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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와의 친밀하던 그때(전12:1-14 )

주하인 2009. 2. 25. 12:28

제 12 장 ( Chapter 12, Ecclesiastes )

 

날이 저물어

갈곳없어 외로울 때도

오직 나의 빛이 되시는

우리 창조주 하나님이시여.

내 아버지

내 주여.

 

 


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어제는 집에 있는 구형 노트북의 내용 중

중복되어 있는 파일 들을 지우고 정리하던 중

2년 전에 써 놓은 글들을 보았다.

 '시'가 그득하였다.

아니, 내 마음을 있는 대로 옮겨 놓았는데 지금 보니 시 같다.

거기에는 운율과 감동이 그대로 들어나 있다.

 잠시 그때의 감동으로 돌아 가 보았다.

참 힘들때였다.

외부적으로나 내 부적으로

폭팔 할 듯한 어려움으로 부딪기던 때였다.

그런데 그 때 감동이 더욱 많았다.

길거리 가다가 순간 밀고 들어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수첩을 부리나케 꺼내어

끼적거리고 그것을 컴에다 정리하고

그 폭죽터지는 듯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다가

사진기에 담기에 바빴다.

 

 그런데 요즈음

글을 쓰되 형식적인 경우가 많아졌다.

기쁨으로 흘러는 나오되

그 때만큼 그처럼 전율을 느끼는 감성은 줄어들었다.

 

확실히 고난이 넘치는 곳에 위안이 넘친다는

주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낀다.

 

 

 이 아침 묵상 글에서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라 나온다.

그 감동의 하나님

그 기쁨의 하나님

그 열정의 하나님

그 희망의 하나님.....

다시금 그 주님을 만나길 원한다.

 

 특별히,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기억하라고 하신다.

 

어제는 곤고한 마음을 돌이켜 보니

요새처럼 평온한 적이 없었던 것바

상당히 오랫동안 불쑥.. 주님의 기쁨이 그리워 기도원을 찾은 적이 없음을 알았다.

머리가 복잡해서

혼나는 듯해서 간 적은 있지만

그것도 실은 요식적 마음이 강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마음이 편하고 환경이 피니

내 영혼이 갈급함이 적었다.

TV가 내 주인처럼

다시금 내 삶의 많은 시간이 TV로 사로 잡히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안절부절과 말씀으로 거침을 받은 강도가 약해져 갔다.

  어제는 갈급해지기 전에 올랐다.

곤고한 날이 이를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올랐다.

순수한 두려움.

경외하는 두려움.

 

 오르니 목사님이 참으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신다.

하시는 말씀마다 어찌 그리

내가 잊어먹어 가고 있던 연결 고리를 채우시는가?

 ' 말씀으로 힘을 받아 이겨나가야 한다.

 그 말씀이 힘이 있게 영혼에 다가오려면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는 말씀이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 '

 맞다.

기도가 너무도 필요한 것은 누구도 안다.

나도 안다.

하지만 게을러 졌었다.

기도가 왜 필요해..라고까지는 아니지만

기도를 절절히 안해도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 생각하는 기회 만 있어도 그것으로 족하다는

어이없는 생각으로 날 채워가고 있었다.

 '난 주님 손잡고 가고

 동행하다가 잊을 만하면 외워 두었던 말씀 구절을 되뇌이면

 주님이 날 생각하실 텐데.. 무엇이 걸릴 것인가?

 난 자유롭다.'라는 생각으로 채워지고 잇었다.

그러다 보니 영적인 인간이 아니게 되어 가고 있었다.

 

 목사님의 말씀은 이어져 간다.

아내되신 사모님과 신학교 동창이신데

당신은 모태 - 못해..신앙이라네요.ㅎㅎ - 신앙이라서

산기도를 가도 비가 오면 뜨뜻한 차안에서 기도하시지만

사모님은 그 비오는데 산에 꼭 오르셔 비를 다 맞으시며

온몸 적셔가며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 사모님께 '어디에도 계신 하나님을 미련하게 거기에 가서 그래야 하나'라고 비웃었다 하신다.

하지만, 그 다음의 말씀이 놀라왔다.

' 무릎꿇고 힘들게 정성들여 한 기도는 편안하게 응답 받지만

편안하게 한 기도는 무릎꿇고 어렵게 응답을 받게 된다' 고...

 맞다.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이시다.

'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

 부족하고 어이 없음을 아시고 날 이리 미셨구나.

 그리 곤고한 마음을 허락하시고

 의지를 내게 하시사

 날 밀어 올리신 이유가 저것이시구나'라 느낌이 오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다.

요새 자주 예배를 드리는 것이 '통쾌'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도행전의 '통쾌한 날이 '라는 표현이 가슴에 그대로 오는 날이 적잖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날 무척 사랑하신다.

 이 아침에

'곤고한 그 날이 오기 전'에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이

바로 저런 경험이 아니신가?

 

  곤고함은 일상의 편안함과 상관없이

주님과 친밀하지 못했음이다.

주님과 친밀치 못함은 기도와 열정의 부족이다.

주님은 늘 동행하심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동행하심을 잊게 됨은 당연하다.

그것은 주님은 영이신 것 처럼 영적 세력의 방해가 있음이 당연하다.

그 방해는 말씀의 은혜가 줄어듦에 따라 커지는 것이고

말씀의 은혜가 줄어듦은 기도의 분량이 적어지고

주님에 대한 열심이 줄어 듦에 비례한다.

 결국

더 기도해야 한다.

더 무릎끓어야 한다.

그것이 이전의 그 감사함이 절절히 되살아 나는 길이다.

 그것이 전능자 하나님을 잊지 않는 방법이고

그 것이 앞으로 있을 지도 모를 곤고한 날에 대비하는

영적 에너지를 보충하는 유일한 길이다.

 

 난 세상을 살되 천국을 지향한다.

그 길은 꼭 평탄하지만은 않다.

그길이 평탄하기 위함은 기도의 비축이 필요하다.

 

 

적용

 

1.  말씀 일곱장 읽겠다.

 

2. 주님을 더 가까이 느끼겠다.

 기도원 간다.

 

3. 기도를 늘린다.

 

 

 

기도

 

주님

어리석은 저 입니다.

수술을 늦게 마치고 전인치유 모임에 가니

목사님이 절 보고 그러시네요.

 예전하고 다르시네요.

조금 가라 앉아 있는 것 같다고요.

잘 보십네요.

영적 감수성은 누가 보아도 다 알수 있나봅니다.

이제

주님 전능자를 다시 만나기 원합니다.

곤고한 때를 위해서도 준비해야 할 듯 싶습니다.

다시 주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친밀하던 그 때를 회복하길 원합니다.

주님.

저를 붙들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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