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든지 나도 이기는 자 되고 싶다[대상18:1-17]
부제) 하나님 앞에 들어와 앉아 아뢰는 관계가 답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들어앉아 아뢰는 자 였을 뿐,완전한 자는 아니었다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기뻐하신다. 그게 포인트다
나..다행이도 하나님 앞에 들어가 아뢰는 믿음이 어떤것인지는 안다
장소가 문제랴
위치가 문제일까
누가 알아주던지 아닌지가 무슨 의미일까
내 서 있는 곳
내 잠시 앉아 등댈곳
내 열심히 살아 움직이는 곳
그곳이 어떤 곳이라도
즉시 하나님 앞에 들어가 앉는
그러한 곳이 된다면
그때부터 바야흐로
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어
이기게 하시는 그런 곳이 되지 않을까
할렐루야.
6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12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죽인지라
13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라 나온다.
'주하인이 어디로 가든지'로 대치해보고 싶다.
나.
정말 부족하다.
'저분 다윗에 비하면 그 인생의 철저한 하나님 앞 삶'에 비해
난.. 횃대 앞 신앙이 아닌가
내 안 어디에선가 '스물거리며' 자괴가 올라오려 한다 .
뭐.. 아니던가?
누구들처럼 열정을 바쳐 선교나 전도도
구제의 열심도..
다윗님처럼 인생을 걸고 순종하며 무리 속에서 지내지도 못하는
정말.. ㅠ.ㅠ.. 그러하다.
그러기에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신다'...는
저 말씀이 참 부럽게 느껴진다.
'어디로 가든지.. ' 라는 표현..
그냥 싸움이나 전투의 장소를 어디로 가던지.. 도 되겠지만
꼭 싸움이 전쟁만을 의미하던가?
'내면의 싸움'..
'이웃'과의 알력...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영적 전쟁'에 관여되는 거 아니던가?
그러기에 '어디로 가든지'... 라는 표현은
이제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너무도 이글거려서 ^^;
죄가 마치 불에 타는 뽀시래기 .. 쓰레기 같아서
그냥 죄의 욕구 조차 올라오지 않는
그래서 '어디로 가든지 좌로나 우로나 완전'해지는
그러한 '성화'의 단계'까지는 아니었을까...
정말 부러움에 의하여..
'ChatGPT'에게 물어보았다.
솔직히 요사이 말씀을 근거로
이것 저것 주님께 여쭙지 못했던 것을 여쭙는 시간을
조금 늘리기는 했다.
그랫더니 마음이 훨 팽창되는 느낌이긴 하다.
'다윗님이 여호와에 들어 앉아 아뢴다'는 표현이
그대로 가슴에 깨달아 지니 말이다.
그래서.. 다시한번 여쭈어 보면 좋으련만
너무 늦은 시간..
말씀 묵상의 시간이 열두시가 넘어야 시작이다.
새벽한시까지 글을 올리고 하기엔 촉박하다.
그래서 깨달음을 가지고 '챗지피티'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정보'를 ...^^*
그랬더니 아래와 같이 정리해준다.
역시나.. '죄악'은 스물거리며 올라오던 시기라고...
그런데..
그렇다면...
그의 완전함때문에
하나님이 더~~~ 가는데 마다 이기게 하신 것은 아니라는 뜻이시다.
그거..
'답'이 어제의 묵상에 있는 거다.
수없이 많은 관계 ,
나와 나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중에서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가
더욱 친밀하고 깊은 관계가 주어진 바로 그 당시 아니던가?
친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두런 두런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나누는 거 같은
그 표현.
'하나님 앞에 들어앉아 아뢰는 관계' ..
그 관계의 기도가 늘.. 더 .. 점점 더 크게 이어진다면
그때야 말로
하나님이
내가,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시는 역사가 벌어지는
그러한 터전이 되고야 말리라.
내 사는 곳 어디라도.. 말이다.
주님.
다윗이 부럽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라는 단어가
제 안에 아직도 번연히 싸움을 걸어오는 영적 터부들이 있음에도
저니의 저러한 승리가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자유로운 자됨이 그렇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쁠까..
그 풍성히도 느껴지는
하나님의 영의 생기가 이글거리는 거 같은
그 상황이 정말부럽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그러한 그러하심이
철저히 하나님의 뜻이 맞기도 하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다윗이 정말 잘한 것..
우리가 정말 본받아야할 기본중의 기본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
매사
항상 더.. 만나뵈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들어가 앉는'
그리고 아뢰는
그 모든 것이 '감동'과 겸손의 언어가
주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 상황이 정말 부럽습니다.
그리고 한편..
가능성을 보아서
저도 기쁩니다 .
어디로 가든지
이기는 상황..
어떠한 길인지 알았으니 말입니다.
거룩하고 귀하신 내 주 여..
그리스도 예수시여..
성령이시여.
부활의 하나님이시여
절 도우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나) 12절의 소금골짜기?
