로 보심이 우선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중심이시고

베드로는 십자가를 아는 자 일 뿐이다.

 

 


 

 해마다 사순절 때마다

약간씩 흔들거린다.

마음 속에 갈등은 왜 이리 커지는 지..

아내를 보아도

불쌍한 마음 서운한 마음

이뻐보이기도 보기 싫기도 .....

 아들들을 보아도

착한 아이들 다루기 힘든 아이들

좋은 아이들 나쁜 아이들

 내 속을 보아도

...................

 

 그래도 해마다 조금씩은

선한 판단과 긍정적 생각의 비율이 높아지는 듯하기는 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사순절 만 되면 이상히도 흔들린다.

그리도 좋은 아빠와 현명한 남편 사이로 성장해 나가다가

딱 멈춘 듯하다.

 아침에 묵상을 하니

예수님의 베드로를 보시는 시선과

베드로의 예수님을 보는 시선이 크로스 된다.

 

 가만히 묵상하니

난 내 스스로를 묶인자로 보고 있는 듯하다.

아직도..

십자가가 내 생명의 원천이 된다면

그러한 현상은 있을 수도 없는데..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넘칠 것을 ..

어떤 상황이든,

마치 예수님이 결박당하여 추운데서 제사장 일행의 공격 중에도

베드로일행의 안위를 염려하는 눈으로 쳐다보듯

그러한 놀라운 생명이 내 안에 중심할 것을..

난 아직도 이리 흔들리고 있다.

 

마치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좇고는 있지만

세상의 원리 - 아는 사람'-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르면서

마치 자신이 주님을 위해 다 버릴 수 있을

온전한 제자처럼

온전한 신앙인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가

막상 '임계점'에 다다를 위험이 있자마자

온통 관심이 자신의 안위에 속하고 있으면서도

주님 예수님에 대한 배운 것을 버리지도 못하고

그 분을 질질 끌려가듯이 쫓아 온것이

마치 내 모습과 어찌도 그리 닮아 있는가?

 

 열심히 잘 하는 신앙인으로 착각하고

자꾸만 좋아지고 있는 아버지와 남편으로

코가 한참 높아져 있다가

난 좌절의 벽 앞에서 아니라고 부인하면서도

자꾸만 속으로

재고 분석하고 자르는 것이

이 베드로의 불안과 어찌 그리 닮아 있는가?
 조금 피곤하다고

조금 바쁜 나에게 신경 덜 쓴다고

조금 내 맘에 덜 든다고

갖은 비평의 생각들이 떠 오르려 하고

그나마 말씀 앞에 선 시간 탓인지

자꾸만 변명하는 내 모습...

 

 예수님의 결박된 상황으로 날 대입했다.

잠들어 있는 아내가 왜 이리 가련한가?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는 아들이 불쌍하다.

 억지로 억지로 힘을 내려해도 안되던 것이

예수님의 눈으로 보려 하니

왜 이리 불쌍하고 가슴아프게 느껴지는가?

 

마침 시간을 맞춰논 핸폰이 울린다.

일어났다.

주섬주섬 챙겨 가며 방으로 들어가

아내의 이불을 끄집어 정리해주고

이마를 만지니 아내가 눈을 뜬다.

다정히 이야기를 하니 부드럽게 맞아준다.

가슴이 아프려 한다.

아들 방으로 갔다.

불쌍한 녀석.

아버지 학교에서 배운 축복기도 하려다가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 나왔다.

불쌍한 베드로 같은 아들.

 지금은 내 높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는 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곧 대단한 베드로가 되리라.

 

그렇다.

 

문제는 그 영혼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다.

'십자가'

그 십자가가 정말 내 중심에 있는가?

 십자가로 인하여

내 영혼이 불타 오르는가...다.

 

 내가 그리 잘 한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

찬양

글.

사진.

의료.

........

그 것 들이 주님을 의탁하여 개발된 것인지

주님의 십자가 ,

그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와

성령으로 불타서 견디지 못하고 나온

그래서 주님을 위하여 온전히 사용되기 위한 도구였던지.

내 변화가

주님을 믿고 내 심적인 안정을 위하여서

주님을 도구로 사용한 것은 아닌지..

그 주님이 내 영혼 깊숙이 와서

주님 십자가의 그 치유의 능력으로 부차적으로 나오고

그 치유된 영혼으로 인하여 남을 위하여 쓰이기 위한 것인지...

정말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어제 오후

자전거를 타고 일번가의 제일교회에 갔다.