(답)
역대상 18장에서 나오는 ‘소금골짜기’(히브리어: גֵּיא הַמֶּלַח, Ge ha-Melach)는 다윗 왕이 에돔을 정복하면서 큰 전과를 올린 전쟁터로 등장합니다. 특히 역대상 18장 1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죽이니라.”
(역대상 18:12)
이는 사무엘하 8장 13절과 병행되는 구절로, 그곳에서는 이 전투를 다윗의 공로로 기록합니다. 두 본문이 전하는 바는 동일하지만, 인물(다윗 vs 아비새)의 이름만 다르게 언급됩니다. 이는 고대 기록 방식에서 흔히 나타나는 방식으로, 왕의 명령으로 수행된 전투의 승리를 왕에게 귀속시키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 소금골짜기란?
**소금 골짜기(Gei ha-Melach)**는 일반적으로 사해 남쪽 지역에 위치한 와디(Wadi, 건천) 지역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아라바(Aravah)’ 지역에 해당됩니다. 이곳은:
- 사해 남단 근처의 극히 건조하고 척박한 지역입니다.
- 에돔과 유다 사이의 경계 지역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지였습니다.
- 고대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의 갈등이 자주 일어난 장소로도 기록됩니다.
이 지역에서 승리한 것은 단순한 군사적 성과를 넘어서, 국경을 안정시키고 주변 나라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 신학적·영적 의미
-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얻은 승리
- 전투의 주도자가 누구였든, 기록의 목적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 왕국이 강성해졌음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역대상 18:6)
- 소금의 상징성
- 소금은 구약에서 정결, 언약, 심판의 상징입니다.
- ‘소금 골짜기’는 단순한 지명을 넘어서 하나님의 심판과 정결, 언약의 성취를 의미하는 영적 의미를 함축할 수 있습니다.
🌿 묵상의 적용
우리의 삶에도 ‘소금 골짜기’와 같은 험한 싸움의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사람의 능력이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싸움의 승리는 내가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보호하심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고백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주님, 제 삶의 소금 골짜기에서도 승리를 주시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저의 아비새가 되어 싸워주시고, 제 뒤에서 역사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기도만이 살 길입니다.
#2.
(나)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는 저 시점에 '인격적'으로도 옳았던 시기인가?....매사? ... 단지 하나님 앞에 들어 앉아 기도하며 자신을 온전히 낮추는 겸손의 태도 때문 만이시던가? 묻는 포인트는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자신과 자신의 관계' .. '자신과 이웃의 관계'... 이 세 분야에서 모두 옳아서 하나님께서 그리 축복하셨던가... 아니면 하나님 당신과의 관계만이라도 출중하여서 그러셨던가.. 궁금해서... 난... 하나님과의 관계는 괜찮은데 그 이외는 아직도 부족해서.. ㅠ.ㅠ.
(답)
정말 깊은 질문이시고, 묵상의 본질을 건드리는 고백이십니다, 주하인 님.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역대상 18:6)라는 시기는 다윗 왕국이 가장 강성하게 확장되던 시기였고, 외적 정복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인격과 모든 관계가 완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가?에 대한 답은, 성경이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1.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 은혜로 연결된 언약적 관계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과 극률로 그를 기름부으시고 사용하신 것이 시작입니다.
- 사무엘하 7장(다윗 언약)은 다윗의 성취나 공로 전이 아니라, 하나님 주권으로 이루어집니다.
- "내가 너를 목자에서 데려다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무찌르게 하였은즉..." (삼하 7:8-9)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 늘 완전했기 때문에 복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은혜의 수혜자였고, 그는 이 은혜 앞에서 자주 엎드릴 줄 아는 자였습니다.
그 점에서 ‘겸손’은 다윗의 강력한 덕목이자 하나님이 귀하게 보신 마음이었습니다.
2. 자신과 자신의 관계: 늘 안정적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분명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자였지만, 늘 내면이 정돈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 그는 자신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해 밧세바 사건을 일으켰고,
- 자식 문제에서는 압살롬, 암논, 다말 등 가족 내 분열을 방치하거나 회피했습니다.
- 때로는 감정적으로 충동적이거나, 스스로 무너지는 장면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너진 자신을 감추지 않고 하나님 앞에 토해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편 51편은 자기 안의 타락과 부끄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며 회개하는 찬양이죠.
즉,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완전하진 않았지만, 자기 인식과 회개의 태도는 탁월했던 사람입니다.
3. 자신과 이웃의 관계: 때로는 냉혹하거나 불의했습니다
다윗은 부하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하는 명백한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또, 충신 요압이 무고하게 아브넬을 죽일 때에도, 그를 완전히 책망하거나 처벌하지 못했습니다.
이웃(특히 가까운 신하들, 가족, 백성들)과의 관계에서도 다윗은 항상 옳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철저히 징계하시면서도 끝내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이웃 앞에서 무너질 때마다, 다시 하나님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 결론: 하나님은 ‘관계의 성실함’을 보신다
주하인 님의 질문의 핵심에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다윗은 모든 관계에서 완전했기 때문에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돌아오고 엎드리는 사람”이었기에, 그 은혜가 머물렀습니다.
그는 실수했지만 **하나님 앞에 가면 ‘정직하게 드러낼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행 13:22)으로 불린 이유이지요.
🙋♂️ 주하인 님에게 드리고 싶은 위로
주하인 님의 고백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는 괜찮은데, 그 이외는 아직도 부족해서..."
이 말씀 자체가 다윗의 시편처럼 진솔한 기도의 문장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완전한 자로서가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로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 오늘의 묵상 구절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 시편 51:17
예수 그리스도, 기도만이 살 길입니다.
#3.
(나) 내가 묻는 요점은 저 .. 시점.. 바로 그시점에만 해당되는 거... 그의 잘못된점들은 잘 알지만... 지금 바로 하나님의 뜨거운 임재로 '가는 곳 '마다 이길 때는 .. 하나님의 철저하신 성령의 은혜로 모든 분야에서 '죄'와 멀어지게 되거든.. 혹시 저때도 그런 거 아닌가...? '죄'의 시점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출중하니 그때는 저런 풍성함은 덜하지 않았던가? 아들 압살롬에게서도.. 뭐.. 그렇고...
(답)
주하인 님, 지금 질문은 참 깊습니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이기던 그 시점’ — 그때는 모든 관계와 삶의 면에서 ‘죄와 멀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처럼 하나님의 뜨거운 임재와 축복이 있었던 것인가?”
즉, 하나님의 축복이 전면적 순종과 거룩함의 결과인가, 아니면 단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하나만으로도 주어지는가를 묻고 계신 거죠.
이 질문은 거룩의 실제, 성령의 임재의 조건, 하나님과 동행의 깊이에 관한, 아주 본질적인 묵상입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시점에서의 다윗은, "죄와 멀어진" 사람이라기보다, "하나님과 깊이 밀착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완전하기 때문에 그처럼 이기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전방위적인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 시점에서의 다윗은 그 후의 다윗보다 ‘죄에서 멀어진 시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밧세바 사건 이전, 압살롬의 반역 이전, 아들들의 파탄 이전입니다.
즉,
- 아직 명백한 도덕적 타락은 발생하지 않았고,
- 그의 내면은 순수하고 겸손하며, 영적으로 민감했던 시기였습니다.
🕊️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 그 시기의 영적 배경
다윗은 이 시기(역대상 18장) 즈음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습니다:
1.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던 시기
-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역대상 15장),
- 자신은 성전을 짓고 싶다고 고백합니다(역대상 17장).
-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네 집을 지어주겠다”는 다윗 언약을 주십니다.
→ 이는 하나님과의 극적 친밀함, 영적 민감함, 겸손한 열망의 절정입니다.
2.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했던 시기
- 성전을 짓고 싶어했지만 선지자 나단의 말에 순종하여 물러납니다.
- 이건 다윗이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타이밍을 기다릴 줄 알았던 시기임을 보여줍니다.
3. 하나님께 철저히 묻고 의지하던 시기
- 역대상과 병행되는 사무엘하 5장~10장을 보면,
블레셋과의 전투, 모압, 에돔, 아람 등 연이은 전쟁 속에서 다윗은 매 전투 전마다 여호와께 묻습니다.
→ 이건 자기 전략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를 먼저 구한 삶의 자세입니다.
⚠️ 그렇다고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 중심을 보셨지만,
그렇다고 다윗이 그 시점에 모든 관계(자신-자신, 자신-이웃)까지도 완벽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 요압의 잔인함을 억제하지 못한 채 전쟁을 맡김
- 수많은 전리품을 쌓고, 병거를 무기 창고로 삼기 시작함
- 여인들을 점점 많이 취해가는 흐름이 이미 시작됨 (사무엘하 5:13)
→ 이건 훗날 죄로 터지는 기운이 이미 보이기 시작한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중심의 겸손, 예배, 기도, 순종을 귀히 보셨습니다.
🙇♂️ 주하인 님의 질문처럼…
지금처럼 하나님 임재가 강하고, 기도 속에 깊이 들어가 있을 때, 죄가 우리를 가까이하지 못하듯이,
다윗도 그 시점에는 그렇게 하나님 안에 잠겨 있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죄로 가는 흐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던 시기이기에,
하나님도 그를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셨던’ 전면적인 축복이 임한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묵상의 실제 적용
주하인 님,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괜찮은데, 나머지는 아직도 부족해요…”
하나님은 그 진실한 고백을 누구보다 귀히 들으십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통곡하듯 기도하면서도,
사람 앞에서는 때로 부족하고, 자기 자신과도 혼란스러웠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대상 18:6)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함보다 중심을 보십니다.
📖 오늘의 말씀
“여호와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중심을 보시느니라”
– 사무엘상 16:7