찬양 예배가 있다.

연세 드신 분들이 많이 참여하시는 지라

찬양이 오래된 것 위주라서 지루한 면이 없지 않지만

워낙이 좋아하는 찬양인지라..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본 순간.........'

그래.

머리를 치는 듯 하지는 않았지만

요사이 주님 예수님을 내 영혼의 중심에.. 라는 느낌이 자꾸만 들더니

그랬구나.

주님의 십자가가 내 중심에 오지 않고

세상적 여러 조건 - 대제사장의 장인이라는 조건,  제자의 아는 사람-이 십자가와 동일하게

내 영혼에 자리 잡혀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십자가의 뜻이 머리 속에 떠 오른다.

 

 사랑의 십자가

인내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

희생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

치료의 십자가

부활의 십자가..........

 

그래 십자가를 내 영혼에 깊숙이 받아 드려야지..

이게 어제의 스치고 지나간 결심이라면 결심이었다.

 만일 베드로가 그 십자가를 깊이 받아 들였던 터라면

달랐을 것이다.

흔들림이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로 인하여 생각하고

십자가로 인하여 느끼고

십자가로 인하여 행동했을 것이다.

십자가로 인하여 그는 당당했을 것이며

십자가로 인하여 그는 고민도 없었을 것이고

십자가로 인하여 불 곁으로 쪼그리고 찾아 들지 않았을 것이다.

닭이 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주하인.

십자가가 내 속에 들어 온다면

내가 가진 달란트를 어떻게 쓸것인지 고민할 일도 없을 것이다.

고민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자식들로 인하여 흔들릴 일도 없다.

모든게 주님 뜻인 것을.....

내 안에서는 사랑이 넘치고

치유의 하나님이 내 안의 버거운 상처를 다 없애주실 것이며

고난이 와도 주님의 뜻으로 나도 모르게 받아 들일 것이다.

내 부족한 현실로 인하여

남을 비교할 일도 없을 것이고

내 삶은 흐르는 물처럼 가게 될 것이다.

그게 반드시 선교의 현장이나 사역이 아니어도

주님 십자가가 영혼에 있는 삶은

오늘 예수님의 결박의 평안함이 내것이 될 것이다.

 

 

 

적용

 

1. 십자가를 묵상한다.

 난 십자가를 내영혼의 생명의 근원으로 맞이하겠다.

 

 

2. 좀 더 기도를 해야한다.

 기도의 제목이 십자가가 내 중심에..가 되어야 한다.

 

3. 아버지 학교 가련다.

 남을 위하는 길이다.

 

4. 다 내려놓길 원한다.

 비교 ,

 속상함

원망.... 다 내려 놓는다.

 주님의 생명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가 아닌 것은 다 내려 놓는다.

 

 

5. 말씀을 읽겠다.

 일곱장

 

6. 주님 .. 난 핏물 뚝뚝 떨어지는 순수한 십자가를 원합니다.

 목사님의 불 쏟는 설교 말씀 중에 저러한 고백을 하신다.

 나도 그리하게 하소서.

 

 주님 나를 이끄소서.

 조건을 보지 않게 하소서.

 환경을 의지하지 않게 하소서.

 무엇이 어떤 것인지 주님이 알아서 하게 하소서.

 

7. 주님을 또 묶는 이 죄인의 죄를 주여 용서하소서.

 늘 회개하는 삶을 산다.

 

 

 

기도

 

  주님.

결박당한 예수님의 시선과

베드로의 시선이 교차합니다.

그 두 시선의 차이는 너무도 극명합니다.

난 두 시선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고난이 닥치면 무조건 베드로의 두려워 하는 시선과 불안한 시선만 있었음에도

이제는 다행이긴 합니다.

주님

오늘 묶이시고 곤란을 겪으시고 추위 속에 계시는 예수님의

베드로를 안타까이 보시는

그 사랑의 시선을 보았습니다.

주님.

그 시선을 내가 받길 원하였던 이전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그 시선을 내가 발할 수 있기를

조금은 바랬습니다.

 그 시선이 끝없이 내 운행 원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십자가에 비추어진 내 모습으로 세상을 보길 원합니다.

주여.

치유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

능력의 십자가를 내 가슴에 담길 원합니다.

주여.

그리하게 도우소서.

정말 저 부족하니

도저히 안되니

상황상황 흔들려 버리는

이 밧줄위의 가련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사

제가 원하는 이 모든 바램을 성령으로 인도하소서.

충만히 인도하소서.

말씀을 기준으로 그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